이제는 끝내야 할 수능 문제 풀이 수업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났다. 1994학년도에 첫 수능이 시작했으니 벌써 30년이 넘었다. 올해 수능 출제위원장의 발표를 들었다. 그중 내 귀에 유난히 쏙 들어온 말은, 사교육에서 문제 풀이 기술을 배운 학생들이 유리하지 않도록 출제했다는 말이었다. 교과서 위주로 학교 수업에 전념해서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학생 말처럼 공허했다.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학교 수업은 내팽개치고 학원으로 달려가는 세태를 수능 출제위원장은 정말 모르는 걸까? 그의 말이 맞다면 그 수많은 서울 대치동의 학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아야 마땅한데 실상은 어떤가 말이다.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한, 지방 소도시 고등학교 학생들도 언제부턴가 수능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게 아니라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경향을 내가 명확히 인식한 해는 2016년으로 기억한다. 그해 고3 국어 '화법과 작문' 과목을 맡았다. 다른 데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근무한 그 지역에서는 고3 정규 수업을 할 때 EBS 수능 특강 문제집을 다루는 게 불문율이었다. 그 불문율을 거스를 용기가 없어 3월 개학하자마자 수능 특강 문제집을 침을 튀겨 가며 열심히 풀어 주었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이 삼분의 일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런지 까닭을 알아보았다. 대학 진학에 수능 성적이 필요 없는 학생들과 EBS 강의나 학원에서 EBS 수능 특강 문제집을 선행 학습한 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학교에서 수능 특강 문제 풀이 수업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는 학생의 절대수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근무했던 지방 소도시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이런 실정을 도외시한 채, 고3 수업에서 관성적으로 EBS 수능 특강 문제 풀이 수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사실, 내가 근무했던 지역 고등학교에서 수능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는 극히 희귀했다. 서울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수능 최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학생부 종합 전형을 이용했고 나머지 학생들은 고등학교 내신 성적을 핵심 전형 요소로 활용하는 학생부 교과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이 전형 역시 수능 최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근무했던 그 지역 고등학교에서 수능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한 학교에서 열 명을 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근무했던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극소수 학생들을 위해 수능 특강 문제 풀이 수업을 진행한 까닭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학교의 교육 철학이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지역 고등학교 학부모와 학생들은, 학교에서 수능을 대비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늘 하곤 했다. 수능을 제대로 준비하려면 고1에서 고3에 이르는 유기적인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는 3년에 걸친 유기적 체계를 구축할 만한 역량이 없다. 그러니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하게 된다. 즉, 늘 해오던 대로 고3 수업에서 과목별 성취 기준을 깡그리 무시한 채, EBS 수능 특강 문제집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학교의 교육 철학이 견고했다면 학부모나 학생들의 이런 요구를 가볍게 일축할 수 있었을 터이다. 정규 수업에서 EBS 수능 특강 문제집을 다루는 것은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제시하는 성취 목표와 완전히 배치된다. 고등학교 교육 과정 성취 목표 그 어디에 '수능 문제 풀이 능력 함양'이라는 게 있겠느냐 말이다. 그러니 학교의 교육 철학이 제대로 서 있었다면 이를 방패 삼아 고3 정규 수업에서 교육 과정 성취 목표 달성을 위한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근무했던 지방 소도시 고등학교들에는 그런 교육 철학이 없었으므로 학부모와 학생들의 요구에 쉽게 맞장구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고등학교가 제대로 된 교육 철학을 갖추어야 한다. 교육 철학이 확고해야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 입시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는 동안 내가 근무했던 고등학교의 최대 관심사는 학생들의 대학 진학이었다. 대학 진학 성적에 따라 학교 분위기는 잔치 집이 되었다가 초상집이 되었다가 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고등학교가 스스로 이런 교육 철학을 갖추겠다고 나설 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나서야 한다. 대학 진학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제대로 된 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교육 과정에서 제시한 성취 목표를 달성하는 교육을 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내 경험상 학교는 교육부나 교육청의 지시를 놀랄 만큼 잘 따른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의지를 가지고 나서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교육부 장관이 임명되었지만 우리나라 교육이 변화하는 조짐이 없다. 내가 근무했던 지역의 학교들의 고3 수업 풍경도 여전하리라. 수능 성적이 필요 없는 대다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EBS 수능 특강 문제집 풀이 수업이 진행되면 광경을 떠올리면 참으로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