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김현 엮음, <앵무새의 혀>에서

by 꿈강

엮은이의 말을 빌리면,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모두 추위를 이겨내려는 입김이라고 할 수 있단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들을 읽으며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다소나마 녹을 수도 있겠다. 어느 누구에겐가는, 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을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 고정희, <관계> -



새마을 회관 마당 앞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여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 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 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아무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해도

늙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

오래간만에 털썩 주저앉아 너도

한번 쉬고 싶을 것이다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기에

몇백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너의 졸음을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백여 년 동안 뜨고 있던

푸른 눈을 감으며

끝내 서서 잠드는구나

가지마다 붉게 시드는

늙은 소나무여

- 김광규, <늙은 소나무> -



앵무새 부리 속의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 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 한 번 하고 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 김명수, <앵무새의 혀> -



주님이시여, 나를 벌하지 말아 주소서

화가 나시더라도

흐느끼는 이 소리 들어주소서


뼈 마디마디 경련이 일고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목숨 살려주소서


내 피에 세금 붙이고

오찬에 만창에 비틀거리는 자들

저들의 헛웃음 소리에

이 몸 피 말라 쓰러지오니


주님이시여, 저들의 헛웃음 소리 내치소서

이 몸 일으키시어

저들 앞에 나서게 하여 주소서

- 김형영, <통회 시편 1> -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지만

아프리카 한복판 가뭄에 굶어 죽는

수십 만의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갈대였을까

갈대같이 말라서 쓰러져 죽고 마는

아무 생각 못 하는 개미떼들이었을까.

그 갈대를 꺾어서 응접실을 치장하고

생각하는 갈대답게 아프리카를 본다.

두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가죽만 남은 어린것, 파리떼 엉킨 눈,

사진 설명에만 안타까워 흥분하다

치고받는 데모, 치고받는 투전에 흥분하다

판세에 휩쓸리면 몸 사리는 우리 갈대.

어차피 세상의 갈대밭은 불타고 말지,

땅이 타는 아프리카 불기에는

생각 없는 갈대가 무더기로 타 죽고

우리 땅의 불에는 언제 누가 타서 뒹굴까.

- 마종기, <아프리카의 갈대> -



눈뜨면 보일 듯 보일 듯

나사렛 예수,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귀 기울이면 들릴 듯 들릴 듯

나사렛 예수,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눈뜨면 뜰수록 보이지 않고

귀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들리지 않는다

- 서원동, <나사렛 예수 4> -



해는 저물고

밤이 나직하게 게워내는 중얼거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저만큼서

누가 촛불을 켜고 있는지,

시름에 젖어

제 살이나 뜯다가 고개를 들며

먼 눈을 뜨고 있는지,

내가 마시다 남은 물대접의

물무늬 위에 문득

낯선 별이 하나 떠오르고 있다

밤의 옷자락, 그 어른대는 주름 사이로

나의 신음 소리 또한 지워질 듯

희미하게 헤엄쳐가고 있다.

맙소사. 맙소사.

바람 부는데 잠은 멀고

나는 언제나 어둠 속을 서성거리며

별을 꿈꾸며, 아침을 기다리며.

- 이태수, <기다림을 위하여 9> -



어머니의 편지는 감정이 물씬거리는 육성으로 자꾸 아들을 불렀으나 여의치 않은 서울살이가 나를 으레 일상의 말뚝에 매어두었다. 빈농이 생애를 걸고 공부시킨 장남 역을 과연 어떻게 해낼 것인가. 말뚝 주위를 빙빙 돌며 빈약한 풀을 뜯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연은 나를 말뚝을 뽑고 고삐째 내달리는 염소로 만들어 곧장 고향으로 떠나게 하였다. 아니 그래 회갑이 다된 노인이 남의 과수원 농약을 닷새나 계속했다니, 중독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뒤의 편지였지만, 요는 나의 무능에 대한 아버지의 질책이 자학에 이르지 않았나 의심케 하는 사연이었다. 나는 한편 당황하고 한편 부글거리는 심사를 억누르며 길을 떠났고 버스가 고속도로를 근대화된 속도로 질주할 때는 마음이 차츰 슬픔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자갈길을 덜컹거릴 때는 줄곧 어떤 어린 날의 추억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날 버스에 오르면서 아버지는 검표원에게 내 차비는 내지 않아도 되느냐고 확인했었다. 이미 소풍을 두 번이나 다녀온 나를 취학 전이라고 우기고서. 그런데 막상 내릴 때는 차장의 거친 삿대질에 운전사까지 밖으로 퉁겨 나와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 최두석, <파라티온> -

*파라티온: 유기인계(有機燐系) 살충제. 사람과 가축에 대해서도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살포할 때 철저한 방독 처치가 필요함.



올겨울은 몹시 춥고 따분하다

추워 나다니기가 무섭다 을씨년스럽다

퇴근길에 길 위로 걸으면 빠를 것도 길 밑으로 내려선다

요새 지하도엔 없는 게 없다

땅 위에 없는 것도 땅 밑엔 있다

사람들도 훨씬 더 북적대는 성싶다

다만, 환기가 제대로 안 되는지

어떤 땐 퀴퀴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냄새쯤 추운 것보다 훨씬 낫고 부드럽다는 대답이

모두의 이마세 써붙여져 있음을 본다

금은 세공이 있는가 하면 싸구려 라면까지 조리해 파는 곳이 이곳이다

유행가 가락이 구슬프고

밤에도 대낮처럼 환한데도

나는 노상 이 가게가 저 가게 같고 저 집이 이 집 같다

만년필 사시겠어요?

바바리 사시겠어요?

속마음까지 알아보고 속주머니의 돈 액수까지 척척 알아맞히는 데가

바로 이 지하상가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두더지처럼 땅 밑에 숨고 싶어진다

길 잃은 개 한 마리라도 만난다면 얼마나 안심이 될까

그러다가 아예 지하철역까지 내려가 정처 없이 떠나기도 하지만

이놈 발길에 채고 저놈 발길에 채다 말고 끝내 내 품에 안겨

할딱거리는 개의 숨소릴 듣고 싶다

반 고흐의 햇볕 쏟아지는 풍경화가 비스듬히 걸렸고

존 웨인이 날 노려보고 있고

김구 선생 또한 근엄하게.

내 왼쪽 겨드랑이에 약간의 통증 있음

앞서 걷는 여자 구두 뒷굽의 높이가 갑자기 이쪽저쪽 차이 나게 느껴지기도 함

노래하거라 꽃들아 소리치거라 안경테들아

저 알 없는 안경이 내 안경 같고

내 안경이 저 금테 안경 같구나

이런 착각은 내가 안경을 끼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낄 때까지

계속된다. 닳아라 구두 밑창들아 닳고 닳아빠져라

- 최석하, <지하 시대> -



네 마음속에 그려진 하늘 위로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하늘의 무수한 푸른색을 부수며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네 마음의 하늘을 부수지 마라

새가 날고 있다

새를 날리는 것은 누구인가.


네 마음속에 그려진 바다 위로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바다의 무수한 푸른색을 부수며

한 마리 새가 날고 있다

네 마음의 바다를 지우지 마라

새가 날고 있다

새를 날리는 것은 누구인가.


네 마음의 그림 속으로

자꾸만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


오, 행복하 노예

너의 사슬을 끊어라.

- 홍영철, <네 마음의 새> -



여기가 어딘가?

봄산(山)이 햇살 속에 겉옷 슬쩍 걸어놓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배의 솜털을 보여준다


저 칼로 썰어논 구름장 위에

날리는 햇살!


살아 있는 것이 겁 없이 황홀해

더 앉아 가지 못하고

시외버스를 내린다.

- 황동규, <풍장(風葬) 12> -

*풍장: 시체를 한데에 버려두어 비바람에 자연히 없어지게 하는 장사법.



바깥으로 손잡이가 달린 문

서대문(西大門)

열리지 않는다

이 벽은 내부가 외부다

종로가 저 안에 깊숙이 갇혀 있다

25번 버스가 이 벽 끝에서

이 벽 저 끝까지 종일 왔다갔다 한다

헤어나지 못하는구나

- 황지우, <나는 너다,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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