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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해영 Jun 26. 2024

서해 바다 Book Roadd의 자취?
(가의 설화)

설화내용


서해 바다의 섬에 어느 날 중국에서 가의라는 인물이 귀양을 왔다. 그가 중국 땅에서 관리로 일을 할 때

 ‘곧 난리가 날 수 있으니 이를 대비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조정 관리들은 괜한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여 조정과 백성에게 쓸데없는 걱정과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며 가의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여 이 섬(가의도)으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정말로 전쟁이 나자 중국 조정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가의를 다시 불러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이 섬의 이름을 가의도라 부르게 되었다.     


왕조시대의 서해 바다와 가의도 


고대의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인보다 서해 바다를 훨씬 잘 이용하였다. 삼한과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 우리는 서해를 물류와 정보를 실어 나르는 고속도로처럼 활용하였다. 


중국 공식 사서에 삼한의 78개 국가 이름이 등장한다. 국가체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삼한의 소국 이름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어 있음은 한반도와 중국이 일찍부터 교류를 해왔다는 증거라 볼 수 있으며 우리의 문자가 있었다면 자세하게 중국과의 교류 내용이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마한의 54개 나라들은 한강 유역과 서해 바다를  물길로 연계하여 안마당처럼 쉽고 빠르게 중국인들에게 팔 수 있는 상품과 한반도인에게 필요한 문화 상품을 운반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백제 시기와 통일신라 그리고 고려시대까지 쭉 이어왔다. 이러한 바닷길 왕래가 능숙하게 가능했던 바탕은 서해안 바닷가 주민들의 선박 건조와 항해 기술 덕분이었으며 이러한 능력이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더 발전하였을 것이다. 


이와 반해 중국인들의 경우 바다보다는 중국 내륙의 강이나 운하를 활용함에 더 치중하여 바다는 자연스럽게 한반도인들이 주도한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한반도인과 중국인들의 바다를 활용하는 정도의 차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소질이 내재화되어  우리는 중국인 보다 훨씬 뛰어난 바다 활용 유전인자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바다로 나가는 행위를 엄격히 통제하는 국가 시책으로 인해 바다를 이용하는 DNA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한반도인들이 서해를 주름잡고 있을 때 서해지역 섬들은 한반도와 중국 간의 교류가 쉽고 안전하도록 운항 중 예기치 않게 만나는 태풍의 피난처 또 뱃 사람들의 물과 식료품의 공급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중국인이 정치적 피난이나 도피의 통로 역할도 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중국대륙의 재미있거나 큰 잇슈가 되는 정보나 이야기들이 뱃사람들을 통해 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가의도는 중국의 산둥반도보다 한반도에 훨씬 치우쳐 있는데 왜 가의 설화가 생겼을까? 왕조시대에 육지에서 섬으로 가서 사는 사람들은 육지에서의 공동체에서 이탈된 피해자 또는 엄격한 사회 규범에 한계를 느낀 영혼의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피난하여 생활하였을 수 있다. 


이들은 섬의 원주민보다 지식과 선진 경험이 풍부한 계층이었을 것이며 몸은 육지를 떠났으나 마음은 쉽게 내륙을 잊지 못하여 그들의 지식과 뱃사람들을 통해 들은 중국 관련 소식이나 책들을 얻어 공부하고 섬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와중에 가의라는 인물에 대해  사람들이 공감을 얻자 지명으로 변하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섬사람들에게 굳이 지명이 없어도 무방 했겠지만 육지와 내왕자나 중국과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섬 이름이 필요하였을 것이며 마침 섬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가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가의도라고 명명하였을 싶다.    
           

현대와 미래에서 서해바다와 가의도


가의도는 태안군 관할의 서해상의 섬으로 면적은 2.19㎢ 해안선 길이는 10km이다. 한자는 賈誼이며 이런 인물을 중국 측 자료를 찾아보면 중국 서한 초기에 살았던 인물로 나온다. 


그는 20세에 박사가 된 후 제후왕의 스승이 됐으나 제자인 왕이 죽자 이를 비통해하다 33세에 일생을 마감한다. 중국최초 통일왕조인 진이 15년 만에 망한 원인을 백성의 인심 잃음에 있다고 간파한 인물이었다.               

한편 아편전쟁 이전 중국의 왕조는 대륙국가를 지향하여 바다보다는 중국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펼쳐 이 땅들을 중국화 해왔다. 그러다가 바다를 활용하는 서양세력에 굴복한 후부터는 해양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월남, 필리핀, 일본 등과의 바다 관리권 마찰이 심해지고 있고 우리 서해에서도 분쟁의 우려가 있다. 특히 미국의 국제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며 해양국가로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 바다를 국제 공공재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공해를 주인 없는 땅으로 인식하고 이를 중국 관할로 하려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강해지면 서해를 중국의 안마당처럼 여기거나 자기들의 관할권을 넓혀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인 지명이나 이야기 등이 있는 우리의 섬들이 그들에게 생트집을 제공할 수 도 있으니 가의도 설화에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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