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서 뭘 먹을까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떠오르는 게 막상 없어서 근처 베트남집에 가서 똥끼누와 한 그릇을 먹었다. 똥끼누와가 뭐냐고? 베트남 쌀국수를 프랑스에서는 원어 그대도 사용하여 똥끼누아라고 부르거든.
이 단순한 쌀국수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우리들에겐 치유의 음식이야. 부유한 학생들만이 유학을 가는 건 아니므로 모두가 힘들었던 유학생활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좋은 사람들이 내 옆에 든든히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 들이었겠지.
부유한 아이는 부유한 아이대로, 가난한 아이는 가난한 아이대로… 조금씩 주머니를 털어서 우리는 주일날 미사를 마치고 똥끼누와집엘 갔어. 모두 한 그릇씩 국수 한 그릇씩을 주문하면, 뻔히 보이는 초라한 모습에 소머리집(빠리 13구의 베트남 식당 이름 중 하나) 주인장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육수물 우려낸 고기가 있는데 원하면 드릴게요.”라고 한다. 그러면 그 반가움과 좋은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며 “네,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인사를 한다. 주인장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앗 싸!”하며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 주인은 살코기가 그득하게 붙어있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주고, 포크와 나이프를 명수대로 챙겨주신다. 남들이 보면 뭔가 대단한 음식을 주문한 테이블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짜로 얻어먹는 고깃덩어리와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라곤 겨우 각자의 똥끼누와 한 그릇이 전부였던 가난했지만 풍요롭던 훈훈한 식탁이다. 정신없이 고기를 뜯어먹고 국수를 먹어갈 쯤이면 이번에는 오빠들이(난, 형제 중에 오빠가 없어서 오빠라는 소리를 잘 못한다. 평창동에 아주 친한 이웃들이 있었는데.. 그분들께도 나는 ‘오빠’라는 호칭보다는 ‘형님’, ‘헝아’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빠리에서 만난 오빠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불러진다. 이상하게도… 정말 가족 같은 끈끈함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여기요, 죄송하지만 공깃밥 한 그릇만 주세요!” 이렇게 추가로 공깃밥을 추가로 주문한 오빠는 본인의 국물에 다 먹지 못하고 남긴 사람들의 그릇을 모조리 오빠의 국수그릇에 쏟아부어 밥까지 말아서 후루룩 하고 전부 먹어치운다. 이 오빠에게는 이 게 하루동안 버텨야 할지도 모르는 식사였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또 낄낄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고, 그렇게 배가 부르면 모두 볼링장에 가서 유일한 사치를 한다. 팀을 짜서 볼링을 치며 소리 지르고 웃다 보면 우리의 슬픔 따위는 모두 사라졌다.
그런 추억이 담긴 똥끼누와라서 그런가.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는( 얼마 전 함께 유학한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 ‘언니, 아프면 꼭 똥끼누와가 생각 나, 그걸 먹어야 낫는 것 같아’) 그랬다. 우리에게 똥끼누와는 흔한 베트남 쌀국수 이상이었던 것이다.
마음을 달래주고 치료해 주는 어떤 기분 좋은 그렇지만 짠한 국물의 비릿한 고기향이 우리의 몸을 치유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마음 아픈 똥끼누와는 여러 명이 먹으면 속에서 올라오는 고독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다. 혼자 저리도록 고독을 씹으며 차마 다 먹지도 못하게 울컥하게 만들 때 똥끼누와는 비로소 그 맛을 낸다.
오늘이 바로 그런 똥끼누와를 먹는 날이다. 소리 질러도 뭔가 풀리지 않고, 드라이브를 해서 장거리 운전을 해도 안 풀리는 답답함이 한가득 가슴속에 체기처럼 맺혀있는 시기. 사춘기보다 더 무서운. 만남보다 이별을 더 많이 하는 시기. 떠나보내야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더 많이 보면서도 견디고 견디고 또 견뎌야 하는 시기. 그러면서도 절대로 멈춰서 슬퍼할 수만도 없는 시기. 기대고 싶은 사람도 기댈 수도 없이 오로지 철저하게 버텨야 하는 무서운 오십 대. 가장 강한 힘을 길러야 하는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