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시작한 계기와 축구선수로 지내온 청소년기
나의 유년시절은 항상 밖에서 뛰어놀고 있었고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만화를 봤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바깥에서 하루를 보냈었다.
그만큼 축구를 좋아했고 재밌었다.
유치원 때는 축구 대회를 나가 우승을 하였고 인터뷰도 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영상은 찾고 싶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YMCA에서 주말 취미반으로 항상 혼자 버스를 타고 축구를 하러 나갔었다.
조그만 몸에 큰 축구화 가방을 손에 쥐고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하기 위해 항상 가벼운 발걸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축구선수로 가게 되는 정석의 코스를 밟게 될 줄 몰랐었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나는 친척들과 눈싸움을 하고 할머니집에 들어왔는데 아빠가 대뜸 나에게 축구선수를 권유했다.
"00아 너 축구선수 할래?"
"응!"
"근데 수원에서 해야 해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살아야 하는데 괜찮아?"
"응!"
"대신 너 입에서 그만둔다는 말은 나오면 안 돼"
"응!"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모든 질문에 YES로 대답하였다.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친구, 부모님을 몇 개월을 졸라서 시작한 친구 등 많은 케이스가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축구를 너무 좋아하는 나에게 부모님께서 먼저 권유를 해주셔서 다행이기도 하고 행운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사한 것 같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 나는 경기도 수원의 한 초등학교로 전학준비를 하였고 전라남도 광주에서 경기도 수원으로 나 혼자 타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버스를 타면 3시간 반정도 걸리는 먼 곳이었지만 드디어 축구를 제대로 배운다는 설렘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는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도 같이 시작되었다.
단지 축구가 좋아서 가족과 친구들을 내팽개치고 혼자 어떻게 올라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기가 대단했던 것 같으면서도 두려움보다는 축구로만 가득 차 있던 내 마음을 더 움직였던 것 같다.
내가 축구를 전문적으로 시작한 나이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합숙생활이 시작되었고 코치님과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5, 6학년 형들과 같이 생활을 하였다.
우리의 숙소는 정말 열악했다.
추운 겨울 따듯한 물과 온기 가득한 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숙소에는 등유난로가 하나 있었는데 난로 하나에 5~6명이서 의지를 해야 했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옹기종기 붙어있으면 잠은 청할 수 있는데 도저히 찬물로는 샤워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등유난로와 버너 위에 끓여 뜨거워진 물을 찬물에 넣어 온도조절을 한 후 큰 양동이에 담아둔 물을 형들은 항상 막내인 나를 먼저 씻겨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 형들만큼 잘 챙겨주고 진심으로 대해줬던 선배들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숙소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감독님의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감독님께서는 무슨 이유였는지 월세와 관리비를 내지 못하셨다. 회비는 꼬박 잘 냈는데…
위에 언급한 것처럼 등유난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몇 개월 뒤 결국 숙소생활을 하던 형들과 나는 떨어지게 되었고 몇 명씩 다른 곳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나를 잘 챙겨주던 형들은 학교 운동장에서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같은 팀 선배 집, 감독님 집, 코치님 집을 몇 달간 돌아가면서 얹혀살게 되었고 살면서 먹을 눈칫밥을 이때 다 먹었다.
감독님 집에서 잠시 얹혀살았을 때는 옥탑방에 있어야 했다.
"오늘 저녁 뭐 먹었어?"
"단무지랑 김치!"
지금도 엄마와 이 시절을 이야기하면 이 통화내용이 주를 이룬다. 내 반찬은 항상 단무지와 김치만 나왔던 기억이 난다. 고기반찬 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재워주고 먹여주는 곳이 있었기에 나는 축구를 할 수 있었다.
한 번은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여느 때처럼 옥탑방으로 돌아갔다. 평소 항상 문이 열려 있었는데, 열쇠가 없었다. 몇 시간을 기다린 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집 앞에서 비를 피하며 한참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 커서 생각해 보면 미리 열쇠를 받아두는 것이 당연한데, 어린 나이인 탓에 그러질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에는 이렇게 같이 얹혀살던 형들, 코치님과 같이 모텔방에서 지냈었는데 나는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어린아이가 혼자 모텔로 들어가니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매일같이 신경 쓰였다. 게다가 모텔 근처에 식당은 기사식당 한 곳이 전부였는데, 부모님들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우리의 식사비를 선지급해 두셨었다. 그 탓에 항상 아침은 한 가지 고정메뉴, 바로 식당에서 파는 선지해장국이었다. 이름 그대로 해장을 하시는 아저씨들 틈 사이에서 우리 아빠보다 선지해장국을 더 많이 먹었다.
한참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하고 좋은 영양소를 섭취해야 할 나이이지만 나는 그런 건 꿈꾸지 못하였다.
그래서 몸은 항상 빼빼 말랐었고 얼굴에는 버짐이 피기 일쑤였다. (이때 잘 먹었으면 키가 더 컸을 수도..)
그래도 이런 열악한 환경도 나의 축구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학교에 등교를 하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친구들과 축구경기를 하였고 학교가 끝난 후 팀훈련이 있기 전까지 축구공을 내 몸에서 떼어내지를 못할 만큼 축구가 좋았고 전부였다.
이때에 난 스마트폰과 유튜브가 없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밖에 뛰어나가 놀기를 좋아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레 나 자신이 공을 차는 걸 좋아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 어린 시절 나의 꿈도 축구선수가 아닌 유튜버가 되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축구시합만 하는 건 당연히 즐거웠지만 축구부의 훈련은 시합만 하지 않았다.
시합을 뛸 수 있는 체력운동은 기본이며 리프팅, 기본기, 드리블, 패스 등 다양한 훈련과 상대팀에 맞추어 팀 전술 운동 등 강도 높고 많은 훈련을 해야만 비로소 축구선수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기 전 결국 우리 팀은 해체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그냥 받아들여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팀 내의 재정난이 문제였던 것 같다. 초등학생인 나는 별다른 이유를 듣지 못한 채 다시 짐을 싸며 전학을 가게 되었다.
팀 해체로 갈 곳이 없던 나는 아빠와 함께 본가인 광주의 한 초등학교 축구팀으로 테스트를 보러 가게 되었다. 당시 테스트는 별 거 없었다. 지도자들은 선수가 한 경기를 뛰어보면 이 선수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판단이 다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테스트에 합격한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고 새로운 팀에서는 내가 상상도 못 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따랐다.
바로 팀 성적에 따른 고통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성적을 못 내면 체력운동을 시키고 구타를 하는 거지? 배운 게 그거밖에 없나? 지도자 자격증은 어떻게 취득한 거지? 본인들의 스트레스를 왜 어린 우리한테 푸는 거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축구를 했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거다.
시합을 뛰기 전 정신 차려야 한다며 폭력, 전반전이 맘에 안 들어서 폭력, 후반전은 전반전처럼 왜 안 했냐며 폭력 정말 온갖 이유를 찾아서라도 폭력과 욕설을 퍼부었다.
체력운동도 어마어마했다. 근력도 없던 초등학생들을 매일같이 체력운동을 시키니 무릎연골이 남아나질 않았다.
가끔씩 부모님 집에 가면 한의원을 가기 바빴고 앉아서 무릎을 필 수 조차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당시 SNS가 활발하지 않았던 게 참 아쉽기도 하다.
이전 학교에서 선배들이 먼저 챙겨주곤 했던 온기는 이곳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했다. 그 당시의 형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결혼식도 가곤 한다.
숙소도 지원되고 밥도 훨씬 잘 나왔지만 마음만은 따듯하지 못했다.
심한 구타와 체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축구를 그만하겠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떤 생각으로 버텼는지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축구가 좋았고 축구하는 게 가장 행복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비교적 무탈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진학한 중학교도 초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팀 성적을 중요시하는 학교였기에 매 해마다 팀 성적이 좋아야지만 1년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팀의 성적을 위해 축구를 시작한 게 아닌데 자꾸 나 자신의 축구가 아닌 팀 성적을 좋게 내는 것만을 위해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공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성적을 막론하고 나 자신이 아닌 부모님의 만족감을 위해 억지로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과목이 좋고 재밌어서 즐기면서 학업을 하는 사람들 간의 행복 지수는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가치관을 깨달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더욱이 그 나이에는 아직 성숙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감독님께 혼나지 않기 위해, 성적만을 생각하며 시합을 뛰고 있는 그 방향이 맞는 것인 줄로만 알았고 진정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한 더 나은 방안을 찾지 못하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의 발전이 아닌 팀의 성적을 위해 뛰고 있었고 어느새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갈림길에 섰다.
전주의 고등학교와 인천의 고등학교를 두고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
두 학교는 고맙게도 나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해준 학교들이었다. 모두 괜찮은 곳이었지만, 당시 서울로 이사했던 부모님 집과도 가깝고 내가 좀 더 원하는 학교인 인천의 고등학교로 선택을 하였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고등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주장을 맡았다.
나는 A형으로 매우 소심한 성격이어서 주장을 맡아볼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매번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내 성격에는 맞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했고 어렸을 적부터 주장인 형들을 보며 힘든 위치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썩 내키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3학년 형들과 주장의 의견을 바탕으로 차기 주장이 정해졌었다.
내가 1학년때부터 형들 시합을 출전했던 경험과 운동장 안팎으로 성실했던 모습이 크게 플러스 요인이 된 것 같다.
소심한 성격 탓에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에 부모님께서 성인이 되기 전 주장의 역할을 해보는 것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근데 나는 카리스마가 없는데?”
“꼭 주장이라고 해서 무섭게만 하는 게 아니야, 너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팀을 이끌어 가보는 게 어떻겠니?”
난 보스가 아닌 리더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나 부모님께서는 소심했던 내 성격을 아시곤 100점짜리 조언을 해주셨었다.
아직까지도 나는 내 고민에 대해 부모님과 자주 상의 하곤 한다.
그렇게 부모님께서 해주신 100점짜리 조언 덕분에 나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돈을 주고도 못 바꿀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합숙생활 당시 저녁 9시가 되면 주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핸드폰을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밥을 먹은 후에 자기 전까지 잠깐의 시간 동안 핸드폰을 돌려받고 사용할 수 있었다.
핸드폰 반납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평소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6시쯔음 우리는 핸드폰을 반납받고 사용할 수 있었는데, 지방 원정을 다녀오거나 하면 차가 막힐 수 있으니 그 저녁식사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핸드폰 받는 시간도 늦어지니 우리는 원정을 다녀올 때마다 교통체증이 불만이 곤 했다. 항상 안전운행을 해주셨던 버스기사님께서는 우리의 애가 타는 마음을 모르셨을 것이다.
게다가 3학년부터 순차적으로 밥을 먹는 것이 국룰(축구계에서는 국룰이다.)이었는데, 1학년은 밥을 제일 늦게 먹기 때문에 핸드폰을 할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낙이 저녁시간 이후 잠시 핸드폰을 만지는 것인데..
3학년인 나는 이럴 때마다 3학년을 구슬려 가며 1학년이 얼른 밥을 먹고 핸드폰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곤 했다.
그리고 또 주장의 역할은, 새벽운동 때 주장인 내가 항상 모든 팀원을 깨워주는 것이었는데 유난히 잠을 깨지 못하는 친구들은 등짝을 때려가며 깨워주곤 했다. 이 외에도 운동시간과 식사시간을 전달해 주며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외출을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팀원들에게 대회나 시합 전 팀의 동기부여를 심어주어야 했던 것과 동시에 팀의 공격수였던 나는 매 경기가 내 발끝에서 승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은 팀이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에게 크게 혼났던 일이 있었다. 분명 다득점으로 승리를 해야 하는 전력의 팀인데 1:0으로 이긴 시합이었다.
경기결과를 떠나서 감독님은 우리 팀의 정신상태에 대해 크게 혼내셨는데 주장을 필두로 많이 꾸짖으셨다. 이겼는데도 혼이 나야 하다니.. 나는 서러움이 폭발해 감독님 방에 쫓아가 울면서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속이 풀리시나요 감독님!!"
그렇게 1년간 주장의 경험을 통해 힘들었던 점도 많았지만 배운 점도 그 못지않게 많았다.
가장 큰 부분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했다. 개인이 아닌 단체생활에서의 협동심과 희생정신을 배웠다. ‘나만 잘하면 돼’가 아닌 팀이 잘해야 했기 때문에 항상 팀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했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는 시야가 생겼다. 그리고 운동장 안팎으로 리더십을 발휘해야 했던 것, 때로는 냉정한 조언과 함께 한편으론 따듯한 조언도 해줄 수 있는 그런 리더가 될 수 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까지의 나의 유소년 축구선수 스토리는 사실 열악했고 힘든 시절임이 맞지만 그 안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 같다.
한 편으로 담아내기에 아까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수북이 남아있다.
따뜻하기도 하고 냉철하기도 했던 나의 값진 경험들이 훗날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 스토리를 풀곤 하지만 나는 실패의 경험을 이야기할 예정이다.
사람들마다 실패의 기준이 다르지만 나의 스토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공감과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