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저리 도인(道人)이 그리는 수채화

by 전병덕

한 사람은 칠십 중반에 들어섰다. 오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대도시 양복점 시다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군대 갈 즈음 재단사로 기세를 떨치며 ― 집을 장만하고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는 등 ―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대한 70년대 후반 무렵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패션 흐름이 바뀌고, 교복 자율화까지 겹치면서 점차 내리막길로 밀려나게 된다. 그나마 흡족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아내와 결혼이었는데 그는 5년 연하인 아내를 마치 공주처럼 떠받들었다.


전형적인 갑남을녀(甲男乙女)의 건강한 삶이었다. 부부는 늘 화목했으며 아이들은 씩씩했다. 자타공인 애처가인 그의 아내 사랑은 오십여 성상이 지나도록 지칠 줄 몰랐다. 치부에 뛰어나지 못했어도, 아이들 성적이 빼어나지 않았어도 그들은 그들만의 철옹성에서 자족할 줄 알았다. 한 가지 흠결이 있다면 밖을 바라보는 여유의 결핍 정도라고나 할까.


시내 중심가에서 변두리 동네로 점차 무대가 바뀌어 갔다. 점포 임대료 등에 맞춘 이동이기도 했지만 외곽 동네 사람들이 그나마 맞춤옷을 선호하는 편이기도 했음이다. 급기야 육십을 넘겨서는 이면 도롯가에 세를 얻어 수선집을 내고 정착하기에 이르렀는데, 안팎으로 이재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 기술이 좋다는 평판으로 ― 멀리서 고객이 찾아오는 등 내외가 생활하는 데 별 지장은 없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환갑 즈음의 아내에게 병마가 찾아들었다. 고혈압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러려니 하며 시작된 신부전증(腎不全症)은 복막 투석에 이어 혈액 투석으로 차츰 강도가 높아갔다. 그러는 중에도 사이사이 무릎 인공 관절 수술과 백내장 수술, 복막 투석관 교체 수술 등으로 수시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그는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병상을 지켰다. 병원 복도를 오갈 때마다 손을 꼭 잡고 걷는 그들 내외를 간호사들은 잉꼬 할아버지, 할머니로 불렀다.


아내는 어리광이 심했다. 방 안에 앉아 시시때때로 짜증을 부렸고 걸핏하면 잔소리를 퍼부어 댔다. 설거지로 시작된 그의 병시중은 차츰 범위를 넓혀 지금은 밥과 반찬까지 만드는 실정으로 ― 십여 년의 세월이 눈덩이처럼 쌓여 갔다 ― 수선일과 병행하다 보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는 눈살 한 번, 이맛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냥 허허하고 웃으며 골목길로 나와 담뱃불을 붙였다. 유일한 낙은 밤 9시 넘어 잠자리에 들기 전, 소주 한 병을 마시는 일이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과 전셋값 폭등, 세간을 흔들어 대는 정치적 스캔들은 강 건너 불구경 거리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 한 사람은 팔순을 넘겼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부사관에 자원입대하여 20여 년 가까이 군대 생활을 했는데 ―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전력으로 ― 일흔 중반 국가 유공자로 지정되어 뒤늦게 연금을 받았다. 제대 후 밧줄을 타고 고층건물 공사장 마무리 작업 등을 하는 내내 그는 독신이었다. 인연이었을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또래 여인을 병원으로 옮기게 된다. 쉰 살 무렵의 일이었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사 남매의 어머니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양보와 타협을 하며 조화와 공생을 이루어 나갔다. 다소 수다스러운 게 여인의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누구와 대작해도 소주 한 병에서 잔을 엎을 수 있는 강단의 그에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어떻든 그들은 피차 연분인 모양이었다. 그 또한 소주 한 병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위안이라면 작은 위안이었다.


일흔을 앞두고 내외는 서울을 떠나 중소 도시에 정착했다. 세 칸짜리 조립식 건물을 지었는데 마당에 딸린 오십여 평 텃밭에서 ― 참깨와 들깨, 무와 배추 등 계절에 맞추어 ― 그는 농군 이상으로 농사를 잘 지었다. 일흔 초반 심근경색증으로 스텐트(stent) 삽입술을 받은 후에도 술과 담배를 끊었을 뿐, 천생의 농사꾼처럼 커다란 호두나무 한 그루와 대여섯 그루의 감나무 관리도 아주 능숙하게 잘했다.


아내가 뒤늦게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지적 호기심과 진취성이 강한 아내는 한글 공부에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열정을 쏟았다. 그 또한 한글 교실이 있는 시내 중심가까지, 시오리 남짓 되는 등하굣길 운전을 자청하는 등 아낌없는 정성을 쏟았다. 받아쓰기 채점 결과를 함께 들여다보며 ― 그들은 제2의 신혼처럼 ― 어린아이들처럼 소리 내어 환하게 웃곤 했다.


아내가 칠십 대 후반 즈음 무릎 관절염 수술을 받았다. 양쪽 무릎을 순차적으로, 연이어 인공 관절로 대체하였다. 얼추 건강을 되찾아 가던 아내가 이번에는 밤중에 화장실에서 넘어져 한쪽 엉덩이뼈가 망가지고 말았다. 나이가 든 때문일까. 인공 고관절 수술 후에도 의료 보조 기구만 쌓여갈 뿐 상태가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호박전과 부추전까지 부치는 등 전업주부로 나선 그의 노력에도 극렬한 통증으로 입맛을 잃은 아내는 언제나 죽을상이었다.


결국 일여 년이 지나 대도시 종합병원에서 재수술을 받았다. 출입이 제한된 병원에서 팔순 보호자가 열흘 넘게 새우잠을 자며 대소변을 받아냈다. 재활요양원으로 옮긴 후에도 아내가 물리치료를 받는 1시간 동안 ― 출입 통제로 문밖에서 ― 내처 유리창문으로 지켜보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나머지 시간은 혼자 밥을 끓여 먹고, 참깨를 털고, 호두를 까고, TV 스포츠 중계를 보며 기운차게 보냈다. 3년째 이어지는 병시중에도 아내에게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자린고비처럼 아껴둔 연금으로 수술비 계산을 하면서도 ‘허, 한 입에 털어 넣었네.’라는 혼잣말이 전부였다. 매일처럼 나라를 뒤흔들고 편을 가르는 야단법석 등에도 끌끌 가볍게 혀를 차는 일이 고작이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1장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해석이 분분하나 도(道)를 도라고 단정하면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에 한정하면 이름이 아니라는 정도의 해석이면 무난할 것 같다. 미상불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통력이 도가 아니라 자기 처지에서 자신의 책무에 최선을 다하는, 늙은 몸으로 묵묵히 성(誠)을 다하여 아내를 돌보는, 이 두 노인이야 말로 기실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진정한 도인(道人)들이 아니겠는가.


깊은 밤 문득 깨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예순 넘어 흰머리가 늘고 주름살이 깊어진 얼굴은 생면인 듯 낯설기까지 하다. 살짝 열린 메마른 입술과 그늘진 하얀 얼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 아래 가느닿게 코를 골며 왜 여기 이처럼 고단하게 누워 있는 걸까. 한밤중 모로 누워 잠든 아내의 주름진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살갑지 못했던 철 지난 아쉬움이 못내 가슴을 짓눌러 온다. 그러면서도 종심(從心)을 갓 넘긴 지금까지 말대꾸하지 말자는 속다짐조차 아직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난, 한참이나 기약 없는 언저리 도인(道人)이다.(월간자유 26년 1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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