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은 시

윤장규 시집, <언덕>에서

by 꿈강

윤장규 시인은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집 <언덕>에 수록되어 있는 그 어떤 시도 버릴 게 없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윤장규는 짧게 스치는 한순간, 한 장면의 풍경 속에서 단면의 서사를 읽어내는 솜씨가 뛰어난 시인이다. 긴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잘 담근 김장김치처럼 맛깔스럽고, 짧은 소묘만으로 이야기를 다 한 시에는 긴 사유의 공간과 꽉 찬 여백이 들어 있다.


그의 시편들을 차분히 읽어 보자. 커다란 울림을 주는 시를, 분명 만나게 될 터이다.



냉잇국을 먹다가,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꼬막 한 놈과 한판 씨름을 하고 있는 중이다.


된장 냄새가 손에 묻는 것이 싫은 나는, 숟가락으로 젓가락으로 어떻게든 그 입을 열려고 낑낑대지만, 앙다문 이빨은 당최 요지부동이다.

제가 잡혀온 꼬막이면 포로답게 고분고분 입을 열어야 할 것인데,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 펄펄 끓는 물고문을 당하고 나서도 너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이냐.

그만 오기가 나서, 밥을 먹는 것도 다 잊고, 과도를 가져다가 앙다문 이빨 새로 끼워 넣고, 쫄깃쫄깃한 꼬막살을 떠올리며, 실토하란 말야! 주리를 틀 듯 강제로 입을 벌린다. 기어코 우두둑―이빨이 부스러지며 마침내 드러나는……!

오오, 꼬막 속에는 갯벌 하나가 다 들어있었다. 서해 간척 사업으로 갯벌들 하나둘씩 사라진다더니, 이 꼬막, 굴삭기 윙윙거리고 트럭 덜컹거리는 갯벌을 떠날 때, 눈물 한 줄금 흘리고 서해바다 하나를 다 담아와, 제 몸을 통째로 발효시켜 갯벌을 만들었구나.


냉잇국을 먹다가, 억지로 속을 드러낸 꼬막 한 놈에게서 유쾌한 되치기 한판 당하고 만다.

- 윤장규, <꼬막> -



이상한 일이었다. 아파트에 이사 온 지 십 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내내 아파트 앞 언덕이 밤마다 웅웅 울어댔다.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바람까지 불러서 같이 울기도 했다.

십 년 동안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달이 뜨는 밤이면 몰래 베란다에 나가, 아주 늦은 밤까지 언덕을 지켜보았으나, 끝내 그 울음 우는 얼굴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나브로 아파트는 낡아갔고, 나는 언덕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꿈만 꾸면서, 사십대로 늘어난 세월의 매를 우울하게 맞았다. 가슴에선 몇 번인가 까닭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늘, 아파트 베란다 앞 언덕에, 땅내 맡은 고추밭을 지나며 동풍이 분다. 고추 포기들이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호박잎들이 따라서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모든 풀들이 일제히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린다. 새들도 모두 서쪽으로만 머리를 두고 날갯짓을 하자, 마침내 언덕이 서쪽으로 기어간다.

그렇게 모두들,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는데,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걷는 사람이 있다. 오른손은 지팡이 짚고 왼손은 허리를 짚고, 보이지 않는 쟁기를 끄는 것처럼 몸을 기울여 느릿느릿 바람 불어오는 쪽으로 걷는 할머니. 그때 나는 보았다. 할머니 뒤를 따르며 역류하는 바람을, 그 소용돌이 끝에 이끌려오는 풀들을, 끝내 땅의 뿌리를 움켜쥐는 언덕을.

아아, 나는 비로소 알았다. 이 아파트는 언덕을 밀어내고 세운 아파트. 할머니가 치맛자락을 깃발처럼 이끌고 언덕 동쪽에다 고추말뚝을 꽝꽝 박을 때, 깃대를 세우듯 꽝꽝 박을 때, 말뚝 박힌 언덕이 밤마다 제 자리에 뿌리내리는 소리를

- 윤장규, <언덕> -



이 모 씨의 시집을 읽고

며칠 후 어느 평론가의 상찬(賞讚)을 읽고

김 모 씨의 시집을 읽고

며칠 후 어떤 평론가의 호평(好評)을 또 읽고


그만 늦가을 숲처럼 쓸쓸해져서

낮잠 자고 있는 여섯 살배기 딸에게

조용히 속삭여 보네


네가 시집가는 것이

내가 시집 내는 것보다

더 빠르겠다, 아마……


하릴없이

딸이 차 낸 홑이불이나 덮어주는

마흔 다섯 가장의 가늘고 긴 손


슬그머니

방바닥을 기어와

손등을 덮는

얇은 가을볕

한 장

- 윤장규, <햇볕 한 장> -



반갑다, 감기야


이제껏 아무것도

나누어 줄 것이 없던 내게

비로소 나누어 줄 것이 생겼구나


이마엔 불덩어리 같은 열 오르게 하고

피부엔 바람결에도 소스라치는 소름을 기르자

입에선 쉴 새 없이 기침 쏟아지게 하고

목구멍엔 그륵그륵 위태로운 가래를 끓이자

팔다리까지 욱신욱신 저려올 때를 기다려

마침내

온 몸뚱이 혁명공약 같은 몸살이 나게 하자


거리로 나가는 거야, 만나는 얼굴들마다 가까이 다가가, 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을 하아―, 하아―, 토해 놓으며, 보고 싶었다 말하자, 가능하면, 걸걸걸, 소리 내어 웃자, 사랑하는 사람 만날 때는, 더욱 힘주어 껴안고, 볼 부비며, 입맞춤도 하자, 그렇게 모두에게 이 반가운 손님을, 소개해 주자, 그리하여, 모두들 혁명의 동지가 되게 하자


새벽이 되면

온통 가래뿐인 도시를 덮으며

비로소 하얀 눈이 오리라

그렇게 혁명은 우리 앞에 오리라

- 윤장규, <감기> -



김장 배추를 다 절여놓고

어머니는 소풍 기다리는 아이 같다


내일은 토요일

늦가을의 도깨비바늘처럼 떨어져 나간 자식들

며느리와 함께 손주 손잡고

초겨울 저녁 햇살 이우는 고개 넘어

어둠이 쌓이는 마당귀를 들어설 테지


밤 깊도록

생강 먼저 씻어 빻아놓고

무를 씻고 또 썰고

당근을 씻고 또 썰고

파를 다듬고 또 썰고

갓을 다듬고 또 썰고


묵 쳐 먹고


매콤한 고춧가루를 듬뿍 섞어

곰삭은 젓갈을 넣고 버무릴 때

살아가는 칼칼한 이야기들도 같이 버무려서

매콤하고 칼칼하고 알알한 양념을 만들 때

초겨울 밤은 마흔둘 맏이만큼 깊어질 테지


홍시 골라 먹고


노오란 배추 속을 골고루 헤쳐 가며

손맛까지 섞어서 속을 채운 후

웅크린 태아처럼 동그랗게 말아

웅숭깊은 김칫독을 넣고 호박돌을 누르고 나면

윗방 아이들은 저들끼리 칡덩굴처럼 얽혀 잠이 들 테고

남정네들 사랑방에서 겉절이 안주하여 술 마실 때

남은 양념에 푹 삶은 도야지 고기도 제격일 테고

며느리들은 모여 앉아 형님 동서 불러가며

시아버지 몰래 마시는 동동주 한 잔도 있을 테고


사는 것이 다 막 담근 김장 같아서

당장은 매콤하고 칼칼하고 또 알알하지만

갓 시집온 며느리와 시어머니처럼 어석대지만

꽁꽁 언 땅 속의 어둠뿐인 독 속에서도

익을 것은 익어가고 맛 들 것은 맛 들어서

내년 봄까지 또 김치처럼 사는 것 아니겄냐


부처님 법어처럼 한 말씀 내리고 싶으신

어머니는 지금 꿈속에서 웃고 계시지

- 윤장규, <김장> -



우리 집 텔레비전엔 대일밴드가 붙어 있다


다섯 살 딸아이가 게임기 가지고 놀다가, 게임기에 연결된 전선이 텔레비전에 걸려, 눈은 게임기에 두고 허리를 비비 꼬아가며 자꾸만 줄을 잡아당기다가, 기어코 텔레비전이 장식장에서 거실 바닥으로 떨어진 날, 할머니와 아이 엄마는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가 그것만 호들갑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는데, 아이는 어디가 아픈 것처럼 구급상자를 들고 오더니, 밴드를 꺼내 금이 간 텔레비전의 왼쪽 눈자위에다 아주 정성스럽게 붙였다. 그리곤 호―하고 여러 번 불어주었다


요즘 우리 집 텔레비전은 별 탈 없이 잘 나온다

깊은 밤이면 얕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 윤장규, <약손> -



겨울 고추밭은 고향 선산 같다


먼저 익은 순서로, 잘 익은 차례로

얼굴 발갛게 달아 금빛 꿈을 품고 고추들이 떠난 후

바랭이도 그만 싱거워져서 하늘을 놓아버리고 주저앉은 밭고랑에

곯아빠진 것 벌레 먹은 것들의 무녀리 허접데기 육신과 함께

소신공양을 위해 단식하는 고추대궁이 한겨울을 난다


겨울이 끝나갈 어느 때가 되면

주인은 뿌리 뽑힌 저들을 거두어 불을 붙일 것이다

그날 기꺼이 활활 타오르기 위하여

가장 고운 재로 사그라지기 위하여

그렇게 저 땅 속에 온전히 스며들어

제 그림자에 가렸던 한 뼘 땅 데우기 위하여

고추대궁은 가는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야위어 간다


붉기도 전에 벌레 먹어 떨어져 나간 둘째 같은

장마철에 헛물켜고 곯아빠져 여직 골골거리는 넷째 같은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푸르고 아린 꿈들

다 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마를 수 있는 것

마르고 나서야 빈 몸뚱이에 뜨거운 불이 붙는 것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하얀 재로 가라앉아

자손 하나 일으킬 한 줌 거름이라도 되는 것


타고 남은 재가 되어서라도 꼭

태어난 곳에 묻혀야 한다는 노인네의 고집이

웅크림도 없이 신음도 없이

겨울 눈보라를 견디고 있다

고향 선산을 지키고 있다

- 윤장규, <겨울 고추밭> -



꽃샘눈 내리네

젖은 눈송이가 벚나무 가지를 건드리네

바람까지 불러다 자꾸 달라붙기도 하네


가만히 실눈을 뜨고 보면 보이네

꽃샘눈이 나뭇가지를 건드리고 비비댈 때

샘이 소독 솜처럼 나뭇가지를 문지르고 나면

꽃눈이 슬며시 나뭇가지 속으로 들어가는 게


벚나무 가지마다

옴지락 꼼지락 태아가 노는 모습


이제 햇빛만 한 차례 더 들렀다 가면

배싯 배싯

벚꽃 연달아 피고

벚나무 밑에는

애앵 애앵

종일 아기 울음소리 들릴 거네

- 윤장규, <꽃샘눈> -



오일장이 선 날 저물녘

공설시장 앞 건널목 신호등 옆에

버려진 시간의 창고에서 가져온 것 같은 물건들을 파는 할머니가 있다


까치밥을 따온 것같이 찬바람 묻은 감 몇 개,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는 고추 몇 개, 마른 꼭지 달린 홈에 칼바람 맞은 듯 살짝살짝 금이 간 배 몇 개, 백내장 걸린 비닐에 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는 청국장 몇 덩이, 들판에서 이삭 주워온 듯이 온몸이 동상 걸린 잔챙이 고구마 몇 개, 그리고 여기저기 힐끔힐끔 흘리고 간 사람들의 시선 몇 개와 추운 기다림에 겨워 종종거린 사람들의 발자국도 몇 개쯤 벌여놓고


흘러내리면서 살얼음처럼 번질거리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할머니 콧물 자국과, 몇 겹 껴입은 털 빠진 오리털 파카 웃옷에 떨어진 된장 국물 몇 방울, 그리고 개진개진 눈에 낀 젖은 눈곱과, 머리를 감싼 낡은 수건을 비집고 삐져나와 바람 속으로 풀어내는 추억 같은 잿빛 머리카락 몇 가닥, 그 위롤 서슴서슴 내리는 눈발도 몇 개쯤 벌여놓고


할머니는 지금 식은 국수를 드신다. 플라스틱 그릇에 배달돼 온, 훈김도 오그라드는 국수에는 검버섯같이 늙은 김 부스러기도 얹혀 있고, 채 썰어진 푸른 호박은 추억처럼 싱싱하다. 호박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는 할머니의 감긴 눈에 젊은 날이 아득한 눈발처럼 희뿌옇게 한참을 떠다니는 듯……. 꿈속에서 걸어 나오듯 주름진 미소로 눈을 뜬 할머니가 목젖도 없는 목을 젖혀 그릇에 남은 식은 국물을 후루루룩 목구멍 속으로 흘려보내면


또르릉 또르릉, 파란 불이 켜졌습니다, 건너가도 좋습니다.


할머니 목구멍 속으로

후르륵― 또르릉― 또르릉―

오는

건너가도 좋은 겨울

- 윤장규, <건너가도 좋은 겨울> -



눈은 산골에도 도시에도 들에도 강에도 내리네

내려서

쌓이네


산토끼도 눈을 밟고

사람도 눈을 밟고

자동차도 눈을 밟고

물고기도 눈을 밟고

바람도 눈을 밟네


사람이 밟은 곳만 진창이 되네

- 윤장규, <눈> -



저문 상가에서 조문을 했다

낮은 웅얼거림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소주를 마시며 끊어진 인연을 떠올릴 때

달빛에 지는 봉숭아도 사뭇 붉었다


어룽어룽한 밤길을 돌아 조문을 다녀온 밤

칠순을 훌쩍 넘은 어머니 불 꺼진 방에서

잦아드는 기침소리가 문풍지처럼 귀에 울 때

집까지 따라온 달도 봉숭아물이 들어 있었다

- 윤장규, <봉숭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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