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로 보낸 한평생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에 관한 한 생각
일반계 고등학교에도 수업 이외의 다양한 형태의 교육활동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현장체험학습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소풍이라고 불렀다. 하긴, 지금은 수학여행도 현장체험학습이라고 부른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에 '학습'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싶은 듯하다. 명칭에 걸맞게 '학습'적인 요소를 살리면 좋을 텐데, 많은 경우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2년 전인 2021년 10월 경의 일이다. 그때 나는 2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다. 극성을 부리던 코로나가 약간 누그러지는 시점이었는데, 학년 부장 교사가 어느 날 학년 회의에서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 얘기를 꺼냈다.
기말고사 끝난 뒤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을 추진하라고 학교 관리자들이 말했다고 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누그러져 이미 편성되어 있던 현장체험학습 예산을 써야 하기 때문에 꼭 현장체험학습을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기말고사 끝나면 날씨가 너무 추워져 의미 있는 현장체험학습이 불가능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학년 부장이, 체험학습까지 두 달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으니 본인과 체험학습 담당 교사가 잘 준비해 보겠노라고 했다.
내가 다시, 정히 체험학습을 추진해야 한다면 행사 취지에 맞게 학생들의 '진로와 연계'한 체험학습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학년 부장은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공언했다.
기말고사 일주일 전쯤, 현장체험학습 관련 학년 회의가 다시 열렸다. 학년 부장과 담당 교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연말이고 날씨가 워낙 추워 체험학습 장소를 구하가 너무 어려웠다. 요리, 캘리그래피, 방송 댄스, 서양 매듭, 요가, 창업 컨설팅, 목공예, 심리 상담 등의 8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과 겨우 연결이 되었다. 학급별로 한 개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을 진행하겠다. 담임교사가 제비를 뽑아 담임 학급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정하겠다.
체험학습 프로그램들이 학생들 진로와 연관성이 그렇게 크지도 않을뿐더러 학급별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담임의 제비뽑기로 결정하겠다니!
이게 무슨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이란 말인가! 기껏해야 '취미 연계' 체험학습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왜 꼭 학급별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학생 개개인이 8개의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학년 부장에게 했더니,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불가능하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학년 부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애당초 체험학습 계획 단계부터 학생들을 중심에 놓지 않고 체험학습을 추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이니만큼, 학생들의 진로 희망을 최대한 고려하여 체험학습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희망을 조사하는 데서 계획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물론 모든 학생들의 희망을 다 들어줄 수는 없을 터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희망과 체험학습 운영 기관의 상황을 고려하여 최대공약수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학생들의 희망 조사는커녕 담임교사들에게조차 어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게 좋을지 묻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 학년 부장 교사가 매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의 바르고 합리적이며 학생들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는 교사라고 칭찬받는 교사였다. 그러면 이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은 왜 이렇게 추진했을까?
자세히 물어보지 않아서 정확한 내막을 알 도리는 없다. 또 설령 물었더라도 설득력 있는 대답을 들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는 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편성된 예산 다 쓰기' 때문 아닐까 싶다. 교직생활 35년 동안, 고장 난 레코드판을 튼 것처럼 내내 들어온 이야기 중 하나가 '편성되어 내려온 예산은 남김없이 써야 한다'이다. 편성된 예산을 남김없이 다 써야 유능한 교사라는 소리를 듣는다.
아직도 나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교육활동을 계획했다가 사정이 생겨 계획대로 추진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해당 예산은 반납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학교 행정실에서는 어떻게 하든 편성된 예산을 다 소진하라고 한다. 안 그러면 다음 해 학교 예산이 줄어든다며. 교육청에 문의해도 대답은 똑같았다.
그래서 예의 바르고 합리적이라고 평가받는 그 학년 부장 교사가 그런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을 추진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한다. 현장체험학습은 가야 하고, 그 추운 겨울에 갈 곳은 마땅치 않고, 편성된 예산은 다 써야 하고. 그러니 우격다짐으로 학생들의 '진로'와 그 어떤 '연계'도 되지 않는 현장체험학습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해서라도 편성된 예산을 몽땅 다 써야 했으리라.
그러나저러나 '진로 연계 현장체험학습'은 강행되었다. 여덟 학급 학생들이 여덟 대의 45인승 전세 버스에 타고 체험학습 장소로 이동했다. 우리 학급은 내가 제비뽑기에서 두 번째를 뽑아 학생들 선호도가 높았던 '서양 매듭'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리 반 학생 한 명이 '창업 컨설팅' 프로그램을 체험하기를 원했는데 그 소망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학년 부장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으나, 단 한 명의 예외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학년 부장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우리 반 학생의 희망을 들어주었다간, 자신의 희망대로 체험학습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낼 테고 그렇게 되면 체험학습을 도저히 진행할 수 없게 되겠기에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 반 한 학생의 희망대로 해 주지 못한 것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다.
교직생활을 되돌아보니, 이와 비슷한 일들이 정말 많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교육 활동의 원래 취지에 들어맞지 않는 활동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렇게 형식적인 활동을 하고도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적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생활기록부에 기재되면, 대학에서는 그 기록을 사실로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모 대학의 입학사정관과 통화할 기회가 있을 때, 내가 그 점에 대해 콕 집어 물어서 알아낸 사실이다. 그때, 그렇다면 학생부종합전형이 상당 부분 과대 포장한 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내가 근무한 학교에서만 일어난다면, 뭐 그리 문제될 것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짐작건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 모든 고등학교는 아니겠지만, 상당히 많은 고등학교의 사정이 내가 근무한 학교와 비슷하리라 추측한다.
활동 취지에 딱 들어맞는 교육 활동을 추진하고, 학생들의 활동 상황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평가한 다음 사실에 의거하여 생활기록부를 기재하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시간에 쫓겨, 예산을 쓰느라, 행사를 위한 행사에 매몰되어 의미도 없고 알맹이도 없는 교육 활동을 전개한 다음 학생들의 활동을 과대 포장해서 생활기록부에 기재하는 악습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