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숨

13화

by 송필경

공간은 눈을 감은 채 속삭인다.
스스로 영원이라 믿는 얼굴로
나를 조용히 둘러싼다.
그러나 낙엽 하나, 가벼운 금이 스며들면
시간은 말없이 다가와
그 영원의 표면에서 천천히 광택을 벗겨낸다.
시간이란 결국 공간의 적,
모든 면을 침식하는 느린 파도다.

세상은 이미 성질을 잃은 파도처럼
끊어지고, 다시 밀려온다.
겹겹의 가림막 속에서
저편의 빛조차 더듬을 수 없을 때,
나는 생각한다.
영원이란 소멸의 문턱을 건너야만
드러나는 얇은 빛인지도 모른다고.
소멸의 붓끝이 지나간 자리마다
햇빛 속 페인트는 조용히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

남산외인 아파트가 폭파되던 날,
짧은 굉음이 오래된 시야의 벽을 찢었다.
가려져 있던 남산의 기척이 서서히 드러나자
공간은 묵묵히 숨을 들이켰고,
그 확장된 자리 위로
세월은 느린 결을 눌러 새기기 시작했다.

극장 간판을 채우던 얼굴들은 이미 지워지고,
붕괴의 먼지를 헤치며 떨어져 나가던
노인들의 그림자가 문득 떠오른다.
그들은 시간의 칼날을 어떻게 통과해 왔을까.
무너진 장면들과 지워진 이름들 사이에서
어떤 희미한 등불을 품고
시대의 낙진을 버텨냈을까.

나는 지금 이 공간의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다시 밀려드는 시간을 맞으며
주름진 손에 펜을 꽉 쥔다.
이 작은 기록 하나만이라도
심연의 파도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기를.
공간이 내게 속삭이던 그 영원은
아마도,
떨리는 문장 한 줄의 숨결로
지금 내 앞에서 아주 미세하게 깜빡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