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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BAC Apr 15. 2022

봄 그리고 은방울꽃

<, 은방울꽃>


봄은 이제 막 절정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길마다 벚꽃들이 흐드러져 어디 멀리로 드라이브라도 떠나고 싶도록 만든다. 엊그제는 디저트 몇 가지를 사서 부모님께 갖다드리고 왔는데, 부모님 댁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과 한옥마을까지 연결된 그 짧은 도로가 벚꽃들로 가득했다. 잠시 비상깜빡이를 켜고 멈춰 섰다. 아무 곳에나 설 수 없는 대도시와는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일종의 특권이랄까.


이 벚꽃들이 질 무렵이 되면 자연스레 기다려지는 날이 있다. 바로 노동절인 오월 일일. 이 날이 되면 프랑스에서는 직장동료나 지인들끼리 은방울꽃을 나누어준다. 별로 부러울 것 없는 프랑스문화 가운데 내가 참 좋아하는 몇 가지 중 하나로, 이십년을 살았던 곳에서 익은 습관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해마다 되살아나곤 한다.


은방울꽃은 불어로 ‘뮤게Muguet’라고 한다. 평소에는 꽃집에서조차 눈에 잘 띄지도 않다가, 4월 마지막 날만 되면 전세계의 모든 뮤게가 모인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낸다. 각 지하철역 입구마다 아랍사람들을 비롯하여 뮤게 파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우리가 어릴 적에 번데기를 사먹던 고깔모양의 투명한 비닐에 뮤게가 돌돌 말아져 있는데, 작고 아담한 것이 참 귀엽고 예쁘다. 거리의 꽃집에는 우리 어버이날 카네이션 바구니와 같은 뮤게 바구니들이 펼쳐져 있다.


이 날만큼은 불법노동자든 누구든 뮤게를 들고 나와서 팔고, 모두들 반갑게 웃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뮤게를 산다. 퇴근길에 남편과 아내에게 서로 챙겨줄 뮤게를 한 송이씩 사오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혹은 동료나 형제자매에게……. 누구든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일종의 꽃 나누기 축제와 같다.


5월 1일이 되면 언제나 주고받던 그 은방울꽃을 올해도 어김없이 주문했다. 먼 곳으로 배달되어 오는 동안 조금은 멀미상태(?)의 초췌한 모습이지만, 조만간 우리집의 온도에 적응하여 기운을 차리고 나면 틀림없이 예쁜 꽃망울을 폭폭 터트릴 것이다.


은방울꽃은 작은 줄기에 여러 개의 하얀 종이 쪼로록 매달려, 마치 수줍은 소녀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숙이고 있는 듯하다. 은방울꽃에 얽힌 이야기는 더욱 재미나다. 작은 요정들이 밤새 파티를 벌이다가 해가 뜨자 풀줄기에 자신들이 마시던 컵을 서둘러 걸어두고 돌아갔는데, 그게 바로 은방울꽃이 되었다는 것. 요정이 걸어둔 컵이라는 그 상상력이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은방울꽃이 귀한 꽃으로 불리는 이유는 개화시기가 너무나 짧기 때문이기도 하다. 꽃이 이제 막 피었구나 싶으면 어느새 그 초롱초롱했던 꽃잎은 시들어 축 쳐져있으니, 그야말로 그 한순간을 위해 온 몸을 불사르는 듯하다. 그런 이유로 남성들이 여성에게 청혼할 때도 이 은방울꽃을 자주 이용한다. 네잎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 것처럼, 은방울꽃의 한 줄기에서 13개의 꽃망울을 발견하면 운명의 특혜가 주어진다는 얘기가 전하기도 한다.


노동절에 은방울꽃을 서로에게 주는 이유는 어쩌면 그 진한 향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오래오래 내가 준 은방울꽃을 잊지 마세요. 이 향기가 당신을 오래도록 행복하게 해줄 거예요.’라는 주문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런 은방울꽃의 매혹적인 향이 좋다고 코를 들이대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은방울꽃은 꽃잎과 꽃에 그 아름다운 향과는 달리 독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의 꽃말은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이다. 중세 때 프랑스왕인 샤를9세에 관한 기록을 보면, 1561년 5월 1일 행운을 불러주는 은방울꽃을 매년 왕과 왕비 또는 귀족들의 시중을 드는 상궁들에게 이 은방울꽃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Bal du Muguet(은방울꽃 무도회)가 있었는데, 이 날 여성들은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남성들은 은방울꽃 한 송이를 앞주머니에 꽂거나 단추구멍에 달고 참석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은방울꽃은 사랑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꽃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유래와 함께, 5월 1일은 역사적 배경 또한 가볍지 않다. 1886년 5월 1일 처음으로 시카고에서 8시간 근무 제도를 요구하는 40여만 명의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고,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빠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회의에서 5월 1일을 ‘세계 노동자의 날’로 지정하였다. 1941년부터 공식휴무일로 하였고, 부득이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2배의 임금이 보장된다.  그러한 이유로 유학생 시절 빠리의 몽마르뜨 언덕 어느 갤러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우리는 서로 5월 1일에 근무하려고 했던 기억도 있다.


프랑스 하면 때로는 환상에 가까운 로망의 대상지가 되기도 한다. 삼색기의 색깔인 파란색, 흰색, 빨간색이 상징하는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라는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사흘 뒤에 나온 것이 바로 이 삼색기였다고 하니, 삼색기의 역사는 당연히 프랑스혁명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삼색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색상이 되었고, 프랑스는 삼색 속에 함축된 자유, 평등, 박애를 대변하는 나라로 인식되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프랑스란 로망의 대상도 아니었고, 멋진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자유? 평등? 박애? 뭐라고?? 그들이 내세우는 그 평등 속에서 1년짜리 체류증을 받기 위해 추운 겨울 새벽 2~3시부터 줄을 서서 아침 8시 30분 오픈시간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려본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얘기일 것이다.


나와 똑같은 외국인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나를 차별하는 까만 얼굴의 흑인 여자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도대체 왜 그녀는 이리도 심하게 할까? 그녀도 백인이 아닌 외국인 출신인데?’ 하는 서글픈 질문만이 머릿속을 내내 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야 모든 절차가 빨리 끝나므로, 그 귀찮은 절차를 조금이라도 빨리 종결하기 위해 모두들 죄지은 사람들처럼 벌벌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경험했던 눈물겨운 인종차별 이야기를 하자면 밤을 새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차별이란 전세계 어디에도 있다. 심지어는 고향땅이 가까운 곳에서도 속속들이, 언제나 있다는 사실! 대표적인 프랑스소설 중 마르셀 빠뇰Marcel Pagnol의 <마농의 샘>이 있다. 3대에 걸친 땅에 관한 시골사람들의 정서와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소설로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요즘 내가 딱, ‘현대판 마농의 샘’을 현실로 체험하고 있다.


시골사람들만이 아는 표정이 있는지, 아니면 한동네에서 오래도록 인상적으로 겪어봐서 알게 된 표정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93세의 옆집 할아버지가 햇볕을 쬐는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이웃어른들이 오가며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 영감 전략이 원래 그래. 고 앞에 땅도 그 집 땅이 아니었자너. 수자원공사 땅이었던가 그렇지 아마? 영감이 불쌍한 척하며 나와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댁(나)을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게 만드는 전략일 거야. 힘내고! 꼭 이겨! 고약한 노인네 같으니!”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지역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며 야금야금 땅을 먹었던 모양이다. 이사 와서 보니 우리 땅도 20평 가까이 그 집 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우리 땅에 장독대는 물론 수도관과 수도꼭지도, 오수구도 놓고 아예 담장까지 쌓아놓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내 봄을 기다렸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내 땅을 찾는 시기가 왔다. 아마도 ‘현대판 마농의 샘’이 나의 집 이층에서 탄생될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내가 있나 없나 살피다가 살며시 나와서는, 우리집 쪽으로 건너와서 이전 주인 할머니가 심어놓은 부추를 캐서는 그 집 수돗가에 뱅그르르 심어두었다. 그런 모습을 이층 창으로 내려다보며 킥킥 거리며 웃었다. 내게는 어차피 필요없는 것들이고, 그냥 이야기를해도 충분히 가져가시라고 할 터인데도 사람의 심리란 참 다르다. 100세를 바라보면서도 끝없이 남의 것을 탐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 할아버지가 워낙 독특한 것인가 헷갈렸다.


서울의 선생님 한 분이 보내주신 가래떡 몇 조각을 에어프라이기에 구웠다. 그리고 접시에 나란히 두 개로 나누어 담았다. 할아버지 반, 나 반. 그리고 참외 한 개, 오렌지 한 개를 담아 갖다드렸다. 욕심 사나운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예뻐서는 아니고, 그저 나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만 하며 살면 되니까. 누가 전쟁을 걸든 뭘 하든 나는 내 길만 가면 되는 거니까.


서울사람들이 지방으로 이주해서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 중 하나가 ‘텃세’라고 한다. 그러면서 인구소멸지역 어쩌고를 외친다. 나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세월호 아이들이 떠난 지 어느덧 8주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참 잔인한 달인 이 4월. 오늘 나는 나에게 주문을 외운다. 하얀 은방울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슬픈 4월을 잘 이겨내야겠다. 은방울꽃이 가진 독을 혹여나 내가 훅 삼키게 될지라도, 틀림없이 행복해질 거라는 은방울꽃의 꽃망울이 올라올 때까지 하나하나 차분히 지키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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