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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Mar 31. 2021

치타와 달팽이 3

이게 다 소바 너 때문이야

  마음을 평평하게  후에도 여느 도로가 그렇듯 움푹 파이고, 돌연 꺼지기도 하며 자꾸만 하자가 났다. 그때마다 나는 공구를 들고 아스팔트를 발라가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도로 위를 달린 것은 그녀라는 이름의 거대한 자동차였다. 그렇다고 사랑의 열병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고, 단지 파이거나 꺼진  사이로 새싹처럼 돋아나는, 어쩌면 나도 연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설렘으로, 때로는 성가심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두 번째(아마도)로 밥을 먹은 것은 홍대였다.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는데 더위에 지친 우리는 소바를 골랐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별로 친한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가 어색했고, 둘이 있다는 것이 낯설어 괜히 물컵을 들었다 놨다 하며 수선을 떨었다. 그녀와의 시간이 답답하거나 싫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마주한 테이블 위로 침묵이 내려앉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다행히 이야기거리가 떨어지기 전에 소바가 나왔다. (웃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내가 평소에 보던 형태와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국수 그릇처럼 커다란 곳에 매밀면이 육수에 풍덩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매밀면은 납작한 얼음판 위에 가지런히 있었고 육수는 ‘이걸 대체 누구 코에 붙여?’ 싶을 만큼 좁다란 그릇에 담겨 있었다. 한번에 퐁당 국물에 적셔서 먹으면 편하련만. 나는 면을 조금씩 옮겨 육수에 적셔먹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살짝 굳었다. 시력이 없는 사람에게 기다란 면을 높이 들어 그 면의 끝이 그릇 안에 쏙 들어가도록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면의 끝을 만져보지 않는 한. 그렇다고 매번 그녀에게 부탁하기는 싫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 뭐랄까. 그때도 나는 그녀에게 얼마간 잘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시각장애로 인해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처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이성으로든 친구로든 “안 보이는데 업을 수 있나?” 와 같은 반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지배하곤 했다.

  그나마 육수가 담긴 그릇을 들고 소바를 옮겼더라면 더 편했을텐데 나는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교육을 받아온 터라 차마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좁은 그릇에 면을 밀어넣으며 속으로 ‘아, 이솝우화에서 두루미로부터 주둥이가 기다란 병에 음식을 대접받은 여우가 이런 기분이었을 거야.’ 하고 투덜거렸다. 낑낑거리며 먹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보통 육수 그릇을 손에 들고 조금씩 덜어먹지 않아?” 라고 했다.

  아, 그런 거구나. 난 처음 알았다. 누구도 그런걸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 교과서에 소바를 먹는 방법 따위는 나오지 않았거든. 덕분에 하나 배웠다. 그녀가 알려준대로 그릇을 들고 먹으니 훨씬 편했다. 진작 알려주지. (웃음)


  그 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갔고 음료까지 마신 후에 헤어졌다. 그녀는 나를 배웅하려 했고, 나는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인천으로 향하는 공항철도 게이트 앞에서 황급히 안녕을 고했다. 인사를 건네고 카드를 찍고 케인(흰지팡이)을 펴는데 혹여 평소 타던 곳과 다른 곳이어서 길을 헤매지 않을까 긴장이 됐다. 소바와 마찬가지로,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강박 덕분인지 나는 부딪치거나 넘어지는 일 없이 한번에 길을 찾았다. 비록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긴 했지만. 그녀는 추후에 카카오톡으로 길을 잘 찾았냐며 너무 빨리 가는 거 아니냐고 했다. 유치하게도 나는 척척 잘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게 내 강박의 속도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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