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화면에 클로즈업된 영상을 본다. 어린이날이 토·일요일과 부처님 오신 날로 이어진 황금연휴 마지막 날 오후, 명동 거리의 정경이다. 화면 속에는 다수 외국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문득 스무 살 전후 동성로 거리 풍경이 오버랩된다. 그때는 분명 나도 영상 속 인물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하다못해 휑하니 거리를 휘돌아 금방 나오더라도 일주일에 한두 번 동성로에 가지 않으면, 지구가 멈춰 서고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관점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건 테두리 밖에서 안으로의 중심 이동이기도 하고 커뮤니티의 수레바퀴에서 개인 영역으로의 사고 전환이기도 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루하루는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었으나, 세상사에는 나름 올곧은 참여 의식이 있어 ― 중대 사안의 고비마다 ― 한 몸이 되어 박수를 치기도 하고 분노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 언제라도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면 강토와 부모와 처자식을 위해 ― 정년퇴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줄곧 그랬다 ― 언제라도 총칼을 들고 적과 맞설 마음의 기본 태세가 갖춰져 있었다.
‘제이미 맘’이란 유튜브 채널이 선풍적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한 여성 개그우먼이 몽클레어 패딩, 에르메스 슬리퍼, 샤넬 백, 헬렌카민스키 모자, 반클리프아펠 목걸이 등 소위 ‘강남 교복’이라 불리는 명품으로 치장하고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어린아이를 학원에 라이딩하는 젊은 엄마의 모습을 패러디한 장면들이다. 이후 몽클레어 패딩 등의 매물이 중고시장을 가득 채웠다고 하니, 세간에서 그의 풍자(諷刺) 충격이 얼마만큼 컸는지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느 모녀의 날 선 대화다. 유학을 가기 싫다는 딸에게 어머니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서울에서 ‘아주 평범하게 살게 해 주려는’ 마지노선의 충정이라며 목청을 높인다. 아마도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한 ‘4세 고시’와 초등학교 의대반 진입을 위한 ‘7세 고시’의 연장선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러고 보면 “개똥밭에 굴러도 기필코 ‘서울 공화국’에 뿌리를 내리겠다.”며 기염을 토하는 청년들의 막무가내식 돌진을 무작정 폄하할 수 없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추수(秋水)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 일만 알면 되고 메뚜기는 오뉴월 한철 일만 알면 된다. 왜 자기의 삶과 관계도 없는 바다와 얼음에 매달려 쓸데없이 생을 허비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날줄과 씨줄처럼 서로 하나로 연결된 실체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서울 공화국이라는 대상도 산촌이나 어촌 등 벽지에서 까맣게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줄기 소낙비가 지나갔다. 4학년쯤 되었을까. 초등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야트막하게 고인 물에서 두 여자아이가 물장난을 치고 있다. 꽤 오랫동안이나 마주 앉아서 물을 떠올리고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듯한 시늉을 하며 깔깔거린다. 웃음소리가 하도 해맑아 하늘에 닿을 것만 같다. “물고기 잡았어요!” 한참 만에 교문을 나서며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씩 웃는다. 자신에 찬 익살스러운 표정이 꾸밈없이 밝다. 파란 하늘에는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 군데군데 흰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떠 있고 햇살은 덩달아 눈부시게 환하다. 모르긴 몰라도 저 두 소녀들은 4세 고시나 7세 고시와는 전혀 무관하며, 한껏 나중에라도 ― 주관적 판단이기는 하나 ― 평범한 서울 시민이 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인다. 그러면서 두 소녀의 자유로운 웃음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그동안 등한시했던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상념이 얼핏 스쳐간다.
마음이 식은 건 육십 대 후반 어느 때쯤이었다. 그건 4세 고시나 7세 고시 또는 외국 유학 등 평범한 사람들의 서울 공화국 입성을 위한 전제 조건 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덕수궁 돌담길이나, 광화문 거리, 명동 거리 등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선진지 견학 명목으로 다녀온, 지금껏 단 한차례에 그친 외국 여행 역시 염두 밖이었다. 오로지 대한민국에서 공정과 상식, 양심과 정의, 평등과 질서, 염치와 수치 등 스스로가 가장 근본적 진리라고 굳게 믿었던 단어들이 더 이상 자신과는 무관계하다는 단정을 내린 순간부터였다. 세간에 대한 신뢰의 배격과 상실은 애국심마저 차츰 퇴색되더니 부지불식간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말았다.
여자가 무인도에 갇혔다. 풍랑을 만난 배가 파선되고 혼자 섬으로 떠밀려온 지 벌써 수년이 다 돼 간다. 그래도 조그만 섬에서 물고기도 잡고 수렵과 채취를 하면서 ― 뭍으로 돌아갈 희망을 곱씹으며 ― 씩씩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평선 너머에서 배 한 척이 나타났다. 거센 파도에 떠밀리며 만신창이가 된 배에는 ― 뜨거운 햇볕에 절고 굶주린 ― 비쩍 마른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여자가 소리쳤다. “배다!….” 남자가 소리쳤다. “섬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섬에 갇힌, 어쩔 수 없는 저마다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일 수밖에 없다.
불교에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전해져 온다. 중생(衆生)이 죽으면 생전 업보에 따라 육도 ―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인간도(人間道), 수라도(修羅道), 천상도(天上道) ― 중 하나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 사상을 말한다. 여기에 철학적·심리적 주장을 확장해 보면 대통령들만 모이는 콘퍼런스(conference)에서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신심 가득한 절과 교회에서도, 심지어 흉악범으로 가득 찬 교도소에서도 정녕 그들끼리만의 육도(六道)가 재연된다는 설정이다. 이 얼마나 경이로우며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대목인가.
‘진짜 사나이’라는 군가(軍歌)가 있다. 지금도 가끔씩 흥얼거려 보기도 하는데 70년대 초반 논산 훈련소에서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고, 고된 훈련을 참고 견뎌낼 수 있는 의지를 심어 주기도 했던 노래이기도 하다.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라는 마지막 소절 때문이다. 그래, 이래서는 안 되지. 설령 공정과 상식, 양심과 정의, 평등과 질서, 염치와 수치 등의 단어가 스스로 기준에 어긋났더라도 대한민국은 나에게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깃발이 아니던가. 비록 몸과 마음은 세월에 무상해도 아직은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룰 ‘손자 손녀’들이, 또 나만의 줄리엣(Juliet) 역시 남아 있지 아니한가. 그래, 다시금 한 번 더 일어서자. 가슴 한구석 어디쯤에서 시큰둥한 표정으로 누워 있을, 숨어 버린 ‘애국심’의 순수를 찾아 나는 소맷자락을 털고 길을 나선다.(월간자유 25년 10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