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 선택과 설득의 과정
주말이 끝나자 예상보다 빠르게 건국대에서 CT 판독 결과를 확인하러 오라는 문자가 왔다. “단 보호자 동반 하에”라는 전제가 붙어 있었다.
“좋지 않군.”
해인이에게 내일 하루 회사를 쉴 수 있는지 확인한 후 회사에서 남은 업무를 정리했다. 사실 그동안 객관적인 상황 파악에 집중하느라 감정적인 부분은 최대한 뒤로 미뤄두려 노력했었다. 아직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을뿐더러, 감정적인 동요는 이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딸아이의 수학 숙제를 봐주고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급식 반찬은 뭐였는지, 내가 학교 다닐 때 급식은 어땠는지… 늘 그렇지만 잠들기 전까지 우리의 수다는 끝이 없다.
나에게 하루 중 이 시간은 무척이나 소중했다. 이런 소소한 대화가 모여 관계를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외동딸이라 가끔은 외로워하는 딸아이를 보며 ‘내가 최고의 친구가 되자’라고 마음먹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느새 얘기하다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볼에 입을 맞추고 이내 방문을 나섰다.
“아무래도 이건 절대 잃어버릴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생각이 많아진 그날 밤은 쉽사리 끌어내려지지 않았고, 나는 한참을 서재에 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혹시나 있을 검사를 대비해 아침부터 공복을 유지한 채 우리는 건국대로 향했다.
“CT 판독 결과도 암이라고 나왔습니다. 다행히 아직 림프절이나 타 장기에 전이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 좋지 않은 증후가 보여 최대한 빠른 시간 내 수술적 조치를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으로 보입니다. 오늘 입원하셔서 내일 점막하박리술로 암세포 확인되자마자 위 전절제술을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준비했던 내게 이는 병원을 오기 전부터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다만 아니었다면, 아니었다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다.”
외래를 마치고 나온 후, 내가 나름의 각오를 다지는 동안, 그동안 비교적 흔들림 없이 쫓아와 주었던 해인이가 먼저 무너졌다. 평상시의 해인이는 강하다. 늘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동요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을 마주한 해인이는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엉엉 우는데, 난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괜찮다고. 괜찮다고. 안아주고 버텨주었다.
그 후 준비도 없이 방문한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3주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추가로 시행한 내시경에서도 조직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우리는 결국 조직검사에서 암세포를 확인하지 못한 채 수술을 감행할지 결정을 해야 했다.
“95%의 확률로 암이 맞습니다. 5% 이하의 확률로 암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사례는 없습니다. 다른 병원으로 가셔서 다시 검사해 보시고 결정하셔도 되지만, 그러면 수술 일정이 최소 한 달은 밀릴 거예요. 잘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감정이 결여된 단호한 교수님의 브리핑을 듣고 우린 그 자리에서 수술을 결정했다. 다만 부모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조직검사 결과도 음성인데 위를 떼내냐. 만에 하나라도 아니라면 그 불편함을 어떻게 감내하고 살 거냐.”
상급병원으로 옮겨 보다 정확한 진단을 받아보자는 의견이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태어나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몸을 잘 관리하는 것이 효인데, 그걸 하지 못해 이렇게 큰 불효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시간이 걸려도 차근차근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살아내야 이 모든 불효도 갚을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수술 일정 이틀 전까지 납득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도 끝내 우리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그리고 이른 아침,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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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큰아들
요즘 병원에서 잠은 잘 자는데 새벽 네 시면 잠에서 깨고 있어서 하루가 아주 길어. 덕분에 새벽의 밤공기, 풍경과 같이 평소에 놓쳤던 일상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어.
어젠 많이 속상했지? 해인이와 통화한 것도 들었어.
아빠에게도 쉽지 않았을 텐데 수술 관련해서 우리 결정을 존중해 주셔서 감사해요. 수술 잘 받고 나올게.
며칠 사이에 찾아온 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해인이와 난 그래도 서로를 안아주고 버텨가며 오늘을 보내고 또 내일을 준비하고 있어. 대부분 웃으면서 보내고 있는데, 그래도 한 번씩 울컥할 때면 이내 서로를 보듬어주며 오늘의 우리를 위로해.
긍정의 힘을 믿어. 수술 날짜가 다가오면서 긴장되고, 수술이 이 상황의 종지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걱정도 많이 되기도 해. 하지만 컨디션 잘 유지해서 무너지지 않으려 매 순간 마음을 다잡으려 해.
아빠 말대로 나는 당연히 혼자가 아니야. 아빠, 엄마, 진이 그리고 고모네 식구들, 큰아버지네 식구들까지, 따뜻한 해인이 가족들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해 주고 계셔서 이 어둠 속에 혼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에서는 표현을 못했지만, 아빠 나는 우리가 따뜻한 가족이어서, 엄마 아빠가 그런 가족을 지금껏 만들어 주셔서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큰 위안과 행복의 충만함을 느껴.
아빠, 어제 나를 안고 서럽고 또 서럽게 우는 엄마를 본 후에, 오늘 아침 문득 우리 딸이 아프면 나는 어땠을까를 생각해 봤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아픔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아려서 아빠 엄마한테 너무 죄송한 마음이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아. 늘 그랬어.
늘 그동안 나에게 온 힘을 다해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 주고, 바르게 키워줘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된다면 같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보고 싶어. 꼭 그럽시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