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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vermore Jul 20. 2021

타파스, 그리고 와인

황금같은 평일 연차 이야기


연차수당을 안 주는 회사가 늘면서 "워라밸"을 이야기하는 회사도 많아졌다. 줄어든 연차수당 + 워라밸 = 강제연차. 간단한 수식이다.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주4일제를 도입했었다. 한달에 네 번을 강제적으로 쉬는 대신 월급을 10% 정도 깎았다. 처음에는 누구 마음대로 이런 결정을 하냐고 아우성이던 직원들이 나중에는 주5일 회사는 못 다니겠다는 재미있는 소리들을 했다. 그 와중에 8월 여름휴가 시즌이 도래했고 나는 8월 한 달 중 워킹데이가 10일을 넘지 못했다. 우스운 이야기다. 그리고 9월에 퇴사를 결정했으니 '일이 없는 상태'가 꽤나 불안했던 모양이다.


새로 다니게 된 회사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연차수당은 따로 주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고, 여기에 크게 반대하지 않은 건 내가 이전에도 항상 연차를 100% 사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나의 성격유형 중 어떤 부분에서 기인한 건지는 몰라도, 나는 연말에 연차가 남아 일주일을 통으로 쉬어야 한다든가 하는 경우에서는 한참 멀리 있었다. 11월쯤 되면 연차가 없어 연말에는 입김을 호호 불며 매일 출근하다 크리스마스나 연말 즈음 되면 내년 연차를 끌어 쓰는 걸 고민하는 게 보통의 나였다.


성격유형 중 굳이 찾는다면 아마 끈기가 없는 부분이나 놀기 좋아하는 부분들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평일에 하루쯤 쉬고, 그 주에 4일만 출근하면 버텨낼 만하니까. 연차를 쌓고 쌓아서 더 큰 행복 - 지금은 요원한 이야기지만, 근사한 해외여행 같은 - 을 얻어내려는 지구력보다는 당장 이번주 금요일에 연차를 내고 낮술을 먹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보다 다양한 그룹과 짧은 휴가를 즐기는 성향도 있었을 테다. 한 해 중에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7월에는, 매주 금요일이면 어디든 떠나 있어야만 살아있는 것 같았고, 금요일 낮에 맥주 한 캔 곁들이지 못하는 게 억울하게 느껴졌으니.


그러나 요즘은 어디로 떠나지도 못하고, 떠나더라도 마스크와 함께다 보니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집을 나름대로 제대로 꾸며 살다 보니 호캉스도 마땅치 않아 집에 머무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와중 찾아온 5월 강제연차 이틀이 그렇게 반가울 리도 없었다. 아니, 회사를 이틀 덜 나가는 건 당연히 기분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다지 기대되어 며칠밤을 두근거릴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밍숭맹숭한 기분으로 연차를 맞이했고, 평일에만 할 수 있는 게 뭘까 하다가 -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는 성향 탓에 - 요즘 150일 된 조카와 둘만의 허니문을 즐기고 있는 언니를 꼬셔다 하루 쇼핑을 갔다. 오랜만에 간 쇼핑은 재미있었고 그만큼 다리가 아팠다. 하루의 자유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인 탓에 - 직장인인 나보다도 어쩌면 언니가 더할 것이었고 - 우리는 무작정 쏘다니고 모든 옷을 입어보고 모든 음식을 먹어볼 기세였다. 한남동에서 시작된 여정이 용산에서 끝났다. 하루가 아까운 사람들이 다 그렇듯 한 곳에 짧게 머물고, 좀 더 많은 곳에 들르고 싶어하며. 그렇게 5시간쯤 다니자 너나할 것 없이 알았다. 체력이 열정보다 조금 더 일찍 소진되고 있음을.


그럼에도 잠시 고민한 건, 주어진 자유를 다 누리지 못한 것 같아서였다. 좀 더 힙한 곳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밖에서 저녁 먹은 게 오랜만인데, 흥청망청 더 놀고 가고 싶지 않아? 모처럼 여기까지 나왔는데 다섯 군데는 더 들러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정말이지 영 그런 기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 둘의 손엔 쇼핑백이 주렁주렁이었고 그 안에는 아기 옷도 있었으니까.


우린 결국 언니네 동네로 돌아오기 전에 와인을 몇 병 샀다. 뭘 사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어영부영 매대 앞에서 서성였다.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골라내야 한다는 점에서 서점과 와인샵은 비슷한 면이 있다. 미리 찾아 둔 와인 리스트도 있었지만 대부분 품절된 탓에,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몇 병을 골랐다. 가벼운 화이트와인부터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리오하 지방의 와인, 그리고 눈높이에 진열돼 있다면 분명 좋은 와인일 것이라는 추측으로 대충 찍어낸 비비노 4.1짜리 와인까지. 와인 병을 안고 동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마음이 한껏 편해져 있었다.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몰라. 좋은 선택 같아. 우리는 웃었다.


동네 타파스 가게에서 우린 정어리를 올려 만든 오픈 샌드위치와 마늘 치즈 스프레드를 바른 빵을 먹었다. 메인디쉬 대신 감자와 계란, 베이컨이 들어간 오믈렛을 추가로 주문하고 지중해식 샐러드를 곁들였다. 마치 우리의 오늘 하루처럼, 하루가 아까운 사람들처럼, 무엇이든 덜 부담스럽고 더 다양한 것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처럼.


도멘드루엥의 2017년 피노누아는 체리와 블랙베리 향이 강했고 무겁지 않은 맛이었다. 언니는 5점을 줬고 나는 4점을 줬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보다는 풍미가 덜한 느낌이었지만, 끝에 남는 떫은 맛을 좋아하는 언니에게는 더 좋았던 모양이었다. 피노누아는 익숙하지 않지만 특유의 산미와 상큼함이 좋아서 앞으로 몇 병 더 마셔 볼 생각이다.


우리는 아이돌 얘기, 조카 얘기, 언니의 복직 이야기를 하며 와인 한 병을 다 비웠다. 다음 예약 손님이 있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동네 공원에 가서 강아지들이 노는 모양을 구경하고, 조카가 태어나기 전 매일 다니던 우동집에서 2차를 했다. 소주를 콸콸 따라 마시고 흥청망청 집으로 걸어오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오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일지도 몰라. 어쩌면 이렇게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한 사람과 앉아 익숙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평일 연차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로운 것은 어플리케이션이 추천해 준 와인 한 병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또 다시 평일 연차를 맞이하면 새로움에 대한 조바심에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그럼 그 때 마실 핫한 와인을 미리 하나 사 두면 될 일이다. 이것저것을 하고 싶은 날, 그것저것을 함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며. 우리는 정말이지 하루가 아까운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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