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은 달

by 전병덕

봄을 일으켜 세운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새해를 맞은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여가 훅 지나가 버렸음이다. 부푼 가슴을 안고 야심 차게 세운 계획들은 하나둘 어긋나 작심삼일 된 지 이미 오래고, 하루하루는 시월의 여느 날처럼 타성에 젖어, 남의 일같이 식상한 일상으로 가라앉고 만다. 다른 사람들은 나름 열심히 트랙을 돌며 전력 질주하고 있는데, 혼자 구경꾼인 양 운동장 가장자리를 맴돌며 서성이고 있는 꼴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새 학년이 되면 달력 등 두꺼운 종이로 새 책 겉표지를 만드는 일이 첫 과제였다. 대여섯 권 책을 차례대로 덧씌우고 나면 마치 무슨 큰일이라도 해치운 것처럼 의기양양해 지곤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정성 들여 쓴 겉표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애써 만든 겉표지를 대번에 찢어 버리게 되는 직성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두꺼운 종이가 없어 몇 날 며칠 ― 울며 겨자 먹기로 ― 그냥 감수해야 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사뭇 유리창에 낀 성에를 마주하는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새 공책의 경우는 더욱 심해 첫 장에 쓴 글씨가 맘에 차지 않으면 ― 연필이 아닌 경우 ― 낱장을 자를 대고 칼로 오려 내곤 했다. 그렇게 두세 장을 연거푸 오려 내다 보면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해, 때로는 통째로 공책을 찢어 버린 적도 없지 않았다.


방학 때 일과 시간표는 또 어떠했는가. 방학 사나흘 전부터 컴퍼스까지 동원해 공들인 시간표는 누가 봐도 완벽 그 자체였다. 시간대마다 타이트하게 꽉 짜인 시간표는 너무 철저해서, 바늘 끝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거처하는 사랑방 벽 중간쯤에다 붙여놓은 커다란 일과 시간표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누워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뿌듯하고 양양해져 온통 세상이 내 것인 것만 같았다.


돌아보면 실패를 거듭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말하자면 연초 수립한 원대하고 완전무결한 계획들은 얼마쯤 지나면 알게 모르게 수정을 하게 되고 ― 며칠 더 지나 일월 중후반쯤에 이르게 되면 ― 부지불식간 흐지부지 되어 당연한 듯 포기의 전철을 밟고 마는 거였다. 결국은 용두사미로 끝날 일을 가지고 매해 정초마다 거창하게 원(願)을 세우고, 몇 번 작심삼일을 거쳐 쓴웃음을 한 번 짓고 나면 ― 도로 사위가 조용해져 ― 그렇듯 일월이 가고 또 그렇게 일 년이 지나가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 또는 대상과 대상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사막이 존재한다는 믿음, 가설이 생겨났다. 현재 지구상에는 20여 개 남짓의 사막과 300여 개 내외의 오아시스가 현존한다고 한다. 관계 형성 여하에 따라 모래사막이 되거나 자갈이나 암반 등으로 둘러싸인 황무지가 되기도 하는데, 오아시스의 생성 여부 역시 두 사람 혹은 두 대상의 연(緣)에 따라 그 크기와 형상 등이 달라지는 것 또한 불문가지다. 그러다 보면 결국 사막 밖으로 걸어 나오거나 사막 안에 갇혀 버리는 ― 다시 시작하거나 중도 포기하는 ― 두 개 경우의 수에 국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종심(從心)을 두어 해 남겨둔 시점에서다. 진달래꽃이 막 봉오리를 열기 시작한 산길을 걷다가 문득 사막의 야르당(yardang), 휘어진 모래 언덕을 떠올렸다. 언젠가 영상으로만 접하며 낯선 그림을 그려 보았던, 사막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 구체적 실상으로 이어지는 스케치였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 능선의 광활한 비경 속 한 지점에서 ― 모닥불을 피워 놓고 ― 불타는 보랏빛으로 사위어 가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나지막하게 쏟아져 내리는 별빛 속에 온몸을 담그는 환영이다. 그 드넓은 무한대 속 한 점에 지나지 않는 나는 진정한 자유였다. ‘정신 평등주의’의 견해차로 십여 년 넘게 사귄 연인들이 돌연 생이별을 선언하는 것도, 또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며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두 손을 비벼대는 퍼포먼스도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숨소리마저 멈춘 깊은 어둠의 적요 속 ― 더 이상 뺄 게 없다는 절제의 축(軸) ― 사막의 실존 이유인 오아시스 둘레를 걷는 구상만 거푸 되풀이했다. 사나흘 시시때때로 야자 숲 테두리를 헤치며 찬찬히 걸어 보고, 제일 높다랗게 솟아오른 언덕에 올라서서 물도 한 모금 마셔 보고, 오아시스 한가운데 아주 깊숙이 다이빙을 하는 멋진 모션의 꿈 말이다.


발단은 신문 지상에 실린 커다란 사진 한 장에서였다. 대번에 필이 꽂힌 사진 속에는 노년기에 접어든 여성들의 역동적 몸짓과 활기찬 표정, 자신만만한 테크닉이 금방이라도 지면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상하 검은색 댄스복 위로 살짝 주름진 하얀 얼굴들이 ― 흡사 엷은 달빛 속에서 활짝 핀 ― 초가지붕 위에 얹힌 하얀 박꽃을 보는 듯했다. ‘이게 뭐지?’ 뇌리를 강타한 호기심은 이내 ‘나도 한번 해 볼까?’하는 강한 욕구로 이어진다. 셔플 댄스와의 첫 대면 장면이다.


참 좋은 세상이다. 유튜브에서 셔플 댄스를 검색하자 각가지 동작을 담은 동영상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가장 초보적인 런닝맨 동작과 T스텝 동작 등을 세심히 살펴본 결과 혼자서도 충분히 익힐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의욕만 앞선 몸짓은 리듬을 타지 못했고, 둔감해진 감각은 통나무마냥 뻣뻣한 채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며칠 지나자 나이를 탓하며 주저앉고 싶은 생각과 용두사미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는 오기가 서로 팽팽하게 맞선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재차 마음을 추슬렀다. 우선은 지속적으로 동영상을 보면서 ― 새 노래를 배울 때처럼 ― 느낌과 율동에 익숙해지기로 했다. 그렇다고 새삼 일과 시간표를 작성하는 고집은 부리지 않겠다. 다행히 점심 식사 후 20여 분 정도 ― 경쾌한 음악을 틀어 놓고 ― 까치발로 거실을 걷는 운동을 해 오고 있던 참이다. 그 시간에 맞춰 춤 동작들을 하나둘 연습해 볼 요량이다. 만만히 보거나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석양의 벗인 양 변화를 위한 새로운 다짐이면 족하다 하겠다.


완벽은 절대의 질서이자 순수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여백의 미와 한 잔 술의 여유는 꽉 찬 입체적 아름다움에 결코 대비되지 않는다. 표표히 나부끼는 도포 자락이 스마트한 신사복에 비견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지금껏 팽팽한 일과 시간표를 꼭 교과서같이 신봉하고 추구하며 늘 그렇게 살아왔음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여백의 여유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게 된다. 작심삼일이면 어떻고 용두사미면 또 어떠한가. 삼일이 모이고 모이면 열흘이 되고 뱀 꼬리가 쌓이고 쌓이면 이력(履歷)이 된다. 그렇게 일월 한 달을 지내다 보면 나름 멘탈이 강해지고 관록도 생기는 법이다. 하여 이월의 어느 날을 기점으로 ― 새해 첫날인 양 ― 한 번 제대로 원을 일으키고 걸맞은 계획을 세워 다시금 시작해 보는 거다. 그렇다. 이월은 일 년 열두 달 중 새롭게 물꼬를 터도 늦지 않은 무이한 달이다.(월간자유 4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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