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1/600의 확률과 1/5의 확률
그렇게 나는 위전절제를 위한 개복 수술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차가운 수술방의 온도, 마취제가 몸에 들어올 때의 서늘한 느낌, 이런 광경이 너무 흔한듯해 보이는 수술방 안 간호사들의 시시콜콜한 잡담들.
“마취제 들어가면 잠드실 거예요. 3,2,1 …..”
눈을 감고 마취재가 들어간다는 얘길 들으며 기도를 했었다. 기도가 시작되기 전 “부디 잠들기 전 이 기도를 마칠 수 있게 해 주소서. 부디 이시련을 이겨낼 힘을 주시옵고 오늘의 이 고통이 내일을 기약하기 위한 고통이 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마취재가 들어가고 한참을 지날 때까지 내 기도는 이어졌고 다행히 잠들기 전 기도를 다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어디선가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고통에 신음하며 힘들어하는 순간에도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자기야 수술 잘 끝났데, 선생님이 전이된데 없이 깨끗한 거 같데 “ 아내의 목소리로 듣는 긍정적인 결과는 이내 고통을 덮었고 이내 다시 잠들게 했다.
그 후 꼬박 하루를 중환자 실에서 보냈는데 마약성진통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중환자실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수술 전까지 읽었던 책인 “랜디 포시의 The Last Lecture”와 “폴 칼라 타니의 When Breath Becomes Air” 의 여러 구절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삶의 태도 그리고 그들이 찾은 삶의 가치들을 떠올리며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병을 떠나, 그리고 내게 남은 삶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음이 평온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평온해지고 싶었다. 어쩌면 삶의 기간에 집착하기보다 삶의 밀도에 집중하고 싶어 그 방법을 고민했는지도 모르겠다. 쏟아지는 잠 속에서 나는 깨어있는 순간마다 생각을 이어나갔다. 마침내 중환자실을 나갈 시간이 되자 조금은 머릿속이 정리가 되었고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앞으로 어떠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나는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고 이미 밝혀낸 어둠은 더 이상 그림자를 만들어 내지 못하니, 그러니, 더 이상 아직 오지 않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자”
중환자실을 나오자마자 내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말하는 해인이와 어머니 곁에서 나는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처럼 자고 또 자며 회복에 집중했다.
비록 그 후에 알게 된 조직검사결과가 좋진 않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엔 가봐야 아는 거겠지. 어떻게 될지는”
사실 이번에 수술 직후에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경력직으로 지원했던 모회사에서 최종합격 연락을 받았었다. 미국지사장 자리였고 너무나 매력적인 조건인 이 자리는 동종업계 사람이라면 한 번은 원했을 그런 회사와 포지션이었다. 높은 연봉, 성과급, 집, 차, 자녀학비 등 분에 넘치는 오퍼를 받았다. 사실 처음 채용공고에서는 오픈되지 않았던 여러 좋은 조건들은 5개월간 면접이 진행되며 조금씩 오픈되었기에 내 입장에서는 삶의 2막을 계획하는데 충분히 고려할 만한 옵션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의 도전이지 않는가 “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며 만들어온 여러 매력적인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나는 전혀 주체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암을 마주하고 해결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며칠 고민을 하다 수술의 회복과 앞으로의 치료과정을 고려하여 입사거절 메일을 보냈다. 사실 난 이직에 뜻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작 이직의 이유가 5개월이 넘게 이어진 슬럼프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모색한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아보는 것!
“그래 어쩌면,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어떤 것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이직을 할지 말지는 합격한 후에 결정하면 될 일이고 안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나도 무언가를 느끼게 되겠지 “
그렇게 긴 채용과정이 시작되었고 두 차례 면접을 진행하며 받았던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지금 몇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현재 회사도 좋은 회사이고 인정도 받고 계신 거 같고 부족한 게 없어 보이시는데 왜 저희 회사로 오려고 하시는 건가요?” 이 뻔한 질문에 꽤나 오랫동안 답변을 하지 않았던 게 기억이 난다.
“저한테 불리할 것 같지만 솔직하게 답변을 해보고 싶어 져서 침묵이 조금 길었습니다. 사실 직장생활을 15년 하며 적어도 노력한 만큼은 다 이뤄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노력한 만큼 이뤄냈다는 것을 능력이나 성취라는 단어와 연결시켜 모범답안을 드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졌던 거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현재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게 가장 중요한 건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조직이 개인에게 딱 맞는 순간마다 가슴 설레는 일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이곳이 그리고 제게 맡기시려는 미국지사라는 포지션이 제게 가장 가슴 설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르죠. 현재 다니는 회사가 또 어떤 가슴 설레는 일을 제게 맡길지는요. 중요한 건 이 슬럼프에 탈출하기 위해서는 가슴 설레는 일이 지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가운데 앉아계신 전무님으로 소개된 중역분이 유독 내 답변을 재미있게 경청해 주셨다. 그 후에도 많은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고 30분으로 예정된 면접은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끝이 났었다. 그리고 나는 합격했다.
입사거절 메일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팀장이라는 분에게 전화를 받았다. 내가 600명이 넘는 지원자가 가운데 최종 합격한 거라는 말을 들었다. “저희도 채용전형을 5개월이나 진행한 건데 아쉬워서 다시 전화드립니다. 사유를 알고 싶어서요” 개인 사유라고만 간략히 적어 메일을 보낸 것이 갑자기 너무 무례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해를 구하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간략히 말씀드렸고 그분의 따뜻한 위로를 뒤로하고 전화를 마쳤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꼭 이겨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위로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1차 면접 이후로 후보자님 말고 다른 분은 상정해 두지 않았을 만큼 실무진 및 임원진에서 좋은 평가가 있었습니다. 더 말씀드리는 건 저희 결례 같습니다만 꼭 다음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난 0.1%의 가능성을 뚫고 저 자리를 차지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차례 면접을 보며 한 번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는 생각을 안 해 봤었다.
퇴원 전 다학제 진료에서 최종 진단된 내 병기는 3년 내 재발률이 80~90%에 달한다고 한다. 자 이제 앞으로 내 앞에 주어진 이 도전은 내가 그동안 이겨내고 극복해 냈던 많은 도전과제보다 성공확률이 낮은 도전인가 아님 훨씬 성공확률이 높은 도전인가
답은 나와 있다.
“결과는 하늘의 몫이지만 과정은 오롯이 나의 노력에 달려있다. 난 그저 늘 그래왔듯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
난 여전히 주체적으로 이 상황을 직시하고 해결해 나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