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긴 지 십여 년이 지났다. 공산댐 아래 동화천과 파계사 계곡에서 발원한 지묘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파군재 너머 첫 동네다. 앞면에 내가 흐르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자못 두메의 색깔이 짙게 풍기는 곳이기도 하다. 망설임이 없지 않았으나 선택은 두 가지로 족했다. 하나는 정년퇴직을 한 까닭이고 또 하나는 아내 역시 자연의 삶을 지향하는 공통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아내와 난 참새들의 재잘거림으로 첫새벽이 열리고 밤 이슥하도록 소쩍새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팔공산 숲 속의 자유를 공유하는 생활로 접어든다.
양금택목(良禽擇木)과는 거리가 먼 외곬의 삶이었다. 현명한 새가 되어 좋은 집에 거처를 정한 적도 없고, 더더욱 명현한 사람들이 꿈꾸는 좋은 직장은 아예 시야 밖이었다. 산업화 파고가 드높았던 60년대 말 아버지의 결정은 ― 취업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 공업계 고등학교 기계과였는데, 실습 시간에 접하는 선반 깎는 소음이 특히나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하나 지명(知命) 넘어 수필 세계로 입문하기 전까지의 과정은 나름 순리를 긍정하는 케세라세라(queserasera)의 견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신중함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었지만, 질풍노도의 격랑 속에 몸을 던지는 열혈 청춘은 더더욱 아니었다.
언제나 첫새벽 집을 나선다. 1시간 정도의 등정과 1시간 내외의 운동, 1시간가량의 하산 도합 3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로 이어지는 사색은 하루 중 유일하게 타자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이루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낮잠은 정년퇴직 후 새로 생긴 습관이다. 새벽잠의 보충 차원이기도 하지만 운동 피로를 말끔히 풀어 주는 탁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절기는 8시쯤, 동절기는 9시쯤 집에 도착하여 ― 사과 한 개와 구운 계란 하나를 먹으면서 ―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하고, 누룽지를 끓이다 보면 1시간여가 후딱 지나간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면 이내 부지불식간, 30여 분 남짓 무아(無我)의 꿈나라 행이다.
글쓰기를 한다. 소년 시절 작가의 꿈은 쉰 살 갓 넘어 수필을 시작으로, 소설을 건너 지금은 시(詩)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꼭 문명(文名)을 지향한 건 아니지만 간간이 몇 차례에 걸쳐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전이나 혹은 오후 두어 시간 어림에 지나지 않으나 순전한 몰입이 이루어지는 무이한 시간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우선 가수 장사익(張思翼)의 노래 몇 곡을 연결해 놓고 주마간산 식으로 듣는다. 한동안 엉덩이를 의자에 싣는데 알게 모르게 꽤나 도움이 된다.
아내와 서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칠순(七旬)을 두어 해 앞두고 각방을 쓰고 있는 중인데, 나이가 들면 부부는 동지애를 넘어 인류애를 지향한다는 말에 방점을 찍게 된다. 서로 공통분모가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고독에 대한 견해다. 아내도 나도 혼자만의 평화에 익숙한 감성을 가지고 있어, 타인과 교제가 빈번하지 않을뿐더러 목표 지향적 맥락도 같다. 내가 글을 쓸 때 아내는 안방에서 유튜브 시(詩) 낭송 동영상 제작에 여념이 없다. 해서 종일토록 함께 있어도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따로 노는 격이다. 그렇게 창수(唱隨)의 우리는 하나다.
정년 후 가장 큰 변화는 정지된 외식이었다. 재직 시에는 직장 모임 등에서 알게 된 맛집을 달에 한두 번쯤 아내와 찾기도 했는데, 퇴직 후 어느 순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 거짓말처럼 ―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직장 생활 당시에는 출장비나 수당 등 급여에 포함되지 않는 일정 부분이 있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었으나, 은퇴 후 연금에 있어서는 “한 다리가 천 리”라고 아예 마음조차 내지 않았음이다. 자연 친화적 아내 역시 은연중 동화되었고, 술을 좋아했으나 꼭 대작해야 될 상대가 필요한 것도 아니어서 집에서의 혼술은 안성맞춤 바로 그 자체였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 구절이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면 된다 ― 어부의 말에도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홀로 맑고 뭇사람들이 다 취했는데 홀로 깨어 있다며, 앙앙불락(怏怏不樂)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생을 마감한다.
이 얼마나 꿋꿋하며 옹골찬 처염함인가. 여세추이(與世推移)를 홀로 거부한 굴원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의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그럼에도 가슴속 깊이 쓸쓸함이 남는다.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초개처럼 팽개쳤음이다. 세상은 둥글고 정답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명분의 굴원도, 실리의 어부도 똑같이 소중하다. 어부가 있어야 명맥이 흐르고 굴원이 있어야 절개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사람도 글도 시절 인연이 있는 모양이다. 젊은 날 굴원의 어부사는 한낱 패배자의 넋두리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정년퇴직 순년(旬年)이 넘은 지금 새삼 옥조(玉條)처럼 다가온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 언뜻언뜻, 이미 오불관언(吾不關焉)의 경지 넘어 오유지족(吾唯知足)에 이른 자신을 보기도 한다.
아전인수식 독야청청(獨也靑靑)이 십여 년 가까이 이어진다. 외식이라는 단어는 숫제 모래밭에 묻혀 버렸고 중·고등학교 동창회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교 모임이 극소화된다. 만약 종래의 일상이 여유로웠어도 교류가 최소화되었을까. 아주 가끔 자문해 본 적이 있다.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가정이다. 거기에는 네온사인보다는 물소리 새소리에, 스타디움보다는 안방 TV에 치우친 정서와 강아지와 놀면 강아지 털이 고양이와 어울리면 고양이 털이 묻는다는, 나름 의식화된 지설도 한몫 거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로 우연한 기회였다. 하루 3시간, 초등학교 보안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잠시 망설임이 없지 않았으나 학교라는 대상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대가 싫지 않았고, 무엇보다 푼돈에 지나지 않으나 일정 금액 보수를 받는다는 조건이 그러했다. 그러고 보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최고”라는 시쳇말의 당위성이기도 하고, 그동안 얇아진 지갑에 미상불 경도되어 왔음이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거기에 초롱한 아이들의 눈망울을 마주하고 생기를 채우는 일은 부차적 덤이었다.
학교 보안관으로 근무한 지 3년째 접어든다. 시간에 얽매이는 부담에도 아직 발걸음이 무겁지 않은 것은, 학년 초 햇병아리들의 배꼽 인사와 조잘댐이 마냥 그립기도 하고, 달에 한 번 정도 아내에게 호기를 부릴 수 있는 남자로의 변신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 저녁 외식합시다!” 이 얼마나 호쾌하고 자신에 찬 마력적 리듬인가. 알게 모르게 밥 한 끼에 움츠러들었던 한 남자의 속내가 큰소리 한 번에 훌훌 날아오르는 해거름녘이다.(월간자유 25년 8월호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