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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Mar 16. 2022

떠나신 선생님을 비로소 곡하며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에는 준비가 필요하다. 특히 그 사람과 관계가 친밀했을수록 준비시간은 그만큼 더 길어진다. 오늘아침 눈을 뜨자, 비로소 그 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훅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밀려왔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소리내어 울었다. 아파트도 아니고 이웃조차 떨어진 단독주택에 사는지라, 그렇게 나 자신에게 충실하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민족의 자유를 염원한 만세소리를 기억하며 환호하던 삼일절 그날, 하필이면 나는 안타까운 비보를 전해 들었었다.


김병기 화백님은 1916년에 평양에서 태어나셨다. 당시 평양 땅의 절반은 선생님 집안의 땅이었고, ‘김진모 집안’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선생님은 그런 집의 아들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그 당시에 이미 국내와 일본 등에서 사 모은 유명한 작품들의 컬렉션이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소>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 선생님과 절친한 관계였다. 한번은 이중섭 선생님이 김병기 선생님의 집에 놀려오셨는데, 그때 눈에 띈 서양화 화집을 며칠이고 보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중섭 선생님이 훗날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의 일단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실은 백영수 화백님, 김창렬 화백님 같은 빠리파 선생님들에 비하면 그다지 오랜 시간은 아니다. 나는 막 고국으로 돌아와서 단지 지인들이 많다는 이유로 평창동에 첫 둥지를 틀었는데, 마침 동네에 사시던 김창렬 선생님 덕분에 김병기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집에서 골목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가나아트센터가 있고, 김병기 선생님은 그 바로 맞은편에 혼자 살고 계셨다.


당시만 해도 나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술계 외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와 아들 라파엘은 주말이면 멀리 있는 친정 대신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이 차려주시는 일본식 점심으로 낫또와 우메보시 등을 함께 먹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선생님은 100세가 되셨는데도 정정하셔서 나도 손님이라고 반가이 맞아주시며 가끔 식사도 차려 주시곤 하셨다. 요즘도 라파엘과 나는 낫또를 사랑하는데, 김병기 선생님과 함께 보낸 시간동안 자주 먹었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생님 댁에서 조금만 걸어나오면 있었던 레스토랑 <모네>에 가서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셨던 알리오올리오 파스타와 레드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선생님은 옷장에서 멋진 양복을 꺼내 입으셨다. 손녀 같은 나와 식사하시면서도 단정하게 차려 입으시고 약간의 향수도 뿌리시던 멋진 신사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영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 나오는 유명한 칼럼리스트가 아흔을 맞아 첫 경험이 없는 순수의 아가씨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로망이랄까? 아, 영화는 제목만 보면 마치 노망난 영감이 주책없이 젊은 여자를 탐할 것 같지만, 그런 추측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먹먹한 쓸쓸함이 있으며, 그보다 더한 순수의 사랑은 어쩌면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흔이 된 칼럼리스트는 동네에서 소문난 마담뚜의 주선으로, 너무나 가난해서 온종일 단추공장에서 돈을 버는 어린 소녀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하룻밤을 보내기로 한다. 소녀는 겁에 잔뜩 질려 마담이 준 안정제를 먹고 잠이 들어있고, 소녀가 잠든 방에 노인은 들어왔다. 노인은 한참을 그렇게 소녀를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소녀가 깨기 전에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고는 소녀의 베개 옆에 약속한 돈을 두고는 그대로 사라진다. 노인이 자신을 건드리지도 않고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다가 갔다는 사실에 소녀는 오히려 더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노인과 소녀 사이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순수의 정신적 사랑만이 남는다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이다.


선생님 또한 순수한 소년이 된 감성으로 나와 저녁시간을 그렇게 보내셨다. 선생님과 나는 몇 시간이고 대화했다. 때로는 열 시간을 족히 살아있는 실전미술사 강의를 해주시는데 안타깝게도 그 귀한 강의의 수강생이 단 한사람이라서 정말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작가는 말이야 말을 많이 하면 안 돼.’ 한번 이야기보따리가 터지면 열 시간을 족히 얘기하시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 나는 옆에서 킥킥 웃으며 선생님께 ‘네, 선생님’이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한 번은 미국에서 활동하시는 여류화가 한 분이 한국에 나오셔서 선생님 댁에서 함께 다과를 나눴다. 선생님은 오랜만에 만난 후배작가와 나, 그리고 조각가인 아드님이 계신 자리에서 한참을 신나게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일어나시며 ‘얘는 큰 딸이고, 너는 작은 딸이야. 서로 잘 지내보라고!’ 하시며 방 안으로 들어가셔서 낮잠을 청하셨다. 그만큼 참 편안한 관계였다. 정말로 선생님의 막내아드님이 내 큰오빠 같기도 했고, 그 여류화가가 큰언니 같기도 했고, 나는 까마득한 막내동생이 된 것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 짧은 순간들이 모두 기억 언저리에 속속들이 박혀 있는 걸 보면 정말로 신기하다.


2018년에는 선생님께서 갑작스레 폐렴을 앓으셨다. 워낙 연로하신데다 어찌되실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라 나는 잠자코 선생님이 완쾌되시기만을 바라며 연락을 기다렸는데, 일주일 후에야 비로소 연락이 되었다. 그렇게 선생님은 위기를 넘기시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다.


선생님 댁의 도우미 아주머니가 지나친 욕심을 부렸는데, 당시 103세이시던 선생님이나 70세를 넘기신 조각가 아드님이나 비슷비슷하게 전부 그녀에게 다 뺏기는 것을 보고는 답답해서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껄껄껄 웃으시고는 말씀하셨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랬어. 그런데 지나고 보니 현명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저, 나 죽었다 하고 살으라. 그기이 현명한 거라.”


내가 뭘 사가도, 내가 뭘 해드려도 칭찬이셨다. “내가 세상에서 먹어 본 국수 중에 최고로 맛있는 국수를 오늘 먹어본다.” 혹은 “내가 세상에서 먹어 본 낫또 중에 오늘 니가 사 온 낫또가 최고다 최고!”


나의 아버지는 반찬투정을 하시는 편이다. 우리집 밥상은 아침 반찬이 저녁에 똑같이 올라온 적이 없었고, 엄마는 평생 그렇게 아버지에게 맞춰주며 사셨다. 그러니 엄마의 반찬솜씨는 식당 뺨칠 정도인데도 아버지는 아흔을 바라보시는 나이에도 여전히 반찬투정을 하신다. 그와 비교가 될 만큼 선생님은 배려가 깊으셨다.


라파엘도 주말이 되면 “엄마, 할아버지네 집에 놀러가자!”라고 할 만큼 선생님 집을 좋아했고 선생님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호기심 많은 아들이 선생님이 깔끔하게 사용하시던 화구에 오렌지색 유화물감을 짜서 마구 칠해놓았다. 정말이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선생님과 내가 대화에 집중해 있는 순간에 저지른 일이라 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선생님과 내가 허물없이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야아, 우리 라파엘이 예술성이 있구나. 엄마를 닮았어!” 하고 야단치는 나를 말리시며 그냥 가만히 둬야 큰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라파엘은 감히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어려워서 범접하지 못하는 거장 원로화가 선생님의 침대에 폴짝 뛰어올라가 선생님과 함께 누워서 잠도 자고, 선생님과 축구경기를 보며 누가 이기는지 내기도 하며 선생님과 보내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지난 봄, 선생님을 못 보고 떠나서 아쉽다고 했던 아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 봄에 아들을 데리고 선생님 댁을 다녀왔어야 했는데, 아들의 그 아쉬워하던 마음이 현실이 되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휙 하고 어느 바람이 부는 날 한두 시간 운전하고 가면, 장흥의 작은 빌라에서 아드님과 함께 나를 환하게 맞이해주실 것만 같다. 가끔은 냉면이 아닌 ‘랭면’이 생각난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메뉴 랭면과 김치말이밥이 생각이 난다. 햇살은 너무 좋아 봄을 맞이하고 있는데 꺽꺽 목에서는 슬픔이 차오른다. 선생님은 떠나시기 일주일 전부터 식음을 전폐하시고 가만히 누워서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셨다고 한다. 음식을 섭취하면 배설이 되고, 그렇게 되면 아드님이 혹여 힘들어질까봐 그러셨을까.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을 ‘호상(好喪)’이라고 한다.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편안히 떠나셨기를 기원해본다.


<내 손으로 선생님께 차려드린 마지막 식사의 메뉴는 황태 미역국, 야채 볶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낫또, 이가 안 좋으시니 배를 갈아서 부드러운 블루베리를 넣은 디저트, 그리고 단백질 보충 하시라고 치즈 몇 조각이다. 이 사진을 내가 왜 남겼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밥상을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남겼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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