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외로움이었다. 새벽안개 속에 촘촘히 내려앉은 회색빛 적요였다. 언제나 그늘지고 서늘하고 깊은 곳에서 호젓한 아픔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얼핏 그리움이 더해진 그 슬픔은 눈부시기도 하고 황홀하기까지 한데, 으레 가슴속 가득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가벼운 통증을 불러왔다. 어릴 적 처음 마주한 풍금 소리에 대한 그윽하고 아련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절대적 우상이었다. 유년 시절 내내 그랬지만 특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였다. 삼간초옥에 살던 시절 두 살 터울의 사 남매는 ― 나는 둘째였다 ― 안방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들어오면 마루로 우르르 몰려나갔고, 마루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나오면 다시 안방으로 와르르 몰려들기를 반복해야 했다. 어쩌다가 아버지 손을 잡고 논둑길을 걸을 때면 세상에 두려운 게 하나도 없었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뙤약볕도 대수롭지 않았고 소낙비가 쏟아져도 겁나지 않았다. “숙여”하면 벼이삭이 죽은 듯 조아렸고, “움직이지 마”하면 메뚜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6학년 철수마저 까치발로 살금살금 지나가야만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단풍이 물들 무렵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명료하지는 않으나 두어 시간가량 지각을 한 것 같았다. 막 복도에 들어섰을 때 어느 교실에선가 풍금 소리에 실린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동요 ‘섬 집 아기’였다. 왜 그랬을까. 갑자기 뭉클하고 알 수 없는 슬픔이 선뜻 몰려왔다. 가슴 한 편에서 시작된 앳된 정서는 어느새 온몸을 꽉 채우고, 나는 아이들이 몰려나올 때까지 ― 수업 마침 종소리도 듣지 못한 채 ― 내처 그 자리에 고개를 숙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언뜻 덥다고 느꼈으니 5월 말쯤 되었던 것 같다. 등굣길은 커다란 미루나무가 줄지어 선 신작로를 따라 장터를 지나 정문으로 가는 길과 논둑길을 따라 주막거리를 지나 후문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대부분 지름길인 논둑길을 이용했다. 오 리가 채 못 되는, 짐짓 아쉬운 감이 드는 거리이기도 했다. 그날도 하굣길은 언제나없이 혼자였다. 아름드리 버드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동네 어귀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마을에 하나뿐인 스피커에서 ― 너 나 할 것 없이 라디오가 없던 시절이었다 ― 가수 이미자(李美子)의 노래 ‘동백 아가씨’가 흘러나왔다. 애절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봄바람 때문이었을까. 울컥하며 알 수 없는 슬픔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떤 대상을 향한 절절한 외로움이나 막연한 그리움 같기도 했으나 분명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멍하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노래가 끝나고도 한동안이나 더 그렇게 서 있어야만 했다.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어느 순간 문득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섬 집 아기’의 반주 소리였는데 풍금 소리는 ― 사뭇 가슴을 적시며 ―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10년 터울 어린 막냇동생이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밤이 이슥해서 아버지는 포대기로 감싼 동생을 지게에 얹고, 삽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셨다. 이듬해 봄, 나물 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따라 올라간 뒷동산은 온통 쑥밭이었다. 어머니는 산비탈 너머 오리나무 아래 아주 오랫동안 앉아 계셨는데, 거기 어머니 발끝에 할미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무슨 마법 같았다. 고개를 숙인 진한 자줏빛 할미꽃을 보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면서 귓가에 당연한 듯 풍금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건장한 체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삼대독자로 성장한 배경이 짐짓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겠으나 당찬 성격 또한 아니셨다. 귓결로 들은 “남자가 백 근이면 충분한 거 아닌가.”하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려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 끝 무렵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싸움을 하셨다. 이웃집 남자로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는데 그는 체격이 우람했다. 깊어진 감정의 골이 이성을 압도한 결말이었으나 아버지는 본래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아랫말 친척 아저씨의 전언으로 찾아간 탑골 방죽에는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방죽 둑에 주저앉은 아버지는 혼잣말을 하며 분을 삭이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옆에 앉아도 출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는 독백을 끝내 멈추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한없이 좁아진 어깨를 바라보며, 몰아쉬는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가슴을 울리는 젖은 풍금 소리를 들었다.
그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복도에서 처음 들은 풍금 소리는 이후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들을 때에도, 홍역을 앓다가 죽은 동생을 떠올릴 때에도, 탑골 방죽에서 넋두리를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되살아날 때에도, 무언가 고뇌에 찬 힘든 일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꽤 한참 동안이나 귓가에 머물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아니 두 발 벗고 나서서 ― 감성이 여린 탓일 것이다 ― 지레 풍금 소리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 들어가곤 했다.
청소년 시절의 일이다. 버스에서 “차카게 살겠습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구걸하는 불량배들을 가끔씩 만났다. 맞춤법도 틀리고 삐뚤삐뚤 쓴 글씨는 ― 일부러 그랬겠지만 ― 언제나 “나는 깡패다”라는 반어적 협박용으로 다가오곤 했다. 얼마 전 일이다. 광복절 특별 사면을 받은 한 정치인이 SNS에 “더 차카게 살겠다”라는 글을 올렸다. 갑자기 세상이 씁쓸하고 허망해진다. 버스에서 만난 불량배나 그 정치인이나 나름 그들 수준의 어깃장을 놓는 품새로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이방원(李芳遠)은 하여가(何如歌)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에 대해 정몽주(鄭夢周)는 단심가(丹心歌)로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렇게 정몽주는 고려(高麗)를 등에 업고 선죽교(善竹橋)에서 죽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들은 이야기의 기억은 ― 마치 어제의 일처럼 ― 여태껏 생생하고 또렷하다. 특히 아직까지도 다리에 남아 있다는 정몽주의 핏자국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까지 했다. 이후 정몽주는 본받아야 할 충절의 대명사로, 이방원은 얄팍한 술수의 모리배로 자리매김한다.
풍금 소리는 아픔이자 정화였다. 생(生)을 관통하는 동경이었고 고독이었으며 내밀한 꿈이었고 찬란한 빛이었다. 오유지족(吾唯知足)을 일깨워 준 나침판이자 더없이 충실한 안내자이기도 했다. 종심(從心)을 넘어선 나는 이제 풍금 소리에 쉼표 하나를 더 찍는다. 그래서 살짝 설렘이 보태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숨소리를 듣는다. 그래, 바야흐로 나는 자유다. 차카게 살겠다는 비아냥도, 이런들 저런들 하며 왔다 갔다 하는 하여가도 더 이상 증오와 멸시와 배척의 대상이 아니다. 여름날 해질녘, 하천가를 수놓는 된장잠자리들만큼이나 그들 또한 자유다.(월간자유 25년 11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