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시점으로 읽는 천재 작가 이상의 일대기[1부]
1.
나는 세 살 때부터 가짜로 살았어. 죽을 때까지 ‘이상’이라는 가면을 벗어본 적이 없지.
세상은 나를 박제된 천재라 부르거나, 그저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해. 내 글을 해독하겠다고 수십 년을 매달렸다는데, 미안하지만 그들은 아직 내 문학의 입구조차 찾지 못했어.
지금 내 방엔 눅눅한 잉크 냄새와 폐결핵으로 각혈한 피 냄새, 그리고 지독한 약 냄새만 가득해. 나는 띄어쓰기조차 잊은 채 이 기괴한 암호들을 종이 위에 쏟아내고 있어. 멈출 수가 없거든. 이 난해한 문장들이 가면이 되어 내 진짜 모습을 가려주니까.
내 일그러진 결핍과 아무도 알지 못했던 삶의 이면. 이제 그 가면 뒤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해.
2.
나는 1910년 9월 23일 태어났어. 이 해는 조선의 역사상 가장 불행한 해 가운데 하나였어.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고, 역신들이 나라를 넘기던 때였지.
서울 인왕산 자락, 양어깨에 날개가 돋은 듯한 산세 아래가 내 고향이야. 내 본명은 김해경. 한자로는 바다 해(海), 벼슬 경(卿)을 썼지. '이상'은 훗날 내가 나를 숨기기 위해 선택한 필명일 뿐이야.
내 아버지는 궁내부 활판소의 잡부였어. 왕실의 서적을 찍어내던 그곳은 거대한 철제 롤러와 압판이 쉼 없이 돌아가고, 서슬 퍼런 절단기가 종이를 삼키는 위험한 중노동의 현장이었지. 아버지는 그곳에서 손가락 세 개를 잃었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에 걸쳐서 말이야. 몸이 곧 재산이던 시대에 손가락을 잃었다는 건, 생계 그 자체가 끊겼다는 선고와 다름없었어.
내 어머니는 더 서글펐어. 고아였거든. 처음부터 돌아갈 친정조차 없었기에 당신의 이름도, 생일도 알지 못했어. 나는 그런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어.
그래서였을까?
어른이 된 후 나는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지.
사람들은 내 문학을 난해한 예술이라 부르지만, 사실 내 인생은 더 잘살아보려고 애쓴 흔적일 뿐이야.
경제적 무능함이 목을 죄어올 때면,
돈을 벌 줄 모르는 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수필에 이렇게 적기도 했어.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 법니다. 못 법니다."라고.
3.
하지만 가난보다 날 더 아프게 한 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큰아버지한테 버렸다는 사실이야.
세 살 무렵이었어. 나는 친부모의 곁을 떠나 큰아버지 김연필의 집으로 갔지.
큰아버지는 부유했지만 아들이 없었어.
가계를 잇기 위해 조카를 데려오는 관습이 내 운명을 결정지었지.
부모님은 내가 굶주리는 것보다 부유한 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논리였어. 세 살배기 나에게 이 일은 그저 부모에게 버려지고 팔려 갔다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을 뿐이야.
이때부터 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거짓말로 시작됐어. 나를 낳아준 부모를 ‘숙부’와 ‘숙모’라 불러야 했고, 낯선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러야 했지. 진짜와 가짜가 뒤집히고, 참과 거짓이 혼란스러운 이 기괴한 연극.
내 문학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거울과 자아의 분열은 아마 이 모순된 상황 속에서 싹텄을 거야.
만약 그 집에서 행복하기라도 했다면 그 상처를 잊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큰어머니는 나를 시종일관 차갑게 대했어. 아들을 낳지 못한 그녀에게, 남편이 데려온 똑똑한 조카인 나는 축복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낙인’이었으니까.
결국 큰어머니는 아들을 낳았어. 그 순간 내 자리는 사라졌지. 나는 아들이 없던 집안의 빈자리를 잠시 채우러 온 ‘대역’이었을 뿐이야. 진짜가 태어나자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가짜’가 되어버렸어. 한 집안에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이 함께 사는 기묘한 풍경.
나는 매일 아침 큰어머니의 서늘한 눈빛을 보며,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살아야 했어. 내 성격의 서막은 그렇게 어둠으로 채워졌지.
4.
나는 철이 들기 전까지 나를 낳아준 분들을 지독하게 미워했어.
나를 버린 부모를 향한 원망은 어린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독기였지.
수필 <슬픈 이야기>에 나는 이렇게 적었어.
나는 그분들께 돈 한 푼 드린 적 없고, 엿 한 가락 사다 드린 적 없다고. 단 한 번도 절을 해본 일조차 없다고 말이야.
그분들이 새 신발을 사주시면 나는 일부러 그분들이 모르는 어두운 골목길로만 다녀서 신발을 다 해뜨려 버렸어. 그분들이 어렵게 마련해준 월사금을 내밀 때면, 나는 그분들이 읽지 못하는 어려운 글자들만 골라서 배웠지. 나를 팔아넘긴 세상의 질서에 내 방식대로 침을 뱉고 싶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어른이 된 후, 그 미움은 지독한 미안함으로 바뀌었어. 막내 옥희가 부모님 심부름으로 돈을 빌리러 올 때면, 나는 주머니를 탈탈 털어 가진 것을 전부 쥐여주었지. 살아생전 어머니는, "돈 벌어서 편안히 모시겠다"던 내 거짓말 같은 약속을 유언처럼 간직하며 나를 그리워하셨어. 미워했기에 더 아팠고, 아팠기에 끝내 그분들을 내 마음에서 도려내지 못했어.
그사이 내 친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이발관을 차렸지만, 시대는 가난한 자들의 편이 아니었어. 갈수록 심해지는 위생 단속과 경쟁 속에 이발관은 곧 망해버렸지.
그 무렵 나는 열일곱 살이 되었고,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어. 사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내 동생 옥희를 앉혀두고 스케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큰아버지의 반대는 서슬 퍼런 칼날 같았지. 예술로는 입에 풀칠도 못 하니, 차라리 기술 관리가 되어 일제에 복무하라는 게 그분의 뜻이었어.
결국 나는 화가의 꿈을 접고 큰아버지가 걸어간 건축가의 길을 택했어.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보란 듯이 일본인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학업이 전부는 아니었어. 나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지. 선과 색으로 뒤틀린 내 자아를 증명하고 싶었거든.
5.
1928년, 졸업을 앞둔 스무 살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캔버스에 옮겨 담았어. 누군가는 이걸 보고 어설픈 습작이라 비웃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건 내 비틀린 내면을 빛으로 태워 박아 넣은 기록이야.
거울 속 내 얼굴은 정확히 둘로 쪼개져 있어. 밝은 왼쪽이 삶이라면, 어둠이 짙게 깔린 오른쪽은 죽음이지. 내 정수리는 마치 누군가 휘두른 둔기에 맞은 듯 흉측하게 주저앉아 있어.
더 기괴한 건 내 눈이야. 왼쪽 눈동자는 지나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지만, 오른쪽 눈엔 아예 안구가 없어. 그저 텅 빈 가면처럼, 오직 어둠만이 고여 있을 뿐이지. 죽음이라는 놈이 내 삶 속에 얼마나 깊이 기생하고 있는지, 나는 이 눈으로 매일 확인하며 살았어.
얼굴 아래를 봐. 목이 없지? 마치 단칼에 잘려 나간 것 같아. 내 안에서 들끓는 자살의 충동이 붓 끝에서 이렇게 터져 나온 거야. 그 잘린 단면 아래론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엔 무덤을 지키는 십자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어.
고독, 불안, 그리고 공포. 이 그림은 내 비틀린 심장을 그대로 꺼내어 놓은 포토그램이야. 저 그림 속에서 나는 삶이 죽음으로 저물어가는 그 섬뜩한 경계에 서 있어.
6.
사람들은 내 필명이 공사장의 인부들이 나를 ‘이상’이라 불러서 시작됐다고 믿더군.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1929년, 경성 고등 공업학교 졸업앨범을 열어봐. 거기엔 본명 김해경이 아니라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으니까.
나는 이미 학생 시절부터 김해경이라는 껍질을 벗고 이상으로 살기로 마음먹었어.
이 필명은 내 절친 구본웅이 건네준 선물에서 시작됐어.
그는 나에게 오얏나무로 만든 화구 상자 하나를 내밀었지. 오얏나무 이(李)에 상자 상(箱). 그 상자 안에 담긴 건 붓과 물감,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예술가의 꿈이었어.
큰아버지는 내 손에 설계도와 자를 쥐여주며 기술자의 길을 강요했어.
하지만 나는 친구가 선물한 예술가의 도구에서 내 필명을 따왔지.
이건 나를 억압하던 큰아버지에 대한 조용한 반항이자, 오직 예술가로만 살겠다는 나의 서늘한 선언이었어.
나는 그렇게 큰아버지가 정해준 미래를 거부하고, 오얏나무 그림 상자 속에 내 진짜 자아를 가두기로 했어.
7.
1929년,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해.
이때를 기억하고 싶어서 직접 사진첩을 만들었어.
사진첩 이름은 <추억의 가지가지>.
사진첩을 펼치면 기괴한 사진 하나가 나타나지.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 여자 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머리에 족두리까지 얹은 사내가 보여? 바로 나야.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하고서도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지.
나뿐만이 아니야.
누군가는 거지가 되어 구걸하는 시늉을 하고, 누군가는 죄수복을 입었어. 심지어 독립군 복장을 한 친구 옆에 일제 경찰 차림을 한 친구가 나란히 앉아 있기도 하지.
사람들은 이걸 보고 그저 철없는 학생들의 장난이라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라.
졸업사진은 학교라는 국가 장치가 우리를 '순종적인 기술자'로 규정하는 가장 공식적인 순간이야.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성별을 뒤집고, 신분을 바꾸고, 권력과 피지배의 얼굴을 엉망으로 뒤섞어버렸어.
질서를 가장해야 할 엄숙한 자리에서 질서를 조롱하는 것. 이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야. 사람들은 훗날 내 문학이 난해한 유희이자 농담이라고 말하더군. 맞아. 익살스럽게 세계를 비틀고 패러디하는 그 문학적 실험은, 이미 1929년의 그 사진첩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어. 나는 그렇게 '김해경'이라는 껍질을 깨고, '이상'이라는 나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8.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나는 곧바로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가 됐어.
자랑 같지만,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직은 당시 최고의 기술직 공무원 자리였어.
내 초봉은 월 50원. 일반 노동자들이 한 달 내내 땀 흘려 15원을 벌 때, 나는 그들보다 세 배나 많은 돈을 주머니에 넣었어. 큰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던 엘리트의 삶, 그 안락한 궤도에 마침내 올라선 거야.
내 능력은 식민지의 심장부에서도 빛이 났어. 일본인 상관들은 나를 눈여겨봤고, 나는 총독부의 비서실이라 불리는 관방 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겼어.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빛나는 시간이 시작된 거야.
낮에는 총독부의 핵심 기수로 도면을 그렸지만, 밤이 되면 나는 다른 인간이 됐어. 1930년엔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했고, 이듬해부턴 <이상한 가역반응>,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같은 기괴한 시들을 쏟아냈지. 잡지 표지 도안 공모에서 입상하며 내 감각을 증명하기도 했어.
그뿐만이 아니야. 1931년에는 조선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전람회인 ‘선전’에 내 자화상을 출품했어. 정식 미술 교육이라곤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공학도였지만, 나는 수천 점의 경쟁작을 뚫고 당당히 입선했지.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그 까다로운 문턱을 넘어서 말이야.
세상이 나를 안정적인 기술자로 규정할 때, 나는 낮과 밤을 쪼개어 내 안의 예술을 증명하고 있었어. 도쿄미술학교 출신들도 낙방하는 그 높은 벽을, 나는 총독부 기수로 일하며 틈틈이 그린 그림 하나로 무너뜨렸지. 그때의 나는, 그 누구보다도 찬란하고 완벽한 엘리트 예술가였어.
9.
물론 그건 내 겉모습이었고,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
1931년에 그린 그림 속의 내 눈빛을 봐. 운명이라는 놈을 정면이 아니라 사선으로 비스듬히 꼬나보고 있지. 내 오른쪽 얼굴은 형체가 흐릿하게 뭉개지며 연기처럼 서서히 휘발되고 있어. 어두운 기름이 번진 듯한 이 흔적들. 마치 질량이 빠져나간 유령 같지 않아? 맞아. 이건 단순한 내 얼굴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해체되고 사라져가는 순간을 박제한 거야.
이 시절, 나는 매일같이 '낙랑파라'로 향했어.
낙랑파라는 도교미술학교를 나온 이순석이 연 다방이야.
모더니스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지.
등나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남국에서 온 야자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벽에 걸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응시하곤 했어.
슈베르트의 선율과 세련된 데생들이 가득한 그 살롱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독을 커피 향으로 달랬어.
나는 찻값을 남에게 미루지 않아. 희희낙락 담소를 나누다가도 일어설 땐 내가 마신 찻값 10전을 테이블 위에 툭 올려두지. 그게 내가 지키는 최소한의 염치이자, 낡은 관습을 벗어던진 근대적인 태도였으니까. 누군가는 나를 보고 그랬어, 한국 최초의 더치페이 창시자라고.
특히 나는 MJB 커피를 정말 사랑했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진공 캔에 담겨 건너온 그 묵직하고 농밀한 향기.
훗날 요양을 떠난 산촌에서도 나는 그 향기로운 미각을 잊지 못해 괴로워했지.
MJB의 그 진한 향은 내 작품 속에 흐르는 퇴폐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와 묘하게 닮아 있었어. 그때의 나는, 그 화려한 현대성 그 자체였어.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인생의 절정 한가운데서 나는 뜻밖의 불행과 마주해.
1933년, 내 나이 스물넷. 입안에서 갑자기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어. 바닥에 쏟아진 붉은 선혈. 각혈이었지. 폐병이 내 육체를 갉아먹기 시작한 거야. 황금빛으로 빛나던 내 미래가 그 핏자국과 함께 무참히 꺾여버렸어.
나는 내 삶을 딱 ‘석 달’로 압축해서 보곤 해.
첫째 달은 스무 살 이전, 맹렬한 절뚝발이의 세월이었어. 그때 나는 내 성격의 서막을 스스로 닫아버렸지.
그리고 찾아온 두 번째 달. 1929년부터 1932년 말까지의 그 3년. 내 인생에 단 한 번뿐이었던 황금과 같은 절정의 세월이야. 그때의 나는 탄도를 잃지 않는 질풍이었어. 세상이 가리키는 대로 곧잘 달려갔고, 내 본연의 우울한 성격은 서랍 같은 그릇에 잠시 담아 숨겨버렸지. 겉보기엔 완벽한 엘리트 기수였고, 거침없는 천재 예술가였어. 남들이 보기엔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겠지만, 사실 나는 내 진짜 모습을 서랍 속에 처박아둔 채 그 화려한 무대를 견디고 있었던 거야. 이유 없이 밤마다 찾아오는 죽음충동이, 나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거든. 그때문이었을까?
피를 토한 후 나는 깨달았어.
모든 것이 죽어가는 계절, 겨울이 내게 닥쳐왔음을.
카스텔라처럼 장판이 누렇게 타들어 가도록 불을 때도 내 몸은 추위에 떨었고
아무리 먹어도 몸은 더 메말라갔어.
내 삶의 겨울이 깊어질수록
나는 녹슨 송곳 모양으로 아무런 멋도 없이 말라비틀어져 버릴, 그런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어.
결국 나는 총독부 기수라는 화려한 껍데기를 미련 없이 벗어던졌어.
안정된 미래도, 남부러울 것 없던 엘리트의 삶도 그 핏자국과 함께 모두 지워버렸지.
하지만 이건 끝이 아니야.
진짜 '이상'의 이야기는 이제부터니까.
이다음 이야기는 2부에서 계속할게.
지금까지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