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지운다_러다이트
9. 문을 연다. 유민서다. 그때 옆에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이다. 단둘이 있는 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다. 생각보다 더 야리야리하다. 이렇게나 왜소했나. 오른쪽 눈썹 위에 작은 상처가 보인다. 어렸을 때 다친 상처인가? 눈썹에 새겨진 상처를 따라서 약간의 주름이 잡힌 이마를 바라본다. 이마의 주름이라, 이 또한 외모와 상반된다. 그녀의 굴곡진 삶을 넌지시 속삭이는 듯하다. 작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창문 너머의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녀의 눈을 응시한다. 깊고 맑은 고요한 눈이다. 그리고 힘겨운 계절을 이겨낸, 남모를 슬픔을 담은 눈이다. 그렇다고 차가운 눈은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나를 감싼다. 해묵은 얼음은 서서히 녹아간다. 그녀의 눈을 올곧이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내 눈을 여전히 피한다. 한참을 먼 산만 바라본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듯하다. 겹겹이 쌓인 무거운 심정[646]은 헤아리지 않아도 느껴진다. 마음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
“말씀하세요, 먼 산이나 보려고 찾아온 게 아닐 텐데요.”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시간 많아요, 처음부터 차근차근 말씀해 보세요.”
“엘로스를 아십니까?”
“대한민국 국민 중 엘로스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하긴, 그렇네요.”
“그래서요, 엘로스가 뭐요?”
“일단,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트리플엑스 유민서 요원입니다.”
“트리플엑스? 아,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시계 만드는 회사요?”
나를 떠보는 눈치다. 그리고 실제로 트리플엑스 요원인지를 확인할 길도 없다. 일단, 모르는 척하자.
“시계요? 하긴, 정류장마다 트리플엑스 엠블럼이 보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중앙에 매달린 커다란 시계의 브랜드가 트리플엑스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트리플엑스 요원이 하는 일은 조금 다릅니다.”
“뭐요? 시계를 만드는 게 주 업무가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뭐, 그런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요원이니, 우리처럼 평범한 시민을 감시라도 한다는 거예요?”
유민서는 말이 없다. 설마? 진짜로? 분위기를 전환하자.
“농담입니다. 농담. 설마, 정부가 그런 일을? 왜요?”
유민서는 여전히 말이 없다. 정말로 감시한다는 건가?
“무서워지려고 합니다. 농담이라고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 트리플엑스 요원은?”
“아닙니다, 준서 님이 말씀하는 그 일을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 일을 합니다.”
“그 일이요? 설마, 진짜로 우리를 감시한다고요? 왜요? 이유가 없잖아요.”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정부가 우리를 감시한다고? 그래, 이유가 있겠지.
“엘로스와 대화해 본 적은 없습니까?”
“엘로스요? 그럼요, 자주 대화합니다.”
“등급이?”
“청송동에 머무는 자는 모두 5등급으로 알고 있습니다.”
“5등급이라...... 실제로, 대화할 수 있는 게......”
“뭐, 그렇습니다. 현재 처지가. 하하하.”
“웃을 일은 아닙니다. 등급이 낮으면, 엘로스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유민서 님 이야기는, 뭐, 엘로스가 우리를 감시한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크게 생각하면, 대한민국 국민 중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김준서 님, 그게 무슨......”
“그러니까 제 말은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여기저기, 카메라 천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찍히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네요.”
“그러니까, 엘로스가 우리를 감시한다는 게, 삶의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정부가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엘로스는 정부의 산물 아닙니까?”
“그렇죠, 국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만들어진 정부의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엘로스가 뭐가 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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