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ED Nov 16. 2021

사랑 앞에 솔직함이란

영화 '클로저' 리뷰

 영화 클로저를 봤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것만 같은 결말인데, 너무 슬펐다. 어떤 사랑도 완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끝도 시작도 아닌 느낌. 이별한 사랑은 파편으로 남아 아마 한동안 모서리가 둥글어질 때까지 굴러다니며 가슴속을 헤집고 후벼 팔 테고, 이별하지 않고 다시 만난 사이라도 이미 어긋난 모양을 억지로 맞추려다 오히려 서로 긁고 긁히며 생채기만 낼 것 같아서, 모두가 불행한 느낌이었다. 불행하단 것도 내 시점에서 맘대로 재단한 그들의 결말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장면은 다들 깨진 유리 조각 위를 밟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결국 속죄하는 이들의 운명인 것 같았다. 안나와 래리는 결국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제인(앨리스)과 댄은 각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이미 깨져버린 신뢰 앞에 믿음 없는 결혼 생활을 제정신으로 지속할 수 있을까? 래리에게 있어서 신뢰는 몸을 주지 않는 것, 안나에게 있어 신뢰는 솔직해지는 것. 안나는 댄을 사랑한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의 죄책감을 상쇄하려는 목적으로 우선 래리를 용서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용서했다는 어휘를 쓰면서도 과연 이게 1년이나 속인 파렴치한 불륜녀에게 합당한 언사일까 생각이 든다. 래리도 물론 비슷한 죄질을 가진 데다 기간의 차이로 크기를 판가름할 수 없이 상대에게 못할 짓을 했단 사실은 둘 다 똑같은데도 말이다. 래리는 안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춘부와 몸을 섞었단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안나는 아마 사랑없이 몸만 섞었다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믿을 수 없는 사랑이 주는 아픔이 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만 살아가면 이성 앞에 섰을 때 무참히 무너진다. 사랑하냐 안 하냐의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어떤 말을 하든 거짓이 되어버린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은 거짓이며 믿고 싶은 거짓은 진실이 된다. 사랑이 이토록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바보가 되더라도, 바보인 채로 곁에 남고 싶은 게 진정한 사랑은 아니어도 가장 솔직한 사랑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댄과 래리(남자 주인공들)는 상대의 바람을 알게 되었을 때 육체적인 교감의 여부에 집중하는 듯 보였다.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정말 잤어? 여기서도 했어? 나보다 잘해? 느꼈어? 같은 내용들로, 진정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냐는 물음보다 육체적인 관계 여부로 사랑을 판단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여자가 앞의 질문 중 하나라도 긍정의 대답을 한다면 쐐기를 박는 셈이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의 간극이 또렷해진다. 여자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고 남자는 몸을 주지 않았으면 결국 사랑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안나와 제인(여자 주인공들)은 정신적인 교감을 더 중요시 여겼다. 다시 말하자면 두 성별 간에 사랑을 확인하는 기준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제인(앨리스)과 모르는 안나의 대처방식은 같은 상황에 당면했을 때 확실히 달랐다. 안나는 자신이 사랑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정신적 교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육체적 관계에 덜 의미 부여할 수 있었고 그래서 가볍게 여길 수 있었고 솔직해지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본인의 기준에서 생각한 안나는 쉬이 댄에게 오기 전 래리와 관계를 가졌음을 말해버린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고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댄의 반응은 안나의 의도를 따라주지 않았다. 사랑하든 안 하든 몸을 주었단 사실에 댄은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화를 내고 끝을 말했다.

 반면 제인은 끝까지 댄에게 래리와 잤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했다.(어떤 게 진실인지는 구체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아 관객조차 모른다.) 댄이 제인의 말을 듣기도 전에 래리의 말 한마디(제인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말)를 곧이곧대로 믿고 제인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댄이 굉장히 언행이 불일치하는 모순적인 사람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랑한다면서 이해한다면서 이미 마음속에 정해둔 거짓을 믿을 심산으로 기어코 그녀의 입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같은 거짓)이 나올 때까지 집요하게 되묻는다. 내가 왜 '진실(같은 거짓)'이라고 했냐면, 앨리스가 래리와 클럽에서 만났을 때 관계를 했다는 직접적인 묘사는 화면에서 보여주지 않았다. 관객인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댄 앞에서 내뱉은 제인의 고백 한마디뿐이었다. 난 이게 제인이 결국 진실을 말한다기보다는 거짓이더라도 댄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마지못해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댄은 기어코 제인의 입에서 래리와 잤다는 말을 들어내고야 만다. 그제야 들을 말을 들었단 듯이 안도하고 그녀를 시험했음을 실토한다.

 왜 댄은 앨리스보다 래리를 더 믿었을까. 래리는 왜 안나가 댄과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안나보다 댄이 더 이해된다고 말했을까. 감정의 교류보다 우선 몸을 얻고 나면 이미 정복한 듯한 우월감을 느낌을 서로 은연중에 공감하기 때문이었을까.



 제인이 진짜 자기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해주는 데도 래리는 앨리스만이 그녀의 진짜 이름 이리라 생각하고 그 이름을 듣기를 원했다. 자꾸 가면을 벗으라고 했는데 이미 벗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거였다. 진짜 이름은 래리에게만 알려준 것이기 때문에 댄보다 래리에게 오히려 더 솔직했단 건 제인만이 알고 있었다. 전시회에서도 그렇다. 제인이 래리에게 말했다. 자신의 슬픈 얼굴을 사진은 너무 아름답게 찍었고 아름답게만 보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을 찬양할 뿐이지 그 슬픔의 깊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댄은 사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칭찬했다. 댄은 자신이 쓴 소설 속 등장인물인 앨리스를 믿고 싶어 했고 눈앞에 보이는 제인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제인은 말했다. 자신의 얘길 담은 소설은 통 거짓이라고. 부장의 죽음으로 승진하여 부고문을 쓰지 않게 된 댄의 소식은 끝까지 그의 작가로서의 무능력함을 강조했다. 끝까지 보는 눈이 없던 거지. 이미 더 솔직해진 이가 댄이 아닌 래리가 된 이상 몸을 섞지 않아도 이미 정신적으론 바람을 핀 셈이나 다름없다고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댄에겐 보이지 않은 진실함을 래리 앞에서 보였으니.



 사람은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받아들인다.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매번 사람을 시험하기도 하고 사랑의 크기를 저울질하기도 한다. 대체로 답은 정해져 있다. 단지 확신해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솔직해도 믿어주지 않으면 거짓에 불과하며 거짓일지라도 믿고 싶은 거라면 기어코 진실로 믿어버린다. 나를 불신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건 타인이 아니라 나다.



 사랑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고 듣는 걸로는 공허해라는 대사가 와닿았다. 사랑을 주는 방법은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 기준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의 형태로 전해주는 사랑은 상대에겐 온전히 닿지 않는다. 줄 땐 받을 사람에 맞게 다듬어서 주어야 한다.



제인은 단정한 단발머리일 때가 가장 거짓스러운 사람인 채로 살아간 모습이었을까. 래리는 가짜 겉모습 속에서 솔직하고 싶어 하는 그녀를 꿰뚫어 본 걸까. 역설적이게도 스트리퍼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제인(앨리스)이 가장 사랑 앞에 순수해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내 삶에서 조연이 되지 않으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