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하필 목장에 간 건데?
많은 한국 청년들이 호주에 온다. 어떤 사람은 영어 실력 향상과 경험 쌓기를 목표로, 또 다른 사람은 한국보다 시급이 높은 호주의 최저시급에 매료되어서 등등. 온갖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기회의 땅, 남반구 Down under로 입국한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 내가 워킹 홀리데이로 일본에 있을 때, 마침 비자도 만료되어 가던 참이라 꼭 가고 싶었던 호주 워홀에 대해 알아보던 중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호주 아웃백 한 가운데에 있는 한 육우 목장에 대해 다룬 것이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붉은 대지 위에 목장 건물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소와 양들은 방목형으로 길러지고 있고, 식료품을 구하려면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등. 항상 사람이 없는 곳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여러 의미로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일 끝나고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동료들과 도란도란 바베큐를 즐기는 삶이란.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운전 면허도 없었고 혼자 호주에 입국할 예정이었어서 저 목장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금방 접게 되었다. 그래도 아웃백 목장 이야기가 내 계획 속에 ‘목장에서 일하기’라는 카테고리를 추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호주에 입국하자마자 여러 소규모 목장에 지원 메일을 보냈다. 물론 그들이 자동차도 없고 경력 하나 없는 생 초짜인 나를 뽑아줄 리가 없었고, Unfortunately(유감이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일들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지어 이렇게 완곡한 거절의 메일을 보내는 건 양호한 편이다. 꽤 많은 고용주들은 무반응으로 일축해 버릴 때도 있다. 그러나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호주에서 더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는 세컨드 비자가 필요했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농장이나 육공장 등 1차 산업에서 88일 이상을 근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급한대로 육공장, 캔버라 공사현장 페인터, 블루베리 팜 픽커 등등 목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며 기간을 채우게 되었다. 중간중간에 일이 풀리지 않아 청소 일도 잠시 하기는 했지만 이 글의 주요 내용은 목장에서 일하게 된 계기이기 때문이니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쓰도록 하겠다.
시간은 언제나 빨랐고 돌아보고 나면 추억이 된다. 바로 작년 7월, 나는 번다버그 내에서 이사를 하게 된다. 새로운 집에서 만나게 된 착한 친구, S와 이야기를 하다가 난 목장에서 반드시 일하고 싶다란 어필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마침 자기가 호주 한인 단체 그룹채팅방에서 목장 구인 공고글을 봤다고 하는 게 아닌가. 마치 꼭 사고 싶은 기간 한정 상품이 딱 한 개 남은 것처럼 다급해진 나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거기 지원할 수 있느냐 물어봤고 착한 친구는 나에게 목장 소개글과 함께 지원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 거기만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다른 갈 곳을 구해둬야 하니까 다른 주에 있는 소규모 목장에 먼저 지원했는데 아쉽게도 작은 목장은 떨어졌다. 그 목장주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기본적인 사항을 물어보고 우리는 경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너는 먼저 다른 목장에 가서 경력을 쌓는게 좋겠다며 친절하게 조언을 해줬다. 그 당시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니들이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되겠냐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다시 한 번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지금 일하는 회사에 그것도 밤 12시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첨부해서 지원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늦은 시간에 지원한 것도 있고, 난 무경력에다가 다른 목장에서도 빠꾸먹었는데 얘들이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질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다음 날 출근은 해야 하니 일단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그 날 일이 끝나고 친구들을 픽업해서 돌아가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운전 중이라서 바로 통화를 할 수 없어서 집에 도착한 후에나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전화는 인사 담당자인 E에게서 온 것이었는데, 나는 면접 준비를 더 하고 싶어서 혹시 오후 4시쯤에 전화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나서 부랴부랴 예상 질문과 내 답변을 써 보고 시작했다.
그리고 4시가 되었고, 나는 내 차 안에 들어가서 면접을 진행했다. 나는 항상 동물이 좋았고, 호주는 목축업이 유명하기도 하고 여기서 만들어지는 유제품의 질도 훌륭하다. 기왕지사 호주에 온 거, 호주에서 유망한 산업에서 내 커리어를 키워보고 사람들에게 질 좋은 우유를 제공하는 것도 참 보람찰 거 같다. 나는 꼭 일하고 싶다, 최대한 빨리. 라고 하니 E는 만족한 듯 했다. 나에 대한 어필은 체력과 비위가 좋다, 큐피버도 이미 맞았다. 육공장에서 6개월 가량 일했는데 원한다면 레퍼런스 제공할 테니 체크해봐도 좋다. 그리고 최대한 장기간 일할 것이다. 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합격되었다. 정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내게 언제부터 일하기를 원하냐고 물어봤고 내가 대답하니 그러면 내일 당장 계약서랑 기타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NSW에 위치한 바로 이 목장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이제 곧 이 목장에서 일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 입사할 때는 내가 여기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일단 1년은 있어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는데 어느 순간 일도 익숙해지고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오래 일하니 고용주들도 코워커들도 나를 인정해주는 느낌이다.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그건 소들의 귀여움과 백치미이다. 얘들은 늘상 먹고 자고 싸고 때 되면 착유당하러 나오고. 꽤 자주 말을 지지리 안 듣지만 동물에게 뭘 바라겠는가. 귀여우면 다 된거다. 어쩌면 소들이 나에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소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여담이지만 고마운 친구 S는 내가 같이 일하러 가자고 했는데 자기랑은 안 맞을 거 같다며 거절했다.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