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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Dec 19. 2023

<러덜리스>(2015)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인간은 필사의 존재다. 필사의 각오든 필사의 노력이든 소용없다. 때가 되면 죽는다. 그러나 그 공리가 필사의 비애를 희석하는 건 아니다. 슬픈 건 슬픈 거다. 그래도 우리는 얼마간 슬퍼하다가 제 삶을 찾는다. 공리 덕분이다. 그런데 아들딸의 죽음은 다르다. 때가 되면 죽는다는데, 때가 되지 않았는데 죽는다. 그건 공리가 아니다. 그래서 참척慘慽의 슬픔이다. 그래도 얼마간 슬퍼하다가 제 삶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닐 거다.


  샘(빌리 크루덥 분)의 아들이 죽었다. 그런데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그는 캠퍼스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6명이 죽었고, 아들도 죽었다. 기자들은 득달같이 샘을 쫓아와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했다. 샘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가 무심한 아버지 라서가 아니다. 아들이 사람을 죽였고, 죽었다. 어떤 아버지라도 모를 일이다. 샘은 기자들로부터 도망쳤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2년이 지났다. 샘은 호수에 살고 있었다. 작은 배가 샘의 집이었다. 겉은 낭만적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얼굴에는 수염이 수북했고 옷은 꾀죄죄했다. 샘은 도망치고 있었다. 기자로부터, 아들로부터 도망친 곳이 하필이면 호수였다. 호수는 단절의 공간이다. 그곳은 적요寂寥하다. 적적하고 고요함. 그것은 평화롭고, 암울한 것이다. 샘은 도망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호수는 암울하기만 했다.

  샘은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모르는 체했지만 소용없었다. 샘은 유능한 광고기획자였지만 어설픈 페인트공이 돼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페인트로 덧칠하고 품삯을 받았다. 돈보다는 덧칠이라는 몸짓이 필요했을 것이다. 샘은 품삯을 받으면 술로 탕진했다. 그는 레몬을 뺀 맥주를 마셨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샘은 도망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전 아내가 샘을 찾아왔다. “조쉬(마일즈 헤이저 분)를 없던 애로 취급하면서 숨어 살든 말든 맘대로 해. 하지만 착각하지 마. 이건 숨어있는 거야”. 전 아내는 진실을 말하고 떠났다. 아들의 유품만 남았다. 샘은 그것조차 내버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곳에는 아들의 가사집이 있었고, 녹음테이프가 있었다. 아들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샘이 심어준 꿈이었다. 그는 아들의 가사집을 읽고,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려 하네. 다른 세상 얘기 같지만. 강해지려 해도 다시 깨닫고 마네. 멀리 떠나갈수록 더 깨달을수록 집으로 가고 싶네. 가방을 꾸리네. 새로운 날 새로운 시간. 참 어리석게도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멀리 떠나갈수록 더 깨달을수록 집으로 가고 싶네’.


  아들의 노래에는 아들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샘은 아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러면 아들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샘은 자주 들르던 펍으로 갔다. 그곳에는 작은 무대가 있었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샘은 아들의 노래를 불렀다. 충동적 일탈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어떤 남자가 샘을 붙잡았다. “뭔가 깊은 감정이 실린 노래예요. 난 쿠엔틴(안톤 옐친 분)이에요”. 쿠엔틴은 끈질기게 샘을 찾아왔다. 샘의 노래에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었다. 쿠엔틴은 샘의 음악적 동지가 되고 싶어 했다. 샘은 끈질기게 쿠엔틴을 뿌리쳤지만, 쿠엔틴은 더 끈질기게 샘을 붙잡았다. “들려줄 생각이 없는 사람이면 애초에 곡을 쓰지도 않아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던 아들이 눈에 밟혔다. 샘은 쿠엔틴의 음악적 동지가 되기로 했다. 음악을 하는 그의 동네 친구들도 모였다. 밴드 러덜리스Rudderless는 그렇게 결성되었다. ‘rudderless’, ‘어쩔 줄 모르는’. 밴드명은 샘과 꽤 잘 어울렸다. 러덜리스는 샘의 노래를 불렀다. 물론 샘의 노래는 아들의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쿠엔틴은 샘의 아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샘은 얼만큼 즐거워 보였다.

  러덜리스의 노래는 사람들을 웃고, 뛰며, 노래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는 사람들을 울게 할 수 없었다. 진실이 없는 예술은 사이비 예술이다. 사이비 예술은 누군가를 웃게 할 수는 있어도 울게 할 수는 없다. 러덜리스는 샘의 노래를 불렀고, 샘의 노래는 아들의 노래였다. 하지만 샘은 그 진실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은 애도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샘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없었다. 정신분석학자 도리 라웁은 말했다.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러나 반복되기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치유의 과정, 즉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 그리고 필수적으로 사건을 재외연화하는 과정이 만들어져야 한다”. 재외연화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그 사건을 발화한 이후 그것을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샘은 아들의 죽음을 재외연화할 수 없었다. 아들의 묘비에는 원색적인 비난이 가득했다. 지우고 지워도 소용없었다. 내일이면 다시 쓰일 터였다. 캠퍼스에서 총기를 난사해 6명을 죽인 건 그만한 죄였다.

  어쨌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샘은 아들의 노래가 사랑받는 만큼 기뻐했고, 또 불안해했다. 결국 일이 터졌다. 어떤 여자가 샘을 찾아왔다. 아들의 전 애인이었다. “오늘 사람들이 그 곡들에 환호하면 어떤 기분이겠어요? 환상 속에 사시는 게 아주 볼만하네요”. 그녀는 쿠엔틴에게, 어쩌면 샘에게도, 진실을 알려주었다. 쿠엔틴이 말했다. “이 노래들을 하는 건 잘못된 거야. 잘못이라고”. 샘이 말했다. “그래도 내 아들이었어”. 샘은 자신을 뿌리치는 쿠엔틴을 붙잡았다. 쿠엔틴은 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샘은 술에 절어 호수로 돌아갔다. 그런데 나루터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었다. 호수는 샘의 도피처였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샘은 할 수 없이 철조망을 기어올랐다. 그러나 마땅히 그는 떨어졌고, 기타는 박살났다. 샘은 절규했다. 날이 밝았다. 요트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호수는 배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샘은 일렉 기타를 치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그는 제 손으로 도피처를 망치고 있었다. 샘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찰에 잡혀간 샘을 악기상이 데리러 왔다. 러덜리스를 제외하고는 그가 샘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럼 우리 밴드 곡들, 내 아들이 썼다면 뭐라고 할 거야?” 샘이 물었다. “정신 나갔어?” 친구가 답했다. “내 아들이었잖아”. 샘이 말했다. “죽은 애들도 마찬가지야. 남의 집 아들딸을 자네 애가 죽였어”. 친구가 말했다. 샘은 그길로 아들의 캠퍼스를 찾아갔다. 추모비가 있었다. 샘은 추모비를 붙잡고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울었고, 6명의 희생자를 위해 울었다. 샘의 첫 대속이었다.

  샘은 쿠엔틴을 찾아갔다. 쿠엔틴은 기타까지 팔아넘기고 도넛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다. 꽁꽁 감추고 있었던 샘의 진실이 쿠엔틴에게 큰 상처를 남긴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래서 쿠엔틴은 샘을 아버지인 양 따랐다. 그러고 보면 그는 샘의 아들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샘도 쿠엔틴을 아들인 양 챙겼다. 그런데 샘은 그 아들에게조차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는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했다. 샘은 쿠엔틴의 상처라도 어루만지고 싶었다.   

  “너와 무대에서 같이 공연한 첫날, 내가 모르던 조쉬를 만난 기분이었어. 새로운 곡을 할 때마다 조쉬를 더 알게 됐고, 거기에 중독돼 갔어.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추기도 싫었지만, 그건 조쉬가 아니었어. 그건 너였어. 쿠엔틴, 정말 미안해. 젊은 인생 하나 또 망치긴 싫어”. 샘이 말했다. “그럼 죄책감은 버려도 돼요. 이미 21년째 막살고 있으니까”. 쿠엔틴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충고야. 포기하는 자는 이길 수 없어”. 샘이 다시 말했다. 포기했던 자의 충고였다. 샘은 기타 몇 개를 내려두고 나갔다. 그중에는 쿠엔틴이 팔아넘겼던 기타가 있었고, 그가 꿈꾸던 기타도 있었다.

  마침내 샘은 자주 들르던 펍으로 갔다. 여전히 그곳에는 작은 무대가 있었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 아들 이름은 조쉬 매닝이었습니다. 2년 전 6명을 총으로 쏴 죽였죠. 이건 제 아들의 노래입니다”. 샘은 아들의 노래를 불렀다.

‘너의 노랠 부를 길을 찾을 테니 같이 불러다오. 상실은 회복될 수 있어. 떠난 것은 잊혀지지 않아. 네가 여기 곁에서 함께 노래할 수 있다면 내 아들아’.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샘은 더 이상 호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디에서든 노래할 것이다. 아들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샘은, 십자가를 지고 말 것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이다. 사람들은 울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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