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동차 노동자 Mar 23. 2021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를 읽고

세계 노동절 131주년을 즈음하여

아메리카 드림의 신화가 산산조각 나고 있다. 코로나 19 약 50만 명,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미국이 세계 초일류국가라는 환상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소련 붕괴 이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며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치던 미국의 위상은 2008 경제위기와 함께 날로 약화했다. 2008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와 미국 지배계급의 무능함과 평범한 노동자 민중들에 대한 고통 전가에 대한 반발로 인해 등장한 트럼프가 인종차별과 혐오를 선동하고 백인우월주의를 부추기며 미국 사회의 모순과 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물론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바이든이 어렵사리 당선에 성공했지만, 미국 사회의 모순과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고 바이든은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버니 샌더스와 민주사회당의 부상은 트럼프의 반동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하는 노동자와 미국 민중의 열망의 한 표현이다. 그런데 샌더스가 바이든을 지지하면서 양당체제로부터 독립된 좌파적 대안이란 희망은 희미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등장은 미국 사회 위선을 폭로하고 이에 맞선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시카고 교사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승리하고 다른 주로 확대되기도 했다. 코로나 19 대응에도 보건, 교사 노동자들은 자신과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저항했고 일부 성과를 얻어냈다. 미국 민중들의 저항과 투쟁이 조명받는 지금 미국 노동운동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있는 이 책 ‘알려지지 않는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읽어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남북전쟁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 노동운동을 생동감 있게 다룬다.

흑인 해방을 기치로 시작된 남북 전쟁에 대부분의 북부 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전쟁에 자원입대한다.  

1862년 11월 뉴욕의 노동자 신문 ‘아이언 플랫폼’ 지는 “4백만의 검은 미국인이 노예 상태를 계속할 것이냐 아니냐는 것뿐만 아니라 흑인과 백인, 남부와 북부를 막론하고 모든 미국 노동자들의 자유와 부자유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호소에 북부 조합원의 절반 이상에 달하는 50-75만 정도가 전장에 나섰다. 이로 인해 전쟁 기간 동안 거의 모든 노동조합이 해체되었다.


수십만 노동자들이 전장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우는 와중에 부자들은 전쟁 특수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1863년 징병법이 통과되자 JP 모건은 마치 밀가루 한 포대를 사듯이 한 젊은이를 300달러에 사서 자기 대신 전쟁에 보냈다.” 그 외에도 존 D 록펠러, 앤드루 카네기, 필립 아머 등등 지금까지 재벌가로 세계의 부를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조상 대부분이 징병되지 않았고 노동자 민중들의 피의 대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거대 재벌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불황이 도래했고 지배자들은 남북 모두에서 노예해방 전쟁의 진보적 성과를 돼 돌리기 위해 불황을 이용했다. 특히 일자리 문제로 흑백 갈등은 조장하며 백인 노동자들의 보수성을 자극하고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 흑인들을 신분만 해방됐을 뿐 실질적인 변화를 억압했고 옛 노예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이때 악명 높은 KKK단이 미친 듯 기승을 부리며 학살과 테러를 자행한 시기다.  


이에 맞서 미국 노동자들은 1866년 미국 최초의 전국노동조합대회를 개최하고 8시간 노동제가 채택되었다. 하지만 전국주물공노조의 창립자 실비스가 제기한 흑인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자는 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실비스는 “우리가 흑인들에게 우리와 공동전선을 펴도록 확신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다면 … … 우리는 우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 … 그것은 월가를 밑바닥부터 뒤흔들게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며 흑인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통과되지 못했고 흑인을 조합원으로 조직하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실비스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흑인과 여성의 노동조합 가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갔다. 여성에 대한 선거권조차 없었다. 이런 시기에 흑인과 여성을 조직하자는 실비스의 주장은 급진적이고 선구적이었다. 실비스의 이런 노력은 훗날 꽃 피우게 된다.



노동기사단, 8시간 노동제,

그리고 헤이마켓 사건

1886년 5월 1일 노동기사단이 조직한 시카고 총파업은 전 8시간 노동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며 미국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때 노동자들은 ‘8시간 담배를 피우고’ ‘8시간 구두를 신고 다니며(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는 회사의 제품을 이용한 것)’  이런 노래를 불렀다.


"일해 봐야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 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
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꽃 냄새도 맡아보고 싶네.
하느님이 내려 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 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장시간 노동에 진절머리 난 미국 노동자들의 저항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이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깡패들로 자경단을 구성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위협을 가하는 한편 노동기사단의 단장 ‘테렌스 파우덜리’를 압박해 파업 하루 전 파업 취소 명령을 내리게 했지만 기층에서 강력히 지지받고 있던 파업을 막을 수 없었다.


5월 1일 시카고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34만 명이 행진했고 19만 명이 파업했다. 이 파업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노동기사단이 보수적 전국 조직인 ‘미국노동총연맹’과 다르게 인종, 성별, 숙련도,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조직했다는 점이다. 흑인 6만 명을 조직해 함께 파업에 나섰다. 앞서 흑인들을 조직하려 애쓴 ‘실비스’의 선구적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파업이 엄청난 규모로 성사되자 조급해진 미국 지배자들은 8시간 노동제와 노동기사단을 분쇄하기 위해 ‘헤이마켓’ 사건을 조작했고 이로 인해 노동기사단의 지도자 파슨즈와 스피어즈를 비롯한 7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6명이 죽었다.


스피어스는 최후진술을 통해 남긴 ‘우리의 목을 매달 수는 있어도 사방팔방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노동운동을 짓밟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언은 미국과 세계 노동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나는 이들 중 유일하게 15년형을 선고받은 니이베의 최후진술이 인상 깊다.

“나는 보았다. 이 도시에서 빵집 노동자들이 개새끼처럼 취급되는 것을 … … 나는 그들이 조직되는 것을 도왔다. 이것이 커다란 죄란 말인가? 이제 그들은 14시간이나 16시간씩 일하는 대신에 10시간 일하게 되었다. 이것도 죄란 말인가? 나는 이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 이른 아침 조원들과 더불어 차를 타고 가며 맥주 양조장의 노동자들이 아침 네 시에 출근해 저녁 7시나 8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대낮에 자기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 … 나는 이들을 조직했다 … … 나는 그들을 충동했다 … … 재판장, 이것이 죄란 말인가!"


사형선고 받은 지도자 파슨즈는

“궁핍과 공포로부터 노예를 해방하라!”

“빵은 자유이며, 자유는 빵이다.”며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나를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다. 듣기 싫다고? 그러나 내 생각을 좀 들어보라 … … 간단히 말해서 나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산의 도구를 자유로이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생산된 물건에 대해 생산자로서 나누어 가질 권리가 공평하게 주어진 사회를 원한다 …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죄인 것이다."


이들의 죽음은 스피어스 말대로 8시간 노동제 요구는 미국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들의 투쟁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이 세계 노동절의 기원이 됐다. 2021년 올해 131주년을 맞이한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노동자들은 지난 131년간 5월 1일 기점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걸고 총파업에 나서는 등 투쟁 의지와 결의를 다져 왔다.



‘보수적’ 노동운동가에서 사회주의자로

유진 뎁스

실비스와 노동기사단의 투쟁 전통은 유진 뎁스로 이어졌다. 1890년 말까지 미국의 주요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총연맹은 여전히 흑인과 여성을 배척했고 직업별 노조가 보편적이었다. 철도노조의 경우 기관사. 신호수, 화차수, 객실 승무원, 열차정비수 등으로 수십 개로 쪼개져 있어 파업의 효과를 상쇄시켰고 자본은 이를 이용해 이간질과 파업 파괴를 일삼았다.

이는 미국 노동조합의 커다란 약점이었다. 19세에 철도 화부 노조에 가입한 유진 뎁스가 처음부터 직업별 노조의 약점을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뎁스는 파업에도 보수적이었다. 뎁스의 전기 작가는 1882년 “뎁스는 파업은 불필요하고 노사 분규는 이성과 타협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하지만 철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계속 공격받자 파업에 나서거나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경험을 하며 보수적이던 뎁스의 의식이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고 직업별 노조가 아닌 산별노조 조직에 애를 썼다. 뎁스의 헌신적 노력과 직업별 노조의 약점을 경험 속에서 의식한 철도 노동자들은 1893년 6월 20일 ‘미국전국철도노조’ 설립하고 뎁스를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조 규약은 흑인은 노조에 가입할 수 없도록 결정됐다. 뎁스는 흑인의 가입을 허용하도록 규약을 개정키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에 그는 흑인을 빼놓은 것이 노조가 패배하게 된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회상했다.


흑인을 포함하지 않는 커다란 약점에도 직업별 노조의 보수성에 염증을 느낀 수십만의 철도 노동자들이 노조에 몰려들었고 미국철도노조는 적지 않은 파업과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전투였던 1894년 ‘풀먼’ 파업이 패배해 약화되고 말았다. 민주당 정부와 자본가들의 경찰과 자경단 연방 군대를 동원해 수십 명을 학살하고 뎁스를 비롯한 노조 지도부를 구속했다.


이때까지 민주당 당원이었던 뎁스는 민주당을 탈당해 이후 사회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돼 4번이나 독자 출마를 한다. 민주 공화 양당 정치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미국에서 노동자 후보로 사회주의 기치를 걸로 4번이나 대선에 출마했다는 것은 현재 미국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다. 특히 마지막 출마는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반전 연설을 했다는 죄명으로 민주당 시도니어 루스벨트 정부로부터 10년 형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 중이었다. 이때 약 1백만 표나 득표했다.


뎁스가 젊은 시절 민주당을 지지하고 파업을 불필요한 파괴적 행위라고 비판하던 보수주의자에서 1차 대전을 반대하고 노동자들의 연대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자로 성장한 것은 미국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에 함께 한 경험 때문이었다. 이런 뎁스의 노력은 1930년 위대한 점거 파업의 시대의 밑거름이 됐다.



세계 여성의 날,

트라이앵글 피복회사 화제

미국 뉴욕의 여성 의류 노동자들 수만 명은 환기 시설도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하루 14시간 노동에도 저임금에 시달렸다. 이들은 “먼지와 악취로 가득한 지하실이나 무너져 가는 셋방에서 가축처럼 엉켜 살면서, 하루 14시간 노동을 하고 도 가족은커녕 자신의 입조차 풀칠하기 어려운 임금을 받고 있었다.” 당시 노동조건을 보면 전태일 열사가 일했던 1970년대 청계 피복 노동자들과 현재 콜센터와 택배 노동자들이 생각나는 건 나뿐일까?

이런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악명 높던 트라이앵글 피복회사에서 1908년 화재가 발생해 145명이 다락방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화재 참사에 분노한 의류 노동자들은 3월 8일 뉴욕 러거스트 광장에서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며 저항을 시작했다.


1909년 뉴욕시 블라우스 공장 노동자 2만 명이 대파업을 벌이며 8시간 노동제와 25% 임금인상을 따내는 성과를 만들어 낸다. 트라이앵글 화재 참사와 이에 맞서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이 세계 여성의 날 제정을 발의했고,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1922년 3월 8일은 혁명 러시아 공휴일로 지정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세계 여성의 날을 공고히 하게 만들었다.



1930년대 위대한 점거 파업의 시대

‘산별 조직위원회’

1차 대전이 끝나고 황금의 시대가 도래한 듯 주가가 치솟자 자본가들은 이윤 증가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미국 지배계급은 제국주의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해 대전의 전리품 챙기듯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수탈하기 시작했고 미국 지배자들에게 황금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듯 기쁨에 애완동물에 액세서리로 다이아몬드를 해주며 흥청망청 소비와 쾌락을 즐겼다.  

이때 보수적이었던 미국노동총연맹은 사측이 조직한 ‘회사 조합’보다 자신들이 사용자의 뜻을 훨씬 더 잘 부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조합비로 주식, 채권,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생활은 녹녹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발달로 토지에서 쫓겨났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언제나 계속될 것 같던 호황이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흥청망청 소비와 쾌락을 즐기던 자들은 그 책임과 대가를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며 게으름을 비난했다.


5,461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농업생산은 5분의 2로 곤두박질쳤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거의 50%나 삭감되고 1,200만에서 1,7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포드 자동차 회사 회장 ‘포드’는 불경기를 “보통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났다며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할 일은 얼마든지 있다”라고 말 한 지 불과 몇 주일 후 공장 폐쇄를 통해 7만 5천 명을 해고했다.


미국 노동자들은 고통 전가에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위대한 점거 파업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 노동자들은 이전까지 직업별 전통에 머물며 파업을 하면 작업장을 이탈해 집에 머물거나 집회를 했다. 이는 파업 대오를 이간질하기 쉽고 파업 파괴자들을 대체 인력으로 투입하는 것도 막기 어려웠다. 반세기 넘도록 이런 전통은 흑인, 여성 등에 배타적이었던 전통과 함께 미국 노동운동의 약점으로 작용해 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전술과 상상력이 필요로 했고 그 결과로 자기가 일하던 작업장과 기계를 점거하고 주저앉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협상을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파업 후 협상을 시작했다. 마치 한국 노동자들이 30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대파업에 나섰던 87년 7, 8, 9월 투쟁이 연상된다. 미국 산별노조위원회의 한 간부는 “ㅇㅇ사업장인데 지금 우리 ㅁㅁ명이 공장에 주저앉아 있다. 와서 도움을 달라” 이런 식의 노조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이렇듯 노동자들의 투지와 자신감이 넘쳤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단호한 점거 파업에 폭력으로 대응했지만, 이마저도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과 공장의 기계가 파괴될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정적 전투였던 제너럴 모터스 노동자들의 44일간의 점거 파업은 미국 자본과 새롭게 조직되고 있던 ‘산별노조위원회’의 대리전 성격이 짙었다. 자본은 파업 파괴를 위해 최루탄, 총, 장갑차를 구입하는 데 수십만 달러를 사용했고 깡패들과 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파괴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단호한 점거 파업과 연대가 이룬 위대한 승리였다. 이 승리로 이때까지 금기시됐던 산별교섭을 승인했고 임금인상을 따냈다. 자동차산업은 물론이고 철도, 철강 등 주요 산업으로 점거파업이 들불처럼 번지며 미국 전역을 요동치게 했고 수백만 노동자가 새로운 좌파 노조인 ‘산별조직위원회’ 새롭게 조직됐다.   



마무리

미국 지배계급은 8시간 노동제 요구와 노동조합과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을 분쇄하기 위해 시종일관 인종, 성차별 등을 이용해 이간질에 열을 올렸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악랄한 탄압을 일삼았다. 1차 대전 때는 독일 간첩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소련 첩자, 공산당의 음모로 매도하며 빨갱이 마녀사냥이 끊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면 깡패들로 구성된 자경단이 폭행과 총질을 일삼았다 거짓 음모를 꾸며 노조 지도자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사형선고를 받게 했고 열성 조합원은 블랙리스트에 올려 취업을 제한했고 주 경계선 밖으로 추방했다. 파업과 저항이 지속하면 연방 군대를 보내 인디언을 학살했던 것처럼, 식민지 원주민 학살했던 것처럼 자국 노동계급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탄압에도 노동운동이 거칠게 분출하면 운동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일시적 양보와 민주당을 이용해 포섭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는 점을 이 책은 잘 다루고 있다.


미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온전히 인정받고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선 한국을 비롯한 여느 나라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피 흘려 투쟁한 계급 전장의 성패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세계와 미국 정세가 심상치 않은 지금 미국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생생하게 잘 정리된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만 이 책에서 뉴딜정책으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대해 무비판적이고 2차 세계대전을 나치에 맞선 해방 전쟁이라 찬양한다. 또한, 스탈린 체제에도 무비판적인 건 아쉽다. 이런 약점 때문에 40~50년대 이후 미국 노동운동과 평화운동을 너무 낙관적으로 본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1850(남북전쟁 시기부터)~1950년의 미국 노동운동은 저자의 지적처럼 미국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를 확립하지 못해 어려움 겪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자의 낙관적인 전망과 달리 미국 노동운동은 60~70년대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고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조직력이 하락했다. 이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한국 노동운동이 보수우파의 부활을 우려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강력하고 전투적이었던 미국 노동운동이 자본가 정당의 한 부류인 미국 민주당에 포로가 된 후 시들해지고 힘을 잃어간 점은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위기의 자본주의 코로나와 경제 위기 노동운동에서 대안을 찾고 싶은 이들은 131주년 세계노동절을 앞둔 지금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