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해 십일월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셨다. 구순(九旬)을 넘기셨으니 호상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 말년 십여 년 넘게 ― 내처 요양원에 계셨으니 온전한 삶이라는 수식은 당찮을 수도 있겠다. 추적추적 가랑비가 내리는 발인 날 아침은 어쩌면 또 그리도 추웠을까. 장지를 내려오면서 ‘이제는 내 차례로구나.’하며 생(生)의 바람막이가 사라졌다는, 생사관(生死觀)의 최일선에 내몰렸다는 위기의식이 언뜻 머리를 스쳐갔다.
어머니의 삶은 무릇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속담의 고생이 당연시되던 세대였으나, 유년기 시절 일찍 타계하신 외할머니의 빈자리가 미상불 컸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초등학교 문턱도 못 가 본 어머니는 14살 되던 해 세 살 위 아버지를 만나 조혼을 했다. 청상으로 반평생을 살아온 시할머니와 홀아비인 시아버지도 함께였으니 말하자면 민며느리로 들어온 격이었다. 그래서 16살에 형을, 18살에 나를 낳고, 두 해 건너마다 다섯 명의 동생을 더 낳으셨다. 그중 막내 위 두 동생은 홍역 등으로 세 돌을 넘기기 전 서둘러 어머니 품을 떠났다.
살색이 고우신 어머니는 재주가 많으셨다. 그중에서도 음식 솜씨와 기억력 등이 각별히 뛰어나셨다. 어머니는 겨울밤 화롯가에 올망졸망 네 아이들을 앉혀놓고 ― 이를 잡거나 해진 양말을 꿰매며 ― 저녁마을 간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옛날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돌이켜보면 똑같은 이야기는 한 번도 없었는데, 한글도 못 깨친 어머니가 어떻게 그 하고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사뭇 신기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치성 드리는 재주도 남달라 내가 중학교 시험을 치르는 날 아침 ― 백일기도에 맞춘 ― 장독대 정화수가 촛불처럼 솟아오르는 역고드름의 기적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더운물 목욕은 연례행사 중 하나였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추석에는 뒤뜰 장독대 앞에서, 설날에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해마다 이어졌다. 어머니는 가마솥 가득 물을 끓여 커다란 고무다라에 옮겨 담고 순서대로 씻겼다. 난 어린 막내 여동생 다음 두 번째로 마지막 남동생 차례가 되면 시커먼 때가 둥둥 떠다니곤 했다. 성긴 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이쳤으나 뿌옇게 더운 김이 서린 부엌은 옹성처럼 아늑하고 포근했다.
어머니는 훤칠한 여장부셨다. 발이 하도 커서 고무신도 못 신어 보고 돌아가셨다는 외할아버지를 빼닮은 유산일 터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치명적 약점이 하나 있었다. 동네 아낙들과 어울리면 흉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앞뒤 재지 않고 털어놓는 가벼운 다변(多辯)이 그러했다. 대부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허물들이어서 한편으론 동네 구설수에는 오르내리지 않는 걸 다행이라면 다행스럽다 할 수도 있었겠다. 가끔 사정도 해 보고 싫은 소리도 해 보았으나 어머니는 요지부동, 때로는 내가 곁에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으셨다. 미루어 짐작으로 소녀티를 채 못 벗은 어린 나이부터 인내해 온, 시집살이의 구박과 설움 등이 나름 속가슴 한(恨)으로 발현된 듯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머니의 독단에서 비롯된 갈등은 아버지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객지 생활을 하던 형과 달리 아버지 편을 든 나는 어머니에게 미운털이 박혀, 이후 알게 모르게 관점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책에서 읽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앉히더니 어머니를 밖으로 내보냈다. 서운해진 어머니가 방문 밖에서 엿들으니 자기가 죽거든 머리를 잘라 동네 우물 속에 넣으라는 당부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 날 아들과 크게 다툰 어머니가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사실을 밝혔는데, 사람들이 우물을 퍼내자 몸은 아직 이무기인데 머리만 용(龍)으로 변한 짐승이 나타났다고 한다. 부지불식간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이야기는 사춘기 시절,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불신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될 만큼 비중이 컸다.
어머니의 임종이 임박했다는 연락이 왔다. 고속버스를 타고 진주(晉州) 병원으로 향하며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1인실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여장부의 허우대는 오간데 없고 살집 없이 비쩍 야윈 몸은 낯설기까지 했다. 가쁜 숨소리를 따라 기계적으로 불거지는 경동맥만이 생(生)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의 손을 감싸 쥐고 가슴과 배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나즈막이 말을 건넸다. 내내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와 더운물 목욕 장면 등이 흑백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내가 28살 때였다. 요즘 세태로 치면 어머니는 새파랗게 젊디 젊은 나이인 45살 청년 과부가 된 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형과의 합가(合家)를 극구 반대하셨다. 미루어 짐작으로 어머니가 잔정이 없으신 이유도 있겠으나, 젊은 나이에 손주들이나 돌보는 처지로 자신의 자유를 구속 받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개방적이고 주체적인 사고의 어머니에게 ― 세상 다 끝나 버린 ―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해 온 나는 그 얼마나 세상 물정에 어둡고, 아둔하고, 무지하고, 속 좁고, 이기적인 아들이었을까. 그 긴 세월을 견뎌오며 어머니는 오죽이나 서럽고, 외롭고, 적막하고, 허전한 상실감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치셨을까. 그것도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신 후에야 ― 일흔 넘어 본인은 아직도 로미오(Romeo)를 꿈꾸면서 ― 비로소 깨달았으니 치사랑의 어리석음과 요원함을 이제서야 알겠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신숭겸(申崇謙) 장군 유적지에서 배롱나무를 본다. 수령(樹齡) 400년이 넘은 몇몇 보호수의 위용보다, 사잇길 따라 이곳저곳 십여 그루씩 산재된 배롱나무들에게 더 시선이 간다. 처음 이곳을 지나며 눈길 둘 곳을 몰라 혼자 허둥대던 기억이 새삼 또렷하다. 수피가 미끈하게 벗겨진 나무줄기들이 마치 벌거벗은 여인의 몸으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똑바로 주시하지 못하고 언뜻언뜻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그 형상 속에 얼핏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랬구나. 어머니는 단지 내면의 소리에 충실했을 뿐인데 이 아들은 그 모습을 저 혼자 부끄러워하고 있었구나.
삼우제(三虞祭)의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아버지 옆자리에 모신 어머니 산소 앞에 앉아 하늘을 본다. 점점이 떠 있는 흰 뭉게구름 사이사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아니 미켈란젤로의 천장화(天障畫) 속 ‘아담의 창조’인 양, 두 개의 검지가 맞닿아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문득 인류에 회자하는 유대인 격언을 낮게 읊조려 본다. “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월간자유 26년 2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