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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Dec 28. 2023

<너의 이름은.>(2017)

그러니까, 이름은 사랑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몸이 바뀌는 이야기는 흔하다. 보통 두 개의 몸은 몸 바꾸기로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상생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2017)의 몸 바꾸기는 조금 다르다.

하나. 타키(카미키 류노스케 분)와 미츠하(카미시라이시 모네 분)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서 몸 바꾸기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둘. 몸 바꾸기는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망각되고 만다.


셋. 타키와 미츠하 사이에는 3년쯤의 시간차가 있다.


  하나에서 사랑이 움트기 시작하고, 둘, 셋에서 역경을 만난다. 타키와 미츠하는 그 역경을 헤쳐 나가야 한다. 중요한 건 망각에의 저항이다. 감독 신카이 마코토는 말했다. “인간에게 가장 잔혹한 일은 무엇일까? 당연히 죽음이다.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보다 잔혹한 것이 있다. 바로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망각 앞에서 보잘것없이 작고 초라하다. 저항의 무기도 변변치 않다. 그래서 인간은 입버릇처럼 기억하라기보다는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지도 모른다.


  망각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래도 사랑의 망각은 비극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내일의 기억>(2007) 같은 영화가 생각난다. <내일의 기억>은 잘 나가는 회사의 간부인 남자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망각이 계속된다. 남자가 가장 괴로운 건 아내를 잊어버린다는 거다. 남자는 아내와의 추억이 깃든 산을 오른다. 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려오는데 아내를 만난다. 남자는 말한다. “저는 사에키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아내가 말한다. “제 이름은 에미코입니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사랑의 망각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속 철수(정우성 분)는 물었다. “제 두 눈을 바라보면서, 옛 남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도대체 진짜 사랑 한건 누굽니까?” 가장 비극적인 건 이름의 망각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름이 관계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황혼, 그 기적의 시간에 타키는 말했다. “미츠하, 잠에서 깨어도 절대 잊지 않도록 서로에게 이름을 써주자”. 이름은 관계의 시작이고, 끝이다. <너의 이름은.>은 이름의 망각에 저항하는 이야기다.  

  김훈은 말했다. “그래, 사인화된 감정이 나온다고 쳐. 그런데 ‘이름은 잊었다’는 게…… 말이 돼? 잊을 수가 없잖아. 난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어떻게 이름을 잊어. 나는 눈동자는 잊어도 이름은 못 잊었어. 그건 이상해”. 애인의 이름은 잊을 수 없다. 그건 애인의 얼굴만큼이나 씩씩하게 망각에 저항한다. 도대체 왜. 그깟 이름이 뭐라고.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창세기 2장 19절의 말씀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생물의 이름을 붙였고, 하나님은 그로써 아담에게 생물을 번성케 할 책임을 지웠다. 아담은 부모였고, 생물은 자식이었다. 작가도 부모고, 작품도 자식이다. ‘기호로서의 이름’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건 문학 따위의 예술작품에서 인물, 장소 등의 뜻을 지시하는 이름이다. 기호로서의 이름이 붙여진 인물, 장소는 그 뜻이 분명하므로 별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름은 정체성의 낱말이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붙인다. 잘 살거라. 이름에는 축복과 강요가 뒤엉켜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실타래 같은 이름으로 산다. 그래서 이름은 저항할 수 없는 정체성의 낱말이다. 그건 가벼워도 무겁고, 가까워도 멀다.


  그래서 이름은 사랑을 닮아 있다. 김훈의 소설 「화장」에는 그의 사랑관이 있다. 「화장」의 주인공은 잘 나가는 회사의 상무다. 집에는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아내가 있고, 회사에는 추은주라는 이름의 신입사원이 있다. 남자는 아내를 두고도 추은주를 사랑하는 곤란한 처지에 처해있다. 그는 말한다.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의 이름인지요.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는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


  남자의 말을 길게 풀어내지 못함은 유감이다. 어쨌든 나는 사랑으로부터 이름으로 가야만 한다. 이름은 타자고, 부름은 욕망이다. 그런데 이름은 알아도 부를 수가 없다. 부름이 자꾸만 이름에 미끄러진다. 그러니까, 욕망은 영원히 타자에 닿을 수 없다. 너는 너 나는 나. 사랑은 너와 나의 중첩인데 그게 안된다. 그래서 남자는 추은주의 이름, 몸 따위로 추은주를 떠올릴 때 기갈, 허기에 시달린다. 할 수 있는 건 약속 밖에는 없다. 김훈은 말했다. “이것은 기약하는 거지. 기약할 수 없는 것을 거짓으로 기약하는 거지요. 낭만적 사랑”. 사람은 사랑하겠다는 약속, 내가 너에 닿겠다는 약속을 하고야 만다. 물론 그건 망각될 약속일지라도, 닿을 수 없는 걸 잡으려고 손을 뻗치는 건 태곳적 본능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 니체는 말했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뜻이 된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한 나는 그대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서 오는 것일지라도 같은 행위를 나에게서 계속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외관은 상대방의 머리 속에는 있는 셈이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기만 없이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경우, 그 사랑이란 외관상의 영속을 약속하는 것이다”.


  “행위는 약속할 수 있으나 감각은 약속할 수 없다”.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사랑의 행위를 입증함으로써 이행된다. 그것도 “언제까지나”, “계속”, “변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랑은 지난한 일이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의 중첩을 계속하는 일.  그래서 어떤 사랑은 영원하고 어떤 사랑은 단명한다.


  어쨌든 영원한 사랑에는 늘 부단히 애를 쓰는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입을 맞추고, 몸을 포개며, 말을 나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나가 되려고 애를 쓴다. 부조리다. 그런데 그 부조리까지 사랑할 때 사랑의 죽음은 유예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아내, 남편, 누구 엄마, 누구 아빠 따위로 부르지 않는다. 그 모든 건 선택의 산물로서 부조리가 아니다. 두 사람은 대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이름은 저항할 수 없는 정체성의 낱말로서 부조리다. “기약할 수 없는 것을 거짓으로 기약하는 거지요”. 그건 사랑이었고, 이름이었다. 가벼워도 무겁고, 가까워도 멀며, 부조리한 것.


  애인을 언제까지나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그 이름에 뒤엉켜 있는 축복과 강요를 기억하는 것, 그 이름과 애인의 간극을 기억하는 것, 부조리를 기억하는 것, 그 부조리에 순응하고 또 저항해 온 애인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로써 내 이름을 반추하는 것, 내 이름에 뒤엉켜 있는 축복과 강요, 내 이름과 나의 간극, 부조리, 그 부조리에 순응하고 또 저항해 온 나의 역사를 반추하는 것, 그러다 문득 애인의 이름과 내 이름이 얼마나 달랐는지 상기하는 것, 그런데 또 내 애인과 내가 지금은 얼마나 닮았는지 상기하는 것, 그래서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상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름은 사랑의 도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려는 타키와 미츠하의 몸부림은 그토록 처절했고, 싱그러웠으며,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아까부터 공책에 무언가를 깨작이고 있었다. 공책에는 이름 두 개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남자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애인의 이름이라고 했다. 남자는 이름 두 개를 겹치는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두 이름이 워낙 달라서 애를 먹고 있긴 해도, 자기는 엄청 큰 장난감 레고도 뚝딱 조립해 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름 두 개는 자음과 모음이 뒤섞여 있었고, 줄이 찍찍 그어졌다가, 깎일 대로 깎여 각진 구석이 없었다. 남자의 손에는 까만 흑연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남자는 그게 복권 부스러기 같지 않으냐고 물었다. 옆에는 애인의 사진이 있었다. 남자는 언제 어디서 애인을 만났는지, 어떻게 그런 미인을 만날 수 있었는지, 왜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한참 떠들었다. 그동안에도 남자의 손은 빨빨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가끔 애인의 이름을 소리 내 부르기도 했다. 그 소리는 한없이 작고 유약했다. 남자가 애인의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그녀의 이름은 둥글게, 둥글게 깎이고 있었다. 남자는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말했고, 남자는 있다고 말했다. 무스비, 그게 남자의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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