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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명 Nov 30. 2023

<광식이 동생 광태>(2005)

숭배는 사랑이 아니다.

 12세기 마리 드 샹파뉴의 궁정 사제 앙드레 르 샤플렝은 『사랑의 기술』을 썼다. 그는 사랑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미 첫 번째 대화에서 언급되었듯이, 사랑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망을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키스를 허락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포옹을 즐기는 것이고, 네 번째는 자신의 몸 전체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는 사랑의 종류로 전개된다.


“어떤 종류의 사랑은 순수하고, 또 다른 것은 혼합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연인의 가슴을 모든 즐거움의 감정으로 감싸는 것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마음으로 생각하여 가슴으로 애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 그러나 육체의 쾌락에서 사랑의 결과를 얻고 결국에는 비너스의 행위로 끝나는 사랑은 혼합된 사랑이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조속히 끝나고, 단지 짧은 순간만 지속되며, 우리는 자주 그런 사랑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광식이 동생 광태>(2005)는 형 광식(김주혁 분)과 동생 광태(봉태규 분)의 너무도 다른 사랑법을 보여준다. 광식의 사랑은 첫 번째 단계에 머무른다. 그러나 광태의 사랑은 두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까지 앞만 보고 내달린다. 광식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하지만 광태의 사랑은 혼합된 사랑이다. 앙드레는 광식의 사랑을 응원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기억에 남는 건 광식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선언일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17년의 안타까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1997년, 사진학과 91학번 유광식은 윤경(이요원 분)을 만났다. 그는 한눈에 반했고 고백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의 날이 왔다. 그러나 친구의 방해로 거사는 실패했다. 7년이 흘렀다. 광식은 사진관을 하고 있다. 그는 7년 전 거사를 방해했던 친구의 결혼식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윤경이 나타났다. 광식의 사랑은 여전했다. 그런데도 광식은 윤경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는 소심한 인간이다.

 광식은 소심한 인간이다. 그런데 정도가 지나치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광식의 부모님은 상품백화점 붕괴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모의 상실이 우울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울의 양태는 다양하다. 자발적 고립, 자기 비하, 자기 처벌이 그 양태일 수 있다. 부모의 상실은 광식 형제에게 큰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형이나 나나 가게 잘 꾸려야 된다? 젊은 놈들이 엄마, 아버지 보상금 받아서 설렁설렁 산다고 얼마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데. 형아 그거 모르잖아”. 광태가 말했다. “너나 잘해”. 광식이 말했다. 광식의 아버지는 삼풍백화점 5층에 있는 냉면집을 좋아했다. 그날 부모님은 그 냉면집에 갔고, 사고가 있었다. 광식은 알고 광태는 몰랐다. 광식은 맏이로서 많은 것들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우연이 가득한 세계는 공포였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은 우연 앞에서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주저하도록 설계되었다. 진화생물학은 소심한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살아남은 소심한 것은 나름의 종교를 만든다. 종교는 우연이 가득한 세계에 필연을 덧씌운 것이다. 사고가 있던 날 광식의 부모님이 삼풍백화점 5층에 있는 냉면집에 갔던 건 우연이었다. 광식은 우연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필연을 좇았다. “기본적인 원칙은 지키고 살아야지”가 광식의 신념이었다. ‘당기시오’라는 문구가 붙어있으면 당기는 것. 그건 살아남은 소심한 것의 종교였다.


“하늘에서 정해 놓은 인연인 두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두 사람은 각각 자기가 상대방과 인연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거야”. 그럴 때면 절대자가 무슨 신호를 보내 줬으면 좋겠어”.


 사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광식은 운명적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윤경을 숭배했다. 윤경은 인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간절히 숭배할 때 절대자가 신호를 보내줄 터였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윤경이 광식에게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지금은 일원동에서 혼자 살아요”. 윤경이 말했다. “아, 나 잠실에서 사진관 하는데 일원동이랑 가깝지?” 광식이 물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죠”. 윤경이 답했다. “그렇지, 일원동이 그렇게 가까운 거리만은 아니야. 먼 거리지”. 광식이 말했다. 윤경의 말 한마디에 가까웠던 일원동이 멀어졌다. 실제로 일원동은 잠실에서 가깝다. 그러나 광식에게 윤경의 말은 탁이었다.

 숭배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오해를 낳는다. 광식은 윤경의 비유를 읽어내지 못했다. 비유였던 신탁을 문자 그대로 읽음으로써 비극을 맞았던 어떤 사람들처럼. 윤경은 광식에게 가방에 있던 스테이플러 알의 반을 선물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오빠한테 반을 줬으니까 난 25년쯤 뒤에 할머니가 돼서 한 번은 더 호치키스 알 살 일이 생기겠죠. 그때 오빠 생각날 수도 있겠다”. 광식이 말했다. “아, 주, 죽기 전에 호치키스 알 살 일 만들어 준 사람으로 기억되겠구나”. 절대자의 신호는 있었다. 그러나 쓸모가 없었다.

 숭배는 어떤 대상을 이상화한다. 자신의 왜소화가 그 반작용이다. 광식은 윤경을 숭배했고, 그래서 작고 초라했다. 그는 그녀를 피하고, 숨었으며, 달아났다. 그렇게 광식의 사랑은 내내 희망에 머물렀다. 윤경은 결국 광식의 조수와 결혼했다. 윤경의 결혼식날,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던 광식이 뒤늦게 나타났다. 그는 축가를 불렀다. <세월이 가면>. 광식의 고백곡이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축가가 끝나고 광식의 독백이 계속된다. “7년 넘게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그녀와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바보짓들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게 짝사랑의 본질이다. 이제 더 이상 바보짓 않는다”.

 잠적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광식은 작년 크리스마스에 윤경과 함께 있었던 술집에 찾아갔다. 그곳에는 광식이 부모님의 무덤가에서 만났던 여자가 있었다. 광식은 먼저 말을 걸었다. 새 사랑이 왔다. 광식은 더 이상 그녀를 숭배해서는 안된다. 숭배는 수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 그 사랑이 상대의 생명에 흔적을 남긴다. 이제 내 흔적이 남아 있는 상대의 사랑을 받을 차례다. “참으로 줄 때, 자신은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냥 운명적 사랑, 절대자의 신호 따위를 기다리는 게 아니다. 숭배는 사랑이 아니다.


 <광식이 동생 광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광식이 잠적해 있었던 동안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야기 비슷한 어떤 것에서 광식 비슷한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김주혁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 좋은 배우였고, 렘토쉬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렘토쉬를 볼 때마다 그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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