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키토브
41. 마침내, 원하는 내용을 녹음했다. 낚시터? 아마 그곳이다. 18일 오후 8시? 내일모레다. 약 5개월 동안 우현이의 대화를 도청했다. 증거는 확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정황뿐이다. 녹음한 내용으로는 그 어떤 범죄 사실도 입증하기 어렵다. 낚시터에서 카쿠르터와 우현이가 만나면 증거를 확보 후, 승기와 상의해야 한다. 진실을 마주한 후, 다음은?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일단은 혼자 간다.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끝이 보인다.
“들어와, 효상아, 아무도 없다.”
무슨 소리지? 미행한 게 들킨 건가? 그럴 리가 없다. 모른 척하자.
“들어오라고. 효상아, 너 기다린 거야.”
기다렸다고? 나를? 스릴러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은 꼭 있다. 순진하게 들어가면, 기절시킨 후, 비닐과 노끈으로 몸을 꽁꽁 묶은 후, 낚시터 저수지에 버려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른 건가? 아니, 함정에 빠진 건가? 공포? 불쾌감?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심박수는 빠르게 증가한다. 숨이 가쁘다. 입을 틀어막는다. 우현이에게 들키면 안 된다. 잡히면, 죽음이다. 뇌의 편도체가 극도로 활성화된다. 이는 바로 교감신경계를 자극한다. 피부 표면에 털 구멍이 열리기 시작한다. 공기가 피부와 닿는다. 이렇게나 추운 날씨였나? 전기에 감전된 듯, 온몸은 찌릿찌릿하다. 어떡하지?
“효상아, 안 잡아먹는다. CCTV로 다 보여.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들어와. 그래야 끝난다.”
끝난다고? 무서운 소리만 해댄다. 더 나가기 싫다. 감시카메라가 있었어? 그렇다면, 우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나?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
“안효상! 빨리 들어오라고! 내가 시간이 없어!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더는 기회가 없다고!”
우현이가 보통 친구냐. 무려 25년 지기 친구다. 25년. 상상력이 과하다. 우현이가 설마, 내게? 아니다. 용기를 내어 나아가자.
“하여튼 겁만 많아서, 도대체 너란 놈은, 왜? 저수지에 너를 수장[280]시킬까 봐? 너 나 몰라?”
“그래, 우현아, 그럼, 말을 해.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효상아, 다 알고 있었어. 녹음기를 대표실에 숨긴 것을. 따로 대표실에 CCTV를 설치했거든. 그건 아무도 몰랐지. 시기를 본 거야. 너한테 진실을 말해야 하는 시기. 그날이 오늘이야. 따라와. 보여 줄 게 있으니까.”
42. 우현이를 따라간다. 우현이는 지하로 내려간다. 상상과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특수 스테인리스강과 합금, 그리고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어림잡아도 두께가 2m 이상의 벽으로 둘러싸인, 영화에서 볼 법한, 대형 원형 금고문이 보인다. 우현이는 손짓으로 날 부른다.
“홍채와 지문을 등록해야 하니까, 이쪽으로 와.”
얼떨떨하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한다. 그리고 우현이는 홍채와 지문을 등록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OTP 카드처럼 보이는 것을 2개 건넨다.
“이제부터, 네가 문지기다. 너한테 분명히 넘긴 거다. 승기도 같은 방식으로 등록하면 돼. 문을 열려면, 홍채인식과 지문인식 그리고 이 카드에서 보여 주는 8자리 숫자를 45초 안에 입력해야 해. 45초를 넘기면, 모든 게 리셋된다. 리셋되면, 이 안의 내용물은 전부 전소[281]돼. 꼭 기억해. 45초다. 문을 여는 과정을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그리고 반드시 순서대로 해야 해. 홍채인식, 지문인식, 그리고 숫자 입력. 그러니까, 카드가 작동하는지 확인을 먼저 해. 원형 건전지를 쓰니까. 수시로 교체하고. 카드는 세상에 2개만 존재해. 난 더는 필요 없어. 너 하나, 그리고 승기 하나. 알겠지? 이제 문을 열 테니, 놀라지는 말고.”
거대한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내용물은 조금씩 시야로 들어온다. 은행나무 잎인가? 온통 노랗다. 은행나무 잎을 왜 금고 안에? 금고 안에는 불투명한 비닐로 덮인 은행나무 잎이다. 우현이가 비닐을 걷는다. 정체가 드러난다. 은행나무 잎의 정체는 오만 원권이다. 오만 원권으로 빗어진 육중한 직육면체가 눈앞에 있다. 얼마인지, 그리고 육중한 직육면체가 모두 오만 원권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문제가 있는 돈이라는 사실은 대번 알 수 있다.
“이게 다 뭐냐, 우현아. 영화 찍냐? 그리고 이 돈, 전부 투자자 돈 아니야? 이 돈을 어쩌라고?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냐?”
“효상아, 300억이다. 300억. 해외로 돌리고 돌려서 더는 출처를 알기 어려운, 깨끗하게 세탁한 돈이야. 너와 승기, 각 150억씩.”
“뭐, 세탁한 돈? 각 150억? 무슨 누아르 영화 찍어? 장난 그만 치고, 진실을 말해 줘. 부탁이다. 우현아.”
“진실? 효상아, 진실은 눈앞에 있잖아. 네 눈앞에.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 평생 만질 수 없는 돈. 그게 진실이야.”
“아니, 원하는 진실은 과정이야. 과정.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아. 우리 사업은? 재건축은?”
우현이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다.
“그래, 아버지가 너와 승기에게는 선택할 기회를 주라고 했어. 앞으로도 블루 고스트로 활동을 할지를.”
“앞으로도? 알쏭달쏭하게 말하지 말고. 무슨 선택할 기회?”
“정식으로 블루 고스트에 합류해 세계를 돌면서, 소외층인 서민에게 인생 2막의 기회를 줄, 제2의 카테피아, 제3의 카테피아를 건설할 기회.”
“그거라면, 당연하지. 아버님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고, 블루 고스트의 힘도 알고. 오히려 우리가 감사하지. 우현아, 나도 세계를 돌면서,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어.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낚시터는 무슨 용도고, 숨겨진 금고는 뭐고, 300억은 다 뭐냐.”
“300억? 그래, 이렇게 설명하면 좋겠다. 효상아, 이것은 블루 고스트가 너와 승기에게 내민 스카우트 비용이다. 앞으로 평생 블루 고스트로서 살아간다는 다짐에 대한 이적료.”
“이적료? 스카우트 비용? 이런 것 받지 않아도 나와 승기는 평생 내 옆에서 있을 거야. 무슨 가치가 있다고, 우현아, 이렇게나 많은 돈을. 아버님께 말씀드려. 이 돈이 없어도 우린 함께할 거라고.”
43. 우현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원하는 답변은 아닌 듯하다.
“효상아, 블루 고스트로 살아가면, 이전의 모든 삶을 포기해야 할지도 몰라. 이 돈은 너희들의 인생을 담보로 잡은 목숨값이라고.”
“목숨값이라니? 좋은 일을 하는데, 왜 그렇게까지 말해? 가난한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일인데, 안 그래?”
“효상아, 그래, 우린 분명히 좋은 일을 하고 있어.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레벨 1 달성을 위한 500억을 맡긴 투자자와 카쿠르터 100명에게 일괄적으로 5,000%의 수익률을 지급했어. 그러니까, 5,000% 수익률은 원금 대비 51배니까, 100만 원 투자하면, 원금 포함해 5,200만 원을 돌려 줬어.”
“5,000% 수익률? 그럼 1억을 투자한 고객에게 52억을 돌려 줬다고?”
“효상아, 아까도 말했지만, 레벨 1의 투자자만 대상이라고. 가난한 사람이 수중에 1억이 어디 있어? 전부 소액 투자였잖아. 기억 안 나?”
“그렇지. 그런데, 이 일을 혼자 했다고?”
“승기는 알고 있어. 다만, 승기는 몰라. 왜 이런 지시를 내렸는지. 하여튼 승기가 오늘 처리하고 보고한 거야.”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는다. 우현이가, 아니 블루 고스트는 무엇을 하려는가?
“그럼 이 돈은 다 뭐야?”
“그렇게 정리하고 남은 돈이야. 처음부터 너희들의 몫, 300억은 빼고 시작했다고 하는 게 맞겠네.”
“그럼 넌? 네 몫은?”
“내 몫을 걱정하는 거야? 효상아? 우리 아버지가 블루 고스트 아시아 헤드다. 아시아 헤드. 이미 관련한 몫은 다 챙겼어.”
“레벨 1 달성 이후로 모인 투자자의 투자금은? 우리 사업은? 재건축사업은?”
우현이는 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한다.
“효상아, 다 가짜야. 우리 사업이라는 게. 처음부터 진행하는 사업은 없었어.”
“가짜라고? 가짜라고? 그동안 우리가 진행했던 모든 과정이?”
“우리가 땀 흘려 달성한 모든 것은 진짜지. 그리고 고귀하며 숭고한 작업이고. 과정은 진짜야. 결과도 진짜야. 다만, 대외적으로 말한 방향이 가짜라는 거야. 처음에는 몰랐어. 아버지가 말씀을 안 했어. 중국에 갔을 때도, 한국에서도. 레벨 1을 달성하니 그제야 말씀하더라. 블루 고스트가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렸는지.”
“왜 꺼렸는데, 그게 늘 궁금했어.”
“레벨 1의 투자자와 카쿠르터의 보호 차원이었어. 언론에 노출되면, 이들에게 지급한 인생 2막의 기회를 빼앗길 수 있으니까. 현재, 레벨 1의 투자자와 카쿠르터의 인적사항은 너와 나 그리고 승기만 공유하고 있어. 그것도 이유였어. 다른 직원이 알아서는 안 되니까. 승기에게 이미 말해뒀어. 수익금을 모두 지급하면 관련한 파일을 모두 삭제하라고. 그것도 이미 처리한 상태야. 이제는 아무도 몰라. 누가 카쿠르터인지, 누가 레벨 1의 투자자인지.”
“우현아, 그래도 레벨 1 때, 통장 내역을 살피면 그들의 이름과 계좌 이체한 명세를 볼 수 있는데?”
“효상아, 뭘 착각하는 거야?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긴, 이건 처음부터 승기도 너도 모르는 일이니까. 너와 승기가 본 수많은 계좌이체 내역은 전부 대포 통장이야. 엄밀하게 말하면, 대포 통장은 아니구나. 전부 외국인 명의의 통장이지. 그리고 블루 고스트의 지시로, 이들은 프로젝트를 위해 이미 3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 경제 활동을 했어. 그러니 그 정도 소액금액이 들어오고 나간 게 당연하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그리고 그들은 이미 레벨 1 달성한 시점에, 모두 한국을 떠났고.”
우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 나뿐인가?
“그래, 효상아, 만약에, 레벨 1 투자자의 돈을 편취할 생각이었다면, 들통났을 거야. 경찰의 수사망은 그리 허술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소액의 배당금을 그들에게 꾸준하게 지급했고. 누가 의심을 해? 매달 꼬박꼬박 돈을 받는데? 그리고 너도 알잖아, 모든 배당금을 카쿠르터가 현금으로 직접 지급한 것을. 그러니 전산상에 남는 게 없다고. 결국, 레벨 1 투자자는 공식적으로 우리와 아무런 접점이 없어. 추적 불가라고. 그래야, 그 돈을 몰수당하지 않고, 그 돈으로 재기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그 큰 수익금을 일괄적으로 어떻게 보내? 계좌이체 하지 않는 한, 그게 가능해?”
“효상아, 그래, 가능하지 않지. 그래서 목숨값이라 한 거야. 300억이. 너와 승기의.”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
“승기는 아마 눈치챘을 거야. 워낙 냉철하고 사려분별을 잘하니. 아마 선택을 했겠지. 선택. 승기에게 얼마 전 지시를 했어. 우리 셋 이름으로 비대면으로 계좌를 만들라고. 대리인도 가능하니까. 그리고 계좌를 만든 후, 레벨 1 투자자에게 보낼 수익금을 계산해 계좌이체하라고.”
“우현아, 승기가 의심을 안 했어? 사업을 시작도 안 했는데, 투자에 대한 수익금 정산하라는 지시를?”
“의심은 한 것 같은데, 그냥 미리 정산한다고. 알지? 승기는 예전처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시비를 걸지 않아. 전세사기 당한 이후로, 승기는 변했어. 하여튼, 곧 문제가 반드시 터질 거야. 수익금의 출처가 문제니까. 수익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너도 대충 눈치챘잖아.”
“그래, 우현아, 레벨 2 이후로 모인 부자들의 돈이겠지.”
“그래 맞아. 그리고 경찰은 바로 우리 셋을, 폰지사기의 용의자로 지목할 거야. 우리 계좌로 돈이 빠져나갔으니까.”
“그래, 인제 와서 화를 내는 게 무슨 소용이냐? 이제 잘 알겠다. 목숨값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런데, 우현아, 그럼 우리 통장으로 계좌이체하면, 그 돈은 전부 몰수당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레벨 1 투자자가 어떻게 그 돈으로 인생 2막의 기회를 얻어?”
“걱정할 이유가 없어. 승기가 계산해서, 전부 중국으로 보낸 거야. 그리고 그 통장 역시 중국에서 활용하는 대포 통장이고. 그리고 그 통장의 주인 역시, 외국인이야. 같은 방법이지. 그러니, 레벨 1 투자자도 이 돈의 출처를 알기 어려워. 하지만, 이 돈이 수익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 거로 생각해. 계좌이체한 명의가 ‘BLUE GHOST’니까. 처음이야 어리둥절하지. 너무나 큰돈이 들어왔으니. 무섭기도 하고.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몰라. 그런데, 누구나 바라잖아. 내게도 이런 큰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짜로 이 돈을 신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열심히 살겠다고. 그런 바람. 누구나 꿀 수 있잖아. 레벨 1 투자자는 대부분 지인 추천이었으니까, 지인에게 확인하지 않을까? 너도 큰돈을 받았냐고. 그리고 그들도 같은 명의로 큰돈이 이체된 사실을.”
to be continued....
[280] 수장(水葬): 물속으로 가라앉히거나 버림.
[281] 전소(全燒): 남김없이 모두 타 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