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27. 술자리 이후로,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하루가 의미 없이 흐른다. 평온하다고 모든 게 좋은 것은 아니다. 술자리에서 우현이의 의미심장한 발언 이후로, 우현이는 아무 말이 없다. 다시 임 대표 모드로 돌아간다. 술자리에 말한 사실조차 잊은 듯하다. 승기는 술자리 이후로, 우리 아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매일 묻는다. 특히, 그 카쿠르터가 누구냐고 집요하게 묻는다. 아, 난처하다. 거짓말이라고 말하기도 뭐 하고. 불편하지만, 싫지 않은 상황이다. 조금은 즐기고 있다. 이 모든 게 거짓이지만, 진한 우정을 확인할 계기가 되었다고. 그리고 술자리에서 우현이가 언급한 말은, 우현이가 다시 꺼내기 전까지는 잠자코 있으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런 결론도 짓지 못한, 점심시간 전에 도시락 까먹듯, 어정쩡한 날을 몰래 소비한다. 재건축 사업의 진척도 더디다. 버틴다고 표현하는 게 옳은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남는다고 말하는 세입자와 집주인으로 잠시 소강상태다. 오늘도 그렇게 어정쩡한 날을 보낸다. 그때다. 나의 게으름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무실을 감싼다.
따르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르릉
따르르르르르르릉
여직원은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강력한 SPF 50+ 자외선 차단제로 얼굴을 보호해 언제나 뽀얗고 하얀 얼굴 낯빛은 점점 어두워져 흙빛으로 변한다. 오늘은 자외선 차단제가 아닌 태닝 크림을 얼굴에 바른 게 분명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낯빛이 변하다니.
“안 팀장님, ○○○호, ○○○님이 어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재건축사업에 연달아 이런 일이 일어나네요. 모든 게 우연이겠지만, 조금은 섬뜩하네요. 저번처럼 근조화환을 보낼까요?”
깨졌다. 드디어 깨졌다. 하나님은 어정쩡한 날을 힘껏 던져 산산조각 냈다. 여직원은 우연이라 말하지만, 나는 안다. 이 모든 상황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한 계획 살인이다. 이제 더는 상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오한이 몰려온다. 손이 떨리고 목은 뻣뻣해진다. 속이 메스껍다. 토하고 싶다. 정신이 멍해진다. 현기증이 난다. 심하다. 그나마 앉아 있어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손으로 턱을 받친다. 그리고 딱따구리가 한쪽 뇌를 파먹는 듯하다. 편두통이다.
“안 팀장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저보다 더 놀랐나 보네요. 안 팀장님은 임 대표님이나 김 팀장님보다 감성적인 분이니까,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급체한 것 같아요. 두통도 있으시죠? 비상약 드릴게요. 저도 평소에 두통과 소화불량을 달고 살아요.”
“고마워, 그래, 근조화환을 보내도록 해.”
28. 실제로 상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승기에게 알려야 하나? 사무실을 두리번거린다. 승기는 사무실에 없다. 그래, 오늘 우현이와 출장이다. 승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우현이가 살인을 지시했다고? 승기가 믿을까? 나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신고해서 뭐라고 말하나? 내 친구가 재건축사업을 위해 살인을 지시했다고? 그동안 두 명이 죽었다고? 아무런 물증도 없다. 모든 게 정황에 불과하다. 만에 하나, 이 모든 게 우연이라면, 신고로 재건축사업을 그르칠 수도 있다. 신고하기 전에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건의 전모[274]를 혼자서 밝힐 수 있을까? 딱따구리의 공격은 멈출 기미가 없다. 편두통은 더욱더 심해진다. 속은 더 뒤집힌다. 일단,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야 한다. 모든 것을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웩, 웩, 웩, 웩, 웨에에에에에액, 웨에에에에에액, 웨에에에에에액, 으헤으혀으혀으, 으으으으으으으, 웩, 웩, 꿀걱.
속을 비우니, 편두통도 한결 나아진다. 침착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이 상황을 인지해야 한다. 현재 상황을 다시 정리하자.
1) 어르신의 죽음.
2) 우현이와 카쿠르터의 통화.
3) 버려진 낚시터.
4) 사진 속, 화이트보드에 적힌 지시.
5) 술자리에서 언급한 우현이의 의미심장한 말.
6) ○○○호, ○○○님의 죽음.
하지만 벌어진 사건을 재건축사업과 관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 어르신의 죽음 (실족사 처리. 떠나간 아내를 늘 그리워했으며, 지난날을 반성함.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음)-관련성 모호함.
2) 우현이와 카쿠르터의 통화( 의심할 만한 정황은 있으니, 6번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움)- 관련성 모호함.
3) 버려진 낚시터 (확실히 의심스러움. 하지만, 정확한 조사가 필요한 장소임)-관련성 있음.
4) 사진 속, 화이트보드에 적힌 지시 (1번과 6번의 사건을 언급했기에 확실히 의심스러움. 하지만, “○○○- 설득이 안 됨, 제거 대상. 준비 중.”이라는 뜻을 살해 지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관련성 있음.
5) 술자리에서 언급한 우현이의 의미심장한 말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려움. 관련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음)- 관련성 모호함.
6) ○○○호, ○○○님의 죽음 (사망 사유를 알지 못함. 조사가 필요함.)-관련성 모호함.
사건을 시간대로 다시 정리하니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른다. 일단, 장례식장으로 가자. 자초지종을 듣는 게 먼저다.
“효상아, 왔어? 굳이 너까지 안 와도 되는데.”
우현이와 승기는 외부에서 일을 마친 후, 장례식장으로 바로 온 듯하다. 예상 밖이다. 우현이가 직접 왔다. 이러면, 주위 사람에게 교통사고에 관련해 묻기가 어렵다.
“임 대표도 왔어? 이런 일은 인사팀장인 나만 오면 되는데, 유족들이 고마워하겠네. 회사 대표가 직접 왔으니.”
“고맙기는 무슨, 유족들이 정신이 있겠어? 내가 방문했는지 기억도 못 할 거다.”
“임 대표, 무슨 소리, 우리가 이렇게 많은 조의금을 내는데? 당연히 임 대표도 기억하고, 임 대표에게 고마워할 거야.”
“승기야, 우리끼리 말하지만, 돌아가신 분, 솔직히 골칫거리였잖아. 계속 뻗대고. 조의금? 냉정하게 말하면 위로금이지. 빨리 주변 정리하고 이사 가라는. 나, 참 나쁜 놈이다. 이런 순간에도 사업만 생각하니까.”
“임 대표, 그런 소리 마. 재건축사업이 비단 우리만 잘 되자고 진행하는 게 아니잖아. 우리 어깨에 카쿠르터의 미래도, 투자자의 미래도 달려있어. 임 대표, 여전히 착하네. 그런 마음도 있으니.”
29. 긍정적으로 우현이의 모든 것을 받아줄 자세가 된 승기다. 이 정도면 아부다. 해가 갈수록 무섭게 발전하는 승기의 사회성은 정말 미스터리다. 그나저나, 우현이는 세입자의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자신을 자책한다. 이런 우현이가 정말로 살인교사를? 선뜻 상상하기 어렵다. 소시오패스인 우현이를. 그리고 우현이 딸랑이가 된 승기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 역시 확실한 물증 확보가 먼저다. 그리고 승기를 설득한다. 그리고 단정하지 말자. 우현이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지니고 있다고.
“그래, 승기 말이 맞아. 임 대표는 회사 대표니, 재건축에 관련한 부담감이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겠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오히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더 미안하지.”
“효상아, 무슨 소리냐, 너희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어. 카쿠르터와 투자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만든 사람도, 사실 효상이 너잖아. 카테피아라는 이상향을 만들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효상이의 철학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성장하기도 어려웠을 거야.”
“그러게 말이다. 이제 끝이 보이는데, 이런 사건이 연속으로 터지니, 효상아, 승기야, 나 좀 불안하다. 일이 틀어질까 봐.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빚쟁이에 시달려 잠 못 이룬 그 시절로.”
“임 대표, 왜 갑자기 약한 소리야. 술을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오늘 속 이야기하는 것 보니까, 그동안 여린 마음을 숨긴 채 얼마나 힘들었던 거야?”
“승기야, 그냥 불안하다. 좀 무섭고. 하필이면, 이때, 곧 고지가 보이는데, 왜 지금, 지금, 지금.... 이렇게 무서운 일이 벌어지냐고.”
“임 대표, 지금, 우리 사업은 아주 순조롭다. 고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역시 사업이 잘될 신호라고, 난 그렇게 믿어. 그동안 우리 모두 열심히 했잖아. 안 그래? 효상아?”
“그럼, 임 대표, 오늘은 승기와 먼저 일어나는 게 좋겠어. 이곳에 다른 세입자와 집주인도 조문 온 것 같아서. 지금 이런 모습은 불안만 초래해.[275]”
“하하하, 정말로 든든하다. 난 이렇게나 나약하고 감성적인데, 이 상황에서도 사업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효상이와 승기가 있으니까. 그래, 효상이 네 말대로 일어나야겠다. 승기야, 가자.”
“효상이, 넌 같이 안 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상황 좀 더 보고 일어날게.”
30. 우현이는 연달아 누군가 죽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진심일까? 만약 연기라면, 단연코 남우주연상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만약, 이게 연기가 아니라 진짜라면? 이 모든 게 나의 상상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범인일까? 다른 누군가? 그렇다면, 문제의 답안은 하나다. 승기밖에 없다. 그런데 승기가 왜? 그것도 우현이가 모르게? 이런 일을 벌인다고?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둘은 공범? 만약 그렇다면? 설사 확실한 물증을 찾아도 승기와 상의할 수 없다. 지금 고민한다고 답은 없다. 일단, 고인의 사망 과정을 알아야 한다. 우현이와 승기가 장례식장을 떠난다. 근처를 둘러본다. 삼삼오오 모인 아파트 주민이 보인다.
“정말 사건·사고 하나 없었던 평화로운 동네였는데, 연달아 두 사람이나 죽었어. 정말 뒤숭숭해.”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참 이상해요. 돌아가신 두 분 모두 이사하지 않는다고 말한 세입자네요.”
“나도 그게 참 이상해. 우연이지만 너무 섬뜩하잖아.”
“그래도, 두 분이 돌아가셨으니, 재건축사업은 더 순조로워지지 않을까요?”
“에끼, 이 사람아,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죽었다고. 지금 여기서 그게 할 소리인가?”
“아니, 뭐, 못 할 말 했나요? 그리고 그동안 ○○○님이 고집부려서 재건축사업에 차질이 있다며, 성을 낸 사람이 누구였는데요? 바로 당신이잖아요. 웬 착한 척? 갑자기 죄책감이라도 들어요? 그리 뒤에서 욕을 했으면서.”
“뭐? 내가 언제? 사람 잡겠네. 그리고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어디서 유언비어[276]를 퍼뜨리는 거야?”
“아 다들, 진정 좀 하세요. 장례식장에서 무슨 소란이에요. 그나저나 ○○○님의 교통사고가 수상하더라고 해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수상하다니?”
“확실치는 않은데, 사고 직전에 가족과 통화한 것 같아. 유족의 요청으로 지금 블랙박스를 분석 중이라고 해.”
“사고 직전에 가족에게 전화했다고? 그럴 정신은 있었대?”
“그게 아니고, 통화 중에 사고가 일어난 것 같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수차례 ‘급발진’과 ‘브레이크 고장’이라고 말했대. 그러다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쪽의 화물차에 받혀서 그대로 즉사 한 거지. 그런데, 그 길목. 화물차가 다니기에는 좀 불편해. 2차선 도로에, 도로도 구불거려서. 자네도 알잖아. 큰 차가 다니기는 불편해. 더군다나, 얼마 전에 새로운 길을 닦아서, 대부분 경제특구지역과 관련한 공사 차량은 그 길로 다니지 않는다고.”
“그래, 그건 맞아.”
“그리고 더 수상한 것은, 반대쪽으로 달려오는 화물차의 속도야. 블랙박스 분석이 나와야 알겠지만, 화물차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것 같아.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는 상대방 차량을 보지 못했다고 해. 화물차의 운전사가 졸음운전을 했다고 진술했어.”
“그렇군, 그런데 그게 왜 수상해?”
“이 사람아, 그 도로, 속도를 낼 수가 없다고. 몰라? 화물차 방향은 내리막길이야. 워낙 가파르고 험해서 제한 속도가 시속 30km라고. 더군다나, 아무리 급발진이나 브레이크 문제라 해도, 우리 방향은 오르막길이야. 빨라야 얼마나 빠르겠어? 화물차가 그냥 받은 거야. 빠른 속도로.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수상하기는 하네. 그래도, 운전사가 말했다며, 졸았다고. 그럼 운이 없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그렇지. 죽은 사람도, 화물차 운전사도 둘 다 운이 없었지. 유족은 차량 결함으로 생각해. 차량을 구매한 회사에 소송할 생각이라고 하네. 블랙박스 분석 후 모든 게 분명해지겠지.”
to be continued....
[274] 전모 (全貌): 전체의 모양.
[275] 초래 (招來):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함.
[276] 유언비어 (流言蜚語):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 뜬소문. 부언낭설. 부언유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