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록>의 시적 아름다움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새벽 3시 36분.
동이 트기 직전, 밤이 가장 어둡다는 그 미명의 시간에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생을 마감했죠.
북간도라는, 한민족의 디아스포라적 슬픔이 서린 땅에서 태어나 결국 타국의 감옥에서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죽음이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에 일어났다는 점은, 그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윤동주가 일제에 맞서 저항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들은 말합니다.
스물일곱 청년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동정은 이해하지만,
그의 시 어디에도 ‘항일’이나 ‘독립 의지’는 단 한 줄도 없다고요.
윤동주의 문학은 청결, 결백, 우수와 고독...
그리고 자책 같은 인간 보편의 정서를 노래한 순수문학일 뿐인데,
거기에 억지로 ‘저항’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노래한 순수한 서정시인에게
‘민족의 저항을 노래한 시인’이라는 이미지를 입히는 건
오히려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일이라고도 말하죠.
더 나아가 윤동주를 ‘반일 민족주의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그 이미지마저 이용해온 것이 바로 ‘윤동주 신화’의 슬픈 진실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이런 질문도 합니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적극적인 친일까지는 아니어도,
창씨개명을 했는데 어떻게 일제에 저항했다고 볼 수 있냐고요.
저 서글픈 질문에 답하려면,
윤동주가 창씨개명하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삶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1943년 7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숙방에서 짐을 꾸리다
갑자기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끌려가던 순간이었을까요?
아니면 형무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생체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그 비참한 시간들이었을까요?
하지만 이보다 더 치욕적이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은 윤동주에게, 그리고 조선 땅 전체에 들이닥친 거대한 재앙의 시작이었습니다.
일제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적과 맞서기 위해,
부족한 전쟁 물자를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조선을 문자 그대로 쥐어짜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있던 놋그릇, 수저, 쇠붙이는 모조리 수탈해 갔고,
군량 확보를 이유로 쌀 한 톨까지 공출해 갔습니다.
윤동주는 바로 이 숨 막히는 시기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의 의미를 담아, 그토록 아끼던 시 19편을 묶어 세상에 내놓으려 했지만
스승은 말렸습니다.
"이런 시국에 우리말 시집은 검열에 걸려 불온서적이 된다."
그 말 한마디에,
윤동주의 첫 시집은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서랍 속에 묻혀버립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윤동주는
문학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당시 ‘현해탄’이라 불리던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는 ‘도항증명서’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그 서류 발급의 조건으로 창씨개명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윤동주의 앞에 놓인 것입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결국 창시개명을 결단합니다.
물론 그것이 단지 아들의 유학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식량과 생필품을 철저히 통제하는 ‘배급제’를 시행하며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성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에게는 쌀 배급을 끊고,
우편물조차 배달하지 않는 야만적 차별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유학을 떠나기 위한 도항증명서.
그리고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생존을 좌우하는 식량 배급.
일제는 이 두 가지를 인질로 쥐고 윤동주의 가문을 압박했습니다.
버티고 버텼던 아버지 윤영석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2년 1월 29일.
아버지는 가족의 생존과 아들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창씨개명 계(届)를 제출합니다.
그리하여 윤동주의 호적상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이름 ‘히라누마 도주’는
윤동주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부끄러움이자, 깊은 상처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윤동주의 집안을 비롯하여 당시 수많은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이 창씨개명은,
결코 일제에 대한 협력이나 변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살기 위해,
그리고 꿈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에 새겨야 했던,
식민지 피지배자의 서글픈 '고난의 형적(形跡)'이었습니다.
가장 거룩해야 할 종교조차도 살아남기 위해 비명 섞인 선택을 하던 시기였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는 기독교 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를 들 수 있죠.
당시 일제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명백한 우상 숭배였기에 저항도 있었지만,
일제의 탄압은 교회의 존립 자체를 흔들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학교는 폐쇄되었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으며,
목회자들은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굴욕적인 결의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 의식일 뿐이다."
스스로 교리를 비틀면서까지 일제에 타협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단순히 교회의 타락이나 변절로만 매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제의 칼날 앞에서 교회의 문을 닫지 않기 위해,
교인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그 시대를 견뎌내고자 했던 조직적인 몸부림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조차 신앙의 양심을 꺾고 굴복해야 했던 그 살벌한 시대.
하물며 개인이 밥을 먹기 위해,
그리고 공부를 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일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피지배자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슬프고도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꿈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자 하는 그 아픔 속에서,
윤동주의 시 〈참회록〉이 탄생합니다.
창씨개명 서류가 접수되기 단 닷새 전, 1942년 1월 24일.
윤동주는 밤늦도록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봅니다.
다가올 치욕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죠.
욕된 이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그 슬픈 얼굴을 닦아내듯 그는 처절한 고백을 적어 내려갑니다.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다던가."
그 절규 같은 문장이 이렇게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참회록’이라는 말은 원래 중세 이후 서양 기독교 문학에서 비롯된 자서전적 고백의 장르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톨스토이의 참회록, 루소의 참회록이 대표적이죠.
그런데 윤동주가 이 시를 쓰던 당시의 조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온 사회가 ‘참회록’으로 뒤덮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조선의 문인들이 자신의 과거 사상을 부끄럽다며,
앞으로는 일본 왕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글들을
〈참회록〉이라는 제목으로 앞다투어 발표했습니다.
"일본의 승리는 절대적이다. 우리말은 버릴 때가 되었다."
"민족주의와 서양 사조를 버리고, 황군의 승리를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스스로 일본인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바로 춘원 이광수의 변절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윤동주가 한때 존경했던 조선 문학의 아버지, 이광수.
그는 1940년, 일제 관제 신문인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를 비롯한
수많은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민족관을 부정합니다.
그는 창씨개명이야말로 조선이 살길이라며,
일본 왕에 대한 불충을 회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우리는 힘차게 나가자. 자발적으로 모든 조선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일본인이 되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기뻐했고,
조선의 미래를 낙관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살기 위해 '가짜 참회'를 하며 영혼을 팔던 그때,
윤동주는 전혀 다른 버전의 〈참회록〉을 씁니다.
이광수가 몇백 년 이어온 자기 집안의 성씨를 고집했던 과거가 부끄럽다며 참회할 때,
오십 평생 조선 민족의 독립을 논했던 자신이 일본의 선의를 ‘배반’했다며 회개한다고 외칠 때,
앞으로는 일본인으로서 영광의 길만 남았다며 자신을 포장할 때,
윤동주는 단 한 줄로,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하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매일 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로는 발바닥으로까지 닦아내듯
부끄러움을 곱씹습니다.
부모가 간도에서 힘겹게 마련한 학비로
밥벌이도 되지 않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일본 유학을 결심했던 것.
그 유학을 위해,
수백 년 이어온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히라누마’라는 낯선 이름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
그 사실 자체가,
윤동주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었습니다.
이 부끄러움이…
이 뼈아픈 치욕이…
왜 ‘저항’이 아니란 말입니까?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이 <참회록>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매일같이 닦아내는 거울 속에는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나타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
이는 전통적으로 불길함, 재앙의 징조였습니다.
윤동주는 마치 자신의 앞날이 고난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고난을 피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담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유다의 배신을 알고도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가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렸듯이,
윤동주가 운석처럼 떨어지는 고난 속으로 걸어갈 때
그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이 고난당하는 자.
바로 그것이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죄 없이 고난당하는 이들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윤동주 또한 같은 방식으로
그 시대의 억눌린 이들, 이름 없이 고난당하는 이들의 아픔에
자신의 삶을 겹쳐 넣었습니다.
그에게 기독교는
고난을 없애주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를 받고 고통을 벗어나는 종교도 아니었습니다.
위로받지 못한 채 끝까지 고난당함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
그것이 윤동주의 신앙이었고,
그의 문학이었고,
그의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항’이 아니란 말입니까?
물론, 윤동주의 시를 단순히 '반일 저항'이라는 정치적 구호로만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저항은 총칼보다 더 깊은 곳,
바로 ‘사랑’과 ‘부끄러움’이라는 인류 보편의 윤리적 가치에서 시작된 실존적 결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시를 저항의 좁은 틀에서 해방시켜, 더 넓고 깊은 인류의 유산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윤동주의 시는,
자기성찰 없이 '자기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날카롭고 매력적인 거울이 되어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의 의미를 확장해야 한다고 해서,
그 중심에 단단히 박힌 ‘저항의 정신’까지 지워버려선 안 됩니다.
시대의 어둠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던 그 치열한 부끄러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시인 윤동주에 대한 가장 잔인한 모독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