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봄은 가장 많이 얼어본 땅에서 먼저 온다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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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술이 끝나고, 항암이 끝나고, 재발이 멈추었다는 말을 들은 그날에도, 나는 한동안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몸이 먼저였다. 마음은 언제나 몸보다 느렸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동안 폭풍의 냄새가 남는 것처럼, 나의 일상에도 오랫동안 두려움의 잔향이 맴돌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충분히 멀어진 다음에 쓰고 싶었다. 아직 그 안에 있을 때 쓰면, 아픔이 글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제는 그 시간들을 돌아볼 수 있다. 여전히 먹먹하지만,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그 정도의 거리가 생겼을 때, 비로소 펜을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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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 번 수술대에 올랐다.
처음엔 두려웠고, 두 번째는 익숙해지려 했고, 세 번째부터는 그냥 해야 할 일이 됐다. 마취에 드는 순간은 매번 달랐지만 깨어나는 순간은 언제나 같았다. 차가운 천장. 형광등의 흰빛. 그리고 '아,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놀람인지 안도인지 모를 감각.
두 번은 머리카락을 잃었다.
처음에는 울었고, 두 번째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은 것이 단단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너무 지쳐버린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민머리로 거울을 마주하던 그 아침들이 오히려 나를 가장 솔직하게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안다.
두 번은 사람이 떠났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지는 일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더 오래 아팠다. 몸의 상처는 아무는 속도라도 보이지만, 마음의 빈자리는 어디까지 아문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래, 너무 오래, ㅤ나 자신을 마지막 순서에 두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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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그 긴 시간을 버텨온 나 자신에게 먼저 쓰는 편지다.
수술실에서도, 항암 주사를 맞으며 천장을 바라보던 밤에도,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새벽을 혼자 넘기던 그때에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나에게. 아프면서도 다음 날 아침을 기다렸던 나에게.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려 했던, 그 낯설고 단단한 나에게.
잘 버텼다고.
정말로, 잘 버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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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글은 지금 비슷한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쓴다.
화려한 위로를 건네고 싶지 않다. 다 잘될 거라는 말도, 강해질 거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것 하나만 말하고 싶다. 지금 이 고통이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 같지만, 동시에 당신 안의 가장 단단한 것을 깨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다 잃었다고 느끼는 그 손바닥 위에,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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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의 봄, 처음으로 나를 위해 닻을 올리며
― 송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