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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철 Oct 25. 2024

인간과 로봇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로봇에게는 정말 자유의지가 없는가

(해당 글은 2018년도 이진우 교수님의 응용윤리학을 수강하면서 작성하였던 보고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21세기는 바야흐로 인류의 전성기이다. 인간은 그야말로 이제껏 인간의 조상이 단 한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20세기 후반기부터 폭발적으로 발달한 과학기술은 인류의 행복하고 멋진 삶이라는 모토 하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이어주는 인터넷, 인간의 건강한 삶을 보장해주는 의약품과 의약기술, 먼 거리도 쉽게 닿을 수 있게 해주는 교통수단, 현존 인구보다 더 많이 생산되는 식량은 원시 인류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다. 그러한 성취는 물론 하늘에서 툭 떨어지듯이 우연히 얻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과연 무엇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여야 하는 것일까?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수많은 과학자일 것이다. 인류가 과학기술의 발전 아래에 이러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는 인간 나름대로의 노고가 숨어있는 셈이다. 그러한 과학자들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과학기술의 진일보에 기여하는 만큼 우리가 수많은 기술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다시 말해 인간은 왜 그렇게 무엇인가 열중하여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혹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지닌 호기심이 그 연원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정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진일보한 과학기술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일까?


 인류는 어떻게 진일보한 과학기술의 열매를 얻게 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감정보다도 인간의 인식 변화가 우선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인간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구성되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은 호기심이지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기존의 인간이 인식하고 있었던 세상의 틀을 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원시 인류는 번개라는 것이 무엇인지 대단히 궁금해하였을 것이다. 번개라는 것이 동반하는 엄청난 섬광, 소리, 그리고 낙뢰에 의해 발생하는 화재는 당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을 것이다. “도대체 저 현상은 무엇인가?”하고 말이다. 그와 더불어 엄청난 섬광과 소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자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절대적인 지위에 있는 어떤 자가 분노하여 번개를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종교의 탄생이다.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과 두려움은 절대자를 향한 믿음을 탄생시켰고, 그러한 생각이 점차 체계를 갖추며 종교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종교가 자연 현상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자연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종교, 절대적 존재로서의 신이라는 틀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선에서 그쳤으며, 자연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해내는 진보를 꿈꾸지 못하도록 옥죄고 있었다. 신은 삼라만상의 창조자였고, 인간 사회를 아우르는 핵심이었다. 인간은 단지 그의 피조물에 머물러 있었다.


 종교라는 사고의 틀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는 16세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 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신이 인간 사회의 중심에 있다는 사고에서 탈피하도록 해주었으며, 인간이 그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인간 스스로 자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야흐로 휴머니즘 시대의 개막이다. 휴머니즘의 시대에서 자연은 더 이상 신이 마련한 신성한 것이 아니었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하고 분석하여 자연을 이해하려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근대 과학의 시작인 셈이다. 이전까지는 어떠한 자연현상의 근원이나 원인이 단순히 신의 섭리라고 받아들였다면, 이 시기부터는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응용하면서 수많은 성과를 얻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정말로 달콤했다. 불과 4세기만에 인류는 급속한 문명 발전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발전의 중심에 있는 과학기술은 이러한 바로 이러한 사고의 전환에서 기인한 셈이다.[1]

 인간의 이러한 기술 발전은 인간이 점차 기존에 꿈꾸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인간이 지금까지 주어진 자연을 이해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그것을 넘어 자연을 변형하고, 더 나아가 피조물을 “창조”하는 신의 위치를 점차 엿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피조물이라는 수동적 위치에 있기를 거부했다. 지구의 유일한 지배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른바 “호모데우스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인본주의,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등장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기술혁신을 통해 기존의 인간이 변화시킬 수 없었던 인간에게 주어진 육체, 정신이 한계를 극복, 변형함으로써 인간의 새로운 발달을 꾀하고자 하는 일종의 믿음이다.[2] 우리가 변화시킬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단순히 우리 주변의 환경이었다면 이제 진정한 혁신을 위해 우리 자신의 신체적 조건, 가령 지금의 인간이 처한 생로병사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인간보다 더 진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령 우리는 태어나는 방식을 지금과 같이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을 복제하여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방법도 존재할 수 있다. 그것에 대응되는 의미로서 우리는 죽음의 일종의 질병으로서,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 대부분을 기계 장치로 대체할 수도 있으며, 우리의 의식을 업로드하고, 이를 로봇에 이식하여 로봇을 통해 불멸의 삶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인 것이다.

 이러한 트랜스휴머니즘의 기조에 발을 맞추어 과학자들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바로, 인간과 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로봇을 만들자는 것이다. 과거의 로봇이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로봇을 만들고자 한다. 단지 구성된 신체가 기계장치일 뿐, 우리와 같이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로봇이 생겨나는 상황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생물학적, 정신적인 이해가 완벽해짐에 따라 인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우리가 만들어낸 인간(그러한 인간이란 복제인간의 수준 넘어 로봇과 같은 기계장치의 인간)이 우리와 같은 인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고민하여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거부감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위시한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며 그와 동시에 우리가 기존에 동일한 인격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대상까지 인격 존중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본성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로봇과 우리의 차이점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찾아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유의지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이번 보고서 전반에 걸쳐서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로봇과 인간의 차이를 조명하고자 한다. 왜 자유의지가 그것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 로봇에게는 자유의지가 부여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의 결론으로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어떠한 차이가 로봇과 인간을 가르는지 판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트랜스휴먼, 포스트휴먼이 과연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1) 인간과 로봇의 구분: 왜 자유의지인가?

 로봇과 인간의 구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 로봇이 잘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누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로봇이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로봇이 우리보다 더 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계산적인 능력일 것이다. 주어진 정보로부터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행위는 로봇이 우리보다 월등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계산적이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이성적이라는 이야기이다. 인간은 어떠 한가? 인간은 그에 정확히 대응된다. 인간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더 뛰어난 성취를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감정적인 결정을 내리고 생각하는 일에 훨씬 더 뛰어나다. 그러한 감정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로봇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할지 결정할 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 중의 하나가 그 일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행복이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은 이제껏 이러한 성취감과 행복을 원동력으로 성취된 것이라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인간이 가진 직관 역시 로봇과 인간을 가르는 주요 잣대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직관을 통해 종종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고는 한다. 그것이 설령, 논리적인 근거가 없더라도 인간의 행동은 종종 이 직관을 통해 수행된다. [3]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로봇보다 더 뛰어나다고 파악되는 능력인 감정, 직관 모두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 결정하는 행위와 연계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특정한 문제에 당도할 때(facing problem)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의 최종적으로 하는 행위(behavior)를 두 단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외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상황을 이해(understanding)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실제 어떠한 행위를 할지를 결정(decision)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문제 상황 직면(facing problem) → 상황 이해(understanding) → 결정(decision) → 행위 (behavior)


 실제로 인간이 어떠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 수많은 정보를 수합하고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 단계는 감정과 직관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의 과정을 통해 행위의 주체가 어느 단계에서 분별되는지 파악해볼 수 있다. 가령 우리는 판단이 결여된 행위라고 하여 그것이 항상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4] 하지만, 결정이 결여된 행위는 반드시 자유롭지 않은 행위라고는 생각한다.[5]


 이를 명확히 보이기 위해 예시를 하나 제시해보자. 우리가 지금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령, 직업을 결정함에 있어 노후의 안정된 삶이나, 연봉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직업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오히려 직업에 대한 나의 만족감이나 일을 하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로봇은 인간보다 논리적인 판단을 수행하는 것은 잘하지만, 그것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은 없다. 결정은 오직 외부의 명령, 인간이 입력한 알고리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에 반해 인간은 로봇과는 다르게 논리적인 판단에 능하지는 않더라도 스스로가 결정의 주체로서 감정과 직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로봇과 인간을 구분함에 있어서 그 기준은 감정보다는 자유로운 판단 소유의 유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감정은 그 자체로서 인간과 로봇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유로운 판단의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 논제는 다음이 될 것이다.


로봇에게는 정말 자유의지가 없는가?”


지금의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는 “기술에 발전에 따라 등장할 미래의 로봇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여전히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자유의지를 그 기준으로 인간의 자유의지 존재여부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부여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2)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 자유의지의 정의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로봇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좀 더 의미 있게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자유의지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한 것과 같은 우리가 수행하는 행위가 거치는 4단계, 즉, 문제 상황 직면(facing problem), 상황 이해(understanding), 결정(decision), 그리고 행위 (behavior)의 단계를 거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각 단계를 분석하여 자유의지를 위해 요구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정리하기에 앞서 우리가 한 가지 고려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결정론적 사회에서는 자유의지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 생각이 인과율에 의해 과거 사건을 원인으로 발생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회에서 과연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 많은 원자가 우주 탄생 태초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추적되어 왔다면 우리는 이러한 원자의 궤적을 바탕으로 우리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이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증명된 바 있다. [6] 또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유명한 사고 실험은 우리에게 관측 행위가 이루어져야 상태가 결정 (파동함수의 붕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울러 이러한 관측 행위가 파동함수를 변화시켜 (파동함수의 붕괴) 결과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실험적으로 확인되었다.[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이 완전한 결정론 하에 놓인 세계라는 가설을 과감히 소거하고, 인과율에 의해 부분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영향을 받지만, 인간의 사고가 원인이 되는 행위가 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인간의 이러한 결정 과정의 첫 단계는 문제 상황 직면(facing problem)이다. 문제 상황 직면(facing problem)의 경우, 자유의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우리가 자유의지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설정되어야 할 문제 상황의 방향이 있을 것이다. 가령, 어떠한 문제가 선택지를 근원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학교 식당에서 제공하는 식단이 단 한가지라면, 우리는 식단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상황과 같이 선택지를 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선택할 그 어떠한 자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관한 언급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즉, 당면한 문제에서 적어도 그 문제는 여러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지를 논할 수 없다.

 상황 이해(understand)는 역시 자유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 그 자체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속임수로 독약을 영양제로 생각해 먹은 뒤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의지는 침해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였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독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 독약을 먹는 선택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자유의지가 결여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설령 잘못된 정보가 제공된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결여되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진정한 자유의지의 실현이 방해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은 경우를 상정해보면 더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가 A라는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뒤의 행동이 바뀐다고 하여 A라는 사실을 알기 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결여된 행동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지 않은가? 오히려 그의 행동은 자유의지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잘못되거나 부족한 정보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다시 말해 진정한 자유의지의 실현을 방해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황 이해는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 그 자체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결정(decision)의 경우, 자유의지의 존재 유무를 고려하는 데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의지가 존재하려면 적어도 이러한 행동을 하려는 결정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 이는 노예와 인간의 비교를 통해 여실 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행동이 정말로 인간의 의식적 판단 아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바로 그러하다. 인간 행동의 무의식적인 행동에는 우리의 의식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으니, 인간의 이러한 행동 역시 우리가 주체로서 결정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는 않을까? 그러나, 설령 무의식적인 행동이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정하더라도, 우리의 행위 전체가 무의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 중에는 무의식적인 행동도 있지만 그것이 행동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행동과 더불어 우리는 의식을 갖고 우리의 의식적 결정에 따라 판단을 행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의식적인 행동의 존재를 빌미로 인간의 자유의지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만약 의식적인 결정이라고 믿었던 영역마저 실제로 인간의 의식을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보인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안된 실험이 바로 Libet의 실험이다.

 Libet은 1979년 피실험자에게 두 버튼 중 어떤 버튼을 누를 지 결정하면, 그 시점의 타이머의 숫자를 기억한 뒤 곧바로 버튼을 누르는 실험을 설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실험자의 뇌 전위를 측정하자, 놀랍게도 버튼을 실제로 누르기 0.5초 (550 ms) 전에 이미 뇌에서는 전기 신호가 발생하였고, 우리가 결정하였다고 인지한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2초 전이었다. 이 실험이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앞서 뇌에서 신호가 감지된다는 사실이다.[8]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진정으로 우리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의식적인 결정이란 단순히 뇌의 신호를 늦게 해석하는, 일종의 착각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러나, 실험 자체 설계 결함과 같은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을 갖는 것과, 우리가 그 생각을 갖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10] Libet의 실험은 원천적으로 우리가 결정을 내린다고 인지한 시점을 확인한 것이지, 결정 과정이 실제로 시작된 시점을 확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사고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경세포의 모든 신호를 자각하거나, 항상 자각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가 판단을 했다고 인지하고 있는 시점이 실제 뇌에서 어떠한 전기 신호가 발생하는 시점보다 늦다는 것인데, 명백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우리가 실제로 판단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뇌 속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 중 우리가 실제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는, 즉, 우리가 실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그 단계에 우리가 그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어떤 결정이 이루어지는데 관여하는 모든 신경세포의 전기신호를 인지할 수 있을 때만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기에 Libet의 실험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의식과 무의식이 밀접한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Libet의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것, 긍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대상을 바탕으로 주어진 정보를 처리하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결정이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특정한 문제 상황이 발생하였을 경우 인간은 감정의 선호 아래에서 그러한 문제에 대한 개인의 기준(무의식)에 의해 판단을 수행한다. 그러나 개인적 기준은 아울러, 그 자체가 인간의 결정과 행동 단계를 직접 주체로서 활약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의 의식적 결정 아래에서 승인 (confirm)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11]

 마지막으로 살펴볼 대상은 바로 행위(behavior)이다. 자유의지가 외부로 표현되는 행위(behavior)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결정(decision)에 종속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인간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면, 가령 외부에서의 명령이나, 뇌에 꽂힌 전기신호를 통해 그러한 결정이 이루어 진 것이라면, 그러한 행위가 자유의지에 의해 표현된 행위와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행위는 자유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책임을 수반한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책임 역시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어떠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은 그 행위의 행위자의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상황 이해(understand)나 결정(decision)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2] 여기서의 책임이란 어떤 행위에 대한 비난이나 추궁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없는 경우에 관해서, 다시 말해 상황 이해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문제 직면, 이해, 결정, 행위의 4단계를 중심으로 자유의지를 조명해보면 우리는 자유의지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여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문제 직면 단계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선택지가 제공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정 단계와 행위 단계는 우리가 마련한 판단 기준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하는 경우에만 자유의지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에 따라 우리는 자유의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이 두 가지 이상의 선택지 하에서 개인의 판단 기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때, 다시 말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때 그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행위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분석함으로써 자유의지를 성공적으로 정의하였다. 아울러, 우리는 결정의 단계에 주목하여 우리가 그 전에는 의식과 별개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무의식이 인간의 결정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어떠한 사건을 판단하는데 작용한다는 주장을 구성하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러한 정의에 입각하여 로봇에 대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3) 로봇의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 자유의지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왜 없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로봇이 만약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행동을 보인다면, 다시 말해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행동한다면 우리는 로봇에 대해 자유의지를 부여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결정을 하기 힘들 것이다. 실제로 겉으로 보기에 우리와 같은 형태로 반응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로봇, 또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이 지능이 있다고, 더 나아가 자유의지가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실제로 이를 인공지능이 의식과 지능을 갖고 있는지, 그러한 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수준인지, 혹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한 실험 방법이 있다. 이른바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Turing은 1950년 그의 논문[13]을 통해 질문자가 인공지능인지 모른 채 인공지능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지금 대화를 하는 상대가 인공지능인지 인간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 인공지능은 의식과 지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John Searle의 중국어 방(Chinese Room)을 통해 반박되었다.[14] John R. Searle은 튜링 테스트로는 컴퓨터가 무엇인가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튜링 테스트가 집중하는 특정한 외부 input에 대한 프로그램의 response, 즉 반응을 인간이 판단하여 어떤 프로그램이 인간과 같이 생각을 하고 이해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는 뇌 이외의 기계가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어 방의 설정은 다음과 같다. 외부에서 어떤 방에 들어가 있는,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 가령 우리에게 중국어로 된 질문지를 건네어 주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우리에게는 특정 단어나 문장을 보면 특정한 중국어 단어나 문장을 적으라는 설명이 적혀 있는 한글로 된 설명서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그 설명서를 보고 적절한 답을 작성하여 다시 외부로 답을 건네어 준다. 그 설명서가 완벽하다면, 외부에 있는 사람은 내부에 갇혀 있는 우리가 중국어를 잘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 있는 우리가 정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초등학생을 앉혀 놓고 같은 실험을 한다고 할지라도 초등학생은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그 사람이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아무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방 내부에 있는 어떤 사람을 프로그램, 설명서를 알고리즘이라고 생각해 보자. 설명서는 알고리즘의 역할을 한다. 알고리즘에 따라 중국어로 답을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수행한 프로그램이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어떠할 것인가? 프로그램이 무엇인가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프로그램에는 자유의지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위해 다시 자유의지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그램은 명확하게도 자유의지가 없다. 자유의지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결정을 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만, 프로그램이 알고리즘을 따르는 것은 프로그램 스스로의 결정이라 부르기 힘들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단지 알고리즘, 다시 말해 소스 코드를 작성한 인간의 결정을 따랐을 뿐이다. 앞서의 비유를 통해 다시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예가 주인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유의지가 노예에게 있다고 판단하지 않듯이, 프로그램 역시 인간이 설계한 알고리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므로 프로그램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반박을 한다면 이러한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자율 주행 자동차를 예시로 들어보자. 자율 주행 자동차는 인간이 자율 주행 자동차에 소스 코드의 형식으로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알고리즘을 구성하였기 때문에 교통규칙을 준수한다. 그렇다면 인간 운전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교통규칙을 인간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그러한 규칙은 인간이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 아닌가? 그러한 규칙을 지니게 되는 과정이 코드를 외부에서 입력해주는 것과 무엇이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그것이 단지 외부로부터 입력된 정보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이전까지 받아들인 정보로부터 어떤 것이 적합한 행동인지, 또는 적합하지 않은 행동인지 항상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과 판단에 따라 우리의 의견에 합치되는 것이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해오고는 했기 때문이다. 교통규칙을 지키는 우리의 준법의식은 우리가 그것을 지키도록 프로그래밍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교통규칙을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인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Searle의 중국어 방을 반박할 만한 요소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만일, 로봇이나 기계가 스스로 설명서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러한 로봇에 대하여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는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의 일종인 딥 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실현화 되었다. 앞서 살펴본 프로그램과 딥 러닝은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가?

 프로그램은 우리가 설계한 알고리즘과 우리가 작성한 소스 코드에 따라 특정한 input이 등장하였을 때, 그것을 알고리즘에 따라 처리하여 적절한 output이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에 반해 딥 러닝은 충분히 마련된 데이터 set을 이용하여 스스로의 판단에 필요한 중요 요소를 프로그램 자신이 골라내고 이를 바탕으로 input에 대해 적절한 output을 내놓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가령 딥 러닝이 사용되는 자율 주행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자율 주행 자동차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도로의 차선, 보행자, 그림자, 물체를 인식해내는 일일 것이다. 예시로서 보행자를 분류해낸다고 하자. 프로그램이 카메라를 통해 받아들인 사진에서 보행자를 인지하는 방법을 택하기 위해 딥 러닝 이전의 머신 러닝은 인간이 직접 보행자 사진의 특징을 분류하여 프로그램을 입력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딥 러닝은 자신이 스스로 보행자 사진 여러 장을 분석하여 필요한 요소와 그 값을 직접 결정한 뒤, 그 판단 기준을 바탕으로 보행자가 도로에 나타났는지,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결국, 프로그램이나 기존의 머신 러닝은 인간이 직접 개입하여 어떠한 결과가 나오도록 설계한 것이고, 딥 러닝은 프로그램 스스로가 수많은 데이터 set으로부터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결과적으로 input에 대해 output이 나오도록 프로그램 스스로가 그 값을 얻어내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딥 러닝 프로그램은 인간 행동 양상 4단계 중 2단계인 상황 이해를 정상적으로 수행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3단계, 다시 말해 결정 단계 역시 프로그램이 수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위에서 든 예시에서는 여전히 결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만일 예시를 다음 문단과 같은 방식으로 변경해보면 어떠하겠는가?

 딥 러닝 기반 자율자동차를 대상으로 수 많은 자동차 운전상황을 학습시킨다고 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시도로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자동차가 멈추는 상황을 데이터 set으로 만들어 학습하도록 할 수도 있고, 앞선 자동차가 급작스럽게 멈추는 경우 뒤따르는 자동차가 멈추는 상황을 역시 데이터 set으로 만들어 학습하도록 한다. 이외에도 대단히 다양한 상황에 대해 학습을 통해 운전상황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기계가 스스로 마련하여 운행하도록 한 자동차를 설계하였다고 하자. 이제, 이 자동차가 자율 주행 중에 자율 주행 자동차 앞의 자동차가 급정거를 할 경우, 자율 주행 자동차는 스스로 멈추게 될 것이다. 앞선 경우와는 다르게 인간이 앞 자동차와의 거리가 몇 m 이하가 되면 멈추라는 소스 코드를 입력하지 않았다. 자율주행자동차가 스스로 학습하여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율주행자동차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딥 러닝 방식의 프로그램을 탑재한 로봇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자율주행자동차에 입력한 것이 아니라 자율주행자동차가 데이터 set을 마련하였고, 수많은 데이터를 학습한 딥 러닝 기반 자율 주행 자동차는 스스로 판단 기준을 마련하여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므로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이 논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머신 러닝은 자신이 내리는 어떠한 행위나 교통규칙에 대한 정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데이터 set에서 옳다고 판단한 행위만을 지속해 나가는 것이다. 알파고가 기보를 학습하여 바둑을 두는 행위를 두고 우리는 알파고가 바둑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15] 이해가 결여된 어떤 행위를 두고 우리는 이를 자유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가 자율 주행 자동차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도 자율 주행 자동차가 내린 “결정”이 인간의 판단과 같이 생명에 대한 경각심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output을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딥 러닝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자. 만약 인간의 뇌를 모방한 기계장치를 만들고, 이러한 기계장치가 감정을 바탕으로 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는 기술 수준에 도달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도 여전히 그러한 기계 장치에 대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16]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와 같은 뇌 구조에서 기인하여 우리와 같은 감정 상태를 지니고 있으며, 외부의 상황을 이해하며, 그러한 이해를 토대로 스스로 결정하여 (그 과정에서 무의식과 직관, 감정이 복합적으로 관여할 것이다) 행위에 옮기게 된 경우라면, 우리는 이러한 기계에 대해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초로 논의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로봇과 인간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구분의 한 잣대로서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를 고려해보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명확히 사실로 드러나지만, 로봇의 경우 판단 과정이 어떠한 형태를 갖추는가에 따라 자유의지가 부여될 수도 있고, 아니면 부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논의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과연 로봇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이며, 로봇은 언제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달리 말하자면 로봇이 되어가는 인간은 인간성을 정말로 상실하지 않는지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결론: 로봇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의 최초 논의 시작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즉 자유의지였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유의지 논의를 로봇에 대해 적용해 나가며 최종적으로 뇌를 모방한 기계에 대해 인간과 같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로봇과 인간은 무엇이 과연 다르기에 자유의지의 존재유무가 갈리는 것인가? 우리가 여기서 섣불리, 인간의 뇌와 같은 구조를 가지는 경우에 대해서만 자유의지를 부여할 수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인간의 뇌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자유의지를 판별하고 인간의 본성을 지녔다고 분별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결국, 우리의 논의를 최종적으로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지닐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러한 감정은 우리의 신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17] 그에 따라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의 신체적 조건에서 기원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주어진 호르몬 체계와, 감각 체계, 각 신체 부위, 그리고 이를 총괄하고 기억이 저장되며, 감정이 발현되고, 우리의 의식이 발원하는 기관인 뇌 없이는 우리의 자유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로봇과 인간이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 지닌 신체를 로봇은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차이가 신체 없는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는 셈이다.

 아울러, 우리는 특정한 감정을 가진 것처럼 반응하는 것과 특정한 감정을 실제 가진 것의 차이를 정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트롤리 딜레마[18]를 한번 떠올려 보자. 가령, 우리가 5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등을 떠미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 한 명을 희생하여야 한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의 의사를 반영해 행동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묘사할 수 있는 로봇은 인간과 동일한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하게 어떤 감정을 가진 것과, 감정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본질적 차이는 우리는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최종 논점을 정리할 수 있다.


1) 감정을 지닌 것과 감정을 지닌 것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2) 1)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과적으로 뇌로 대표되는 신체를 지니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대해 볼품없었다고 생각하였던 그러한 관점을 수정하여 우리의 논의를 다시 검토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신체의 관계를 다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딥 러닝 논의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리고, 의식 수준에서 딥 러닝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진정한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인지 다시 검토해보자. 딥 러닝이 진정한 방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보자. 사실, 요소화라는 수단 자체가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어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딥 러닝이 정말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가졌던 것 아닐까? 로봇 역시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데이터로서 학습하면 이를 충분히 ‘요소화’하여 그 나름대로의 방식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이해의 방식은 로봇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새로운 이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딥 러닝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이야기하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앞서 자유의지를 살펴봄에 있어서 책임이라는 것이 스스로의 이해와 결정에 귀속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신체를 통해 자유의지를 다시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이 있다는 논의는, 오히려 책임이 있어야 자유의지를 물을 수 있다는 논점으로 다시 연결된다. 결국, 책임과 자유의지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19]에 있는 개념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책임에서 자유의지가 비롯된다는 관점 아래에 그렇다면 딥 러닝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아래 질문을 통해 다시 의논해보고자 한다.


“실체, 즉 신체가 있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책임을 부여하는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자. 인공지능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기계 장치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 그렇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는 행위를 실제로 수행한 기계장치를 처벌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판단을 내린 인공지능을 처벌하여야 하는가? 당연히 기계장치는 아닐 것이다. 그러하다면 어떻게 인공지능을 처벌할 수 있는가?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기계장치를 인공지능에서 박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인공지능에 대한 처벌인가? 인간은 이러한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체와 정신이 상호연관적으로 묶여 있으므로, 신체에 대해서만 잘못을 묻거나, 정신에 대해서만 잘못을 물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울러 신체와 의식을 분리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행위는 신체와 의식이 같이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실체가 없는 대상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사뭇 자명하다. 그것은 실체 없는 존재는 주위와 물질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이 학습한 방법이 인간에 의해 인위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도 그렇게 이야기하자면 매한가지이다) 인공지능은 인간 식으로 말하자면 의식만 존재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어떻게 실체 없이 의식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에 책임을 묻겠는가? 그렇다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형태, 이를테면 인공지능 탑재 로봇은 어떠한가? 핵심은 그러한 로봇 역시 실체라고 인정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봇 역시 의식과 신체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의의 기계 장치에 의식만 가져온다고 하여 우리와 같은 존재로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의식만을 가져온 존재에게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과연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로봇을 처벌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과연 처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또는 프로그램만 두고 신체를 빼앗는 것이 처벌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대상이 실체가 없다는 것은 처벌에 대한 가능성, 즉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그 가능성을 배제한다.

 아울러, 우리 논의의 최종으로서 신체를 가지는 것이 자아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자. 자아는 자신에 대한 앎 정도로 요약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객관적인 자신(自身) (타인을 통해 바라보는)과 주관적인 자신(自身)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두 측면 모두가 존재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관적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조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주관적 관점에서의 자신(自身)이 없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체를 가지는 것이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신체를 지닌다는 것은 신체와 정신의 분리 불가능성 아래에서 인간의 판단과 결정이 기원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이 생애 순간에서 겪는 주위 환경(surroundings; environment)의 역동적인 변화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신체를 변화시키며, 그것은 인간의 몸이 세포라는 유기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에서 신체는 환경에 적응하여 능동적으로 몸을 변화시킨다. 호르몬의 분비 변화, 대사 과정에서의 다양한 변화는 신체를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한다. 그러한 신체의 변화는 신체-정신 간의 깊은 상호작용을 통해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경험과 감정을 통해 판단체계를 갖추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외부와의 변화와 상호작용은 인간의 신체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 역시 변화시키는 것이다. 결국, 수 많은 환경의 변화 속에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신체와 정신을 갖추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인간은 자신이 환경의 의해 변화해 나간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인간의 어떤 변화에 따라 서서히 변화해 나가며 그와 동시에 수립되어 가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울러, 인간은 수 많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이 갖춘 신체와 정신이 다른 인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신체라는 유기체에서 기인하는 환경 변화에 능동적인 인간은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인 자아를 만들어 나간다. 결국, 인간은 신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변화시킬 실체 그 자체가 없는, 다시 말해 신체가 없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자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변화시킬 실체가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인간은 그에 반해 스스로의 신체를 통해 자아를 가질 수 있으며,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자신 주위의 환경의 변화를 추구한다. 그에 따라 인간은 자신이 추구한 환경 변화에 맞춰 자기 자신을 다시 변화시켜 나간다.[20] 결과적으로 인간은 신체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로봇 마르크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변화할 수 있는 실체, 즉 신체가 구성해내는 자아를 통해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파악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다시 바라보자. 트랜스휴머니즘이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변화가 어떠한 한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인간의 본성을 바꾸어 나가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이러한 세태에 관해 나는 조심스러운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 트랜스휴머니즘이 급격한 인간의 신체적 조건, 지적 능력, 감각적 능력 강화를 추구해 나가는 움직임의 가운데에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신체가 볼품없고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를 비롯해 우리가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이러한 신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오히려 우리의 퇴보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1] 결국, 과학기술의 발전은 불과 3-40년 정도만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이러한 발전이 있기까지 그 과정, 다시 말해 인식의 변화는 수천년이나 소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2] Bostrom, N. What is transhumanism? https://nickbostrom.com/old/transhumanism.html (accessed Dec 14, 2018).

[3] 인간이 가진 직관에 관하여 진화론적으로 많은 논의가 존재한다. 인간이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 인간이 특정 선택을 할 때 익숙함이나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발달했다는 것이다. 결국 직관 역시 감정에 크게 의존한다는 주장이다. 논리적 판단보다 직관이 빠르다는 연구결과는 아이오와 도박 실험을 통해 검증된 바 있다. 이와 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여라. (a) Bechara, A.; Damasio, A. R.; Damasio, H.; Anderson, S. W. Insensitivity to future consequences following damage to human prefrontal cortex Cognition 1994, 50, 7-15. (b) Bechara, A.; Tranel, D.; Damasio, H.; Damasio, A. R. Failure to Respond Autonomically to Anticipated Future Outcomes Following Damage to Prefrontal Cortex Cerebral Cortex 1996, 6, 215-225. 직관과 감정의 연관성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여라. (c) Bolte, A.; Goschke, T.; Kuhl, J. Emotion and Intuition: Effects of Positive and Negative Mood on Implicit Judgments of Semantic Coherence Psychological Science, 2003, 14, 416-421.
[4] 가령, 별다른 고민 없이 행동한다고 한다고 하여 그것을 두고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5] 우리가 노예를 두고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신의 모든 행위의 주체가 노예 그 자신이 아니라, 주인의 결정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6] 양자역학의 발달은 동시에 파동함수에 대한 과학적 의미 부여를 시도하였으며, 그에 따라 파동함수의 제곱이 확률 밀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보였다. 그러한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세계의 어떤 사건을 이러한 확률 밀도를 기반으로 예측할 수 있지 않겠냐는 주장 역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건이 확률적으로 표현되는 순간, 진정한 의미의 결정론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7] 단, 이는 두 물리량 (physical quantity)이 commute하지 않은 경우에 대하여 성립하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으로는 Stern-Gerlach experiment의 내용을 참조.

[8] Libet, B.; Gleason, C.; Wright, E. W.; Pearl, D. K. Time of Conscious Intention to Act in Relation to Onset of Cerebral Activity (Readiness-Potential): The Unconscious Initiation of a Freely Voluntary Act Brain, 1983, 106, 623-642.

[9]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가 이미 완벽히 결정되어 있으므로 인과율에 따라 인간의 결정 역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결정론 하에서는 당연히 인간의 자유의지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10]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 생각 중이라고 인지하지 않는 순간에도 생각한다. 그러다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한다. 

[11] 이러한 주장은 미하엘 파우엔(Michael Pauen)의 “인격적 자유의 최소개념”(Minimalkonzeption der personalen Freiheit)와 연관이 있다. 그에 이론에 대한 논의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여라; (a) 김동현.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자유의지와 형사책임론의 문제 서울대학교 法學, 2010, 51, 269-315; (b) 권수현. 자유의지와 윤리적 책임 사회와 철학, 2008, 15.

[12] 특정 연령 이하의 사람이나 심신미약자의 법률 상 자유를 제약하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를 책임능력의 부재라 부르며, 책임은 범죄자가 행한 불법행위에 대한 추궁, 비난으로, 책임능력이란 개개 행위자가 먼저 자신의 행위가 불법인가 또는 적법인가를 인식, 판단하고, 이어서 불법행위를 결행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한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여라; 한정환, 심신장애와 책임능력, 형사법연구, 2001, 15, 73-94. 

[13] Turing, A. M. 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 Mind, 1950, 49, 433-460.

[14] Searle, J. R. Minds, brains, and programs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1980, 3, 417–424.

[15] 한겨레. AI는 인간을 미워할 수 있을까? 정재승 교수에게 물었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18234.html (accessed Dec 15, 2018).

[16] 중국어 방 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한 Searle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친다. 우리의 정신은 컴퓨터에서 구동되는 프로그램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다. 우리의 뇌 속에서의 의식, 정신 상태라는 것은 기계가 단순히 어떤 기호를 조작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통해 어떤 행위의 지향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뇌가 주어진 생물학적, 생화학적 법칙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뇌와 정신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7] 우리가 갖는 감정에 따라, 활성화되는 신체 부위가 다르며 이를 패턴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를 통하여 확인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조; (a) Nummenmaa, L.; Glerean, E.; Hari, R.; Hietanen, J. K. Bodily maps of emotions. Proc. Nat’l Acad. Sci. U S A. 2014, 111, 646-651; 아울러 신체가 감정 자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그의 한 예시로서 호흡 패턴 그 자체가 특정한 감정 상태를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확인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조; (b) Philippot, P.; Chapelle, G.; Blairy, S.; Respiratory feedback in the generation of emotion Cognition and Emotion 2010, 1, 605-627; 그 이외에도 신체가 감정 상태를 유발하는 것에 관한 증거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c) Van Wingen, G. A.; Ossewaarde, L.; Bäckström, T.; Germans, E. J.; Fernández, G. Gonadal hormone regulation of the emotion circuitry in humans Neuroscience, 2011, 191, 38-45.

[18] 지금부터 우리가 광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광차의 브레이크가 급작스럽게 고장을 일으켜 우리는 진행 선로에 있는 5명의 사람을 칠 것인지, 또는 예비 선로로 열차를 틀어 1명의 사람을 칠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한 경우,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에 관한 질문이 트롤리 딜레마이다. 논의를 복잡하게 하기 위해 1명의 사람이 흉악한 범죄자일 수도 있고, 우리의 가족으로 설정할 수도 있다. 

[19]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와 결정의 단계에만 귀속된, 의식적인 차원에서 만의 문제만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문제와 동시에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20] 최문기, 인간체계의 자기조직화와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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