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명 Feb 04. 2024

<비긴 어게인>(2014)

늙은이는 더 이상 별을 볼 줄 모른다.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음반 회사와 계약을 맺은 애인 데이브(애덤 리바인 분)와 뉴욕으로 온다. 데이브는 금방 유명세를 얻고, 팝 스타의 클리셰대로 바람을 피운다. 그레타는 데이브의 아파트를 떠나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친구도 싱어송라이터다. 그 덕에 그레타는 어느 라운지바에서 내키지 않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곳에는 전직 스타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 분)이 있었다. 지금은 찬밥 신세여도 왕년의 촉은 죽지 않은 모양이다. 댄은 그레타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한다. 그는 그레타를 회사로 데려간다. 그러나 회사의 반응은 미적지근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댄과 그레타는 손수 앨범을 제작하기로 한다. 스튜디오 안이 아닌 길 위에서, 훌륭한 세션 맨이 아닌 발레교습소 반주자와 함께 그레타의 노래가 차곡차곡 쌓인다. 그동안 그레타는 바람난 애인과 재회했다가 영원히 헤어지고, 댄의 딸과 이혼한 전부인도 만난다. 모든 건 가사로 쓰인다. 그레타의 노래는 그녀의 삶이다. 

  앨범이 완성된다. 댄과 그레타는 완성된 앨범을 들고 다시 댄의 회사를 찾아간다. 회사의 반응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그러나 계약 조건이 지나치게 짜다. 그레타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그녀는 손수 앨범을 유통하기로 한다. 가격은 1달러다. 그레타는 유명세를 얻고, 댄은 가족과 재결합한다. ‘비긴 어게인’이다.

  <비긴 어게인>(2014)을 향한 평론가와 네티즌의 온도는 사뭇 다르다. 평론가의 냉담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야 무엇이든 나는 몇 가지 좋은 점만 기억하기로 한다. 


  <비긴 어게인>은 댄과 그레타의 이야기였다. 둘은 동고同苦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부인 또는 애인의 외도가, 사실은 세계와의 불화가 괴로움의 시원이었다. 댄과 그레타는 하얗도록 순수했다. 댄과 그레타의 음악은 단순한 밥벌이 수단쯤이 아니었다. 그레타는 말했다. “누가 뭐라든 난 내 음악이 좋아요”. 그러나 댄과 그레타가 발붙인 땅은 뉴욕이었다. 뉴욕은 하얗도록 순수한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었다. 댄은 그래미 제작상 두 개를 전당포에 맡기고 125달러를 받았다. 그는 누구보다 뉴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댄은 영원한 피터팬이었다. 그는 말했다. “우린 비전이 필요해. 눈속임 말고 그게 우리야”. 

  어느 라운지바에서 그레타는 그녀의 노래를 “도시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곡”이라고 소개했다. 사람들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노래를 들은 사람은 댄뿐이었다. 그레타의 노래를 들은 댄은 그날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말했다. 눈이 뭉쳐지고 있었다. 댄과 그레타는 눈덩이처럼 뉴욕을 굴렀다. 어쩌다 눈송이들이 하나둘 묻었고, 눈덩이는 조금 커졌다. 조그만 눈덩이의 노래가 크게 울려 퍼졌다. 댄의 복잡한 가정사도, 그레타의 바람난 애인도 눈 속에 파묻혔다. 눈덩이는 동락同樂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바람난 애인이 돌아왔다. 데이브는 그레타의 오랜 애인이었고, 음악적 동지였다. 그레타는 잠깐 망설이다가 데이브와 재회했다. 데이브는 바람피운 사람의 클리셰대로 외도를 후회하고 있었다. 그레타도 바람맞은 사람의 클리셰대로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정은 사랑보다 위대한 법이다. 그레타와 데이브는 음악적 동지로서 서로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데이브는 그레타의 노래에 감탄했고, 그레타는 데이브의 노래에 경악했다. 데이브는 그레타가 선물로 주었던 노래를 멋대로 편곡해 놓았다. 그는 편곡된 그레타의 노래가 유명세를 얻을 거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데이브는 더 이상 그레타가 알던 데이브가 아니었다. 그는 때 탄 눈이었다.

  데이브의 새 앨범은 <길 위에서>였다. 미국 소설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에서 영감을 받은 모양이었다.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는 미국 대륙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그의 여행을 반영한 작품이다. 소설의 두 주인공은 약 1만 3000km의 광활한 대륙을 히치하이크로 횡단한다. 긴 여로에서 둘은 술, 사랑, 그리고 음악에 도취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한다. 처음의 불안, 절망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주인공은 어떤 황홀경을 경험한다. 이로써 둘은 계급, 억압 따위에서 해방된 순수한 존재를 만난다. 두 주인공의 여로는 그 자체로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길 위에서>라는 앨범명에는 데이브의 앨범이 아닌 그레타의 앨범이 마땅했다. 그레타는 길 위에서 노래했다. 그녀는 노래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레타는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Y잭으로 댄과 음악을 나눠 듣는 순간은 <비긴 어게인>의 백미다. 댄은 말했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따분한 일상마저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거든. 그게 음악이야”. “이 순간이 진주야, 그레타”. “그런 것 같아요”. 그레타는 말했고, 우리도 그랬다. 그레타는 눈덩이로 돌아가야 했다.

  눈덩이의 앨범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마지막까지도 눈탱이 치기 바빴고, 눈덩이는 소외되어 있었다. 그레타는 단돈 1달러에 앨범을 유통하기로 했다. 판매 수익은 눈덩이와 나눠가질 셈이었다. 그레타의 마지막 선택은 뉴욕을, 데이브를 조롱하는 듯했다. 마르크스의 소외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의 산물에 불과한 것을 오히려 주체로 보면서 그것에 복종하고 숭배하는 상태’다. 정작 소외된 건 뉴욕이었고, 데이브였다. 


  댄과 그레타가 Y잭으로 음악을 나눠 듣는 순간, 둘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가 둘의 행복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었던 건 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라기보다는 둘의 음악을 나눠들을 수 있어서였을 테다. 음악은 일상을 진주로 만드는 연금술을 부린다. 그래서 영화음악은 영화와 우리네 삶의 변곡점이다. 영화음악은 적시 적소에 있어도 우리네 삶에는 그런 게 없다. 영화음악을 사랑하는 데에는 금기를 어기려는 욕망이 있기 마련이고, 음악영화가 사랑받는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귀는 손을 쓰지 않고는 막을래야 막을 수 없는 몸구멍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의 말에서 음악을 듣는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음악의 위안은 확실하다. 나는 Y잭에 Y잭을, 또 Y잭에 Y잭을, 다시 Y잭에 Y잭을 꽂아 나가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레타의 마지막 선택은 하얗도록 순수했다. 그러나 <비긴 어게인>의 해피엔딩은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지금 이곳의 승자는 뉴욕이고, 데이브다. 그레타가 승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인지 댄과 그레타의 이야기는 길 위에서의 이야기였다. 어쨌든 둘은 어딘가에 도착했다. 종착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댄과 그레타는 다시 길 위에서 노래할 테다. 어떤 사람은 그레타의 마지막 선택으로 자극을 받고, 어떤 사람은 조소를 보낸다. 전자는 젊은이고, 후자는 늙은이다. 나이는 별반 중요치 않다.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빛나기 위해 노력하는 별들이 아닐까요?” 젊은이는 별이고, 늙은이는 돌덩이다. 늙은이는 더 이상 별을 볼 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