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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실 Dec 12. 2022

조씨의 벌초

미니픽션 시리즈2

추석을 보름쯤 앞둔 날, 한 남자가 벌초(伐草)하고 있다. 아직 한낮은 덥다. 오전에 시작된 벌초는 정오가 지났는데도 아직이다. ‘조씨’로 불리는 그 남자는, 벌초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취해있었다. 벌초 중에도 병째 술을 들이켜던 그는, 이제 아예 무덤 옆에 누웠다. 야트막한 산 능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하늘이 눈에 든다. “더럽게 퍼렇네.” 늦여름의 하늘은 한 뼘 더 올라선 모습으로, 구름도 여유롭기 짝이 없다. 이제는 덩치를 키우기보다 멋들어지게 뭉쳐 모양을 내는 기교가 한창이다. 늦여름의 하늘과 구름은 늘 남자를 설레게 했다.

훨씬 선선해진 조석(朝夕) 기온에 몸에 활기가 두어 바케쓰 더 충전된 것 같았고, 입체적으로 변한 하늘과 구름은, 먼 곳을 향한 갈망을 충동질했다. 해 질 녘 서쪽 하늘가가 불러일으키는 쌀쌀한 그리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뭉게구름이 다 흐른 곳, 너무 일찍 잃어버려 알 수는 없지만, 늘 그리운 그것들이 있을 것 같았다. 한달음에 뛰고 달려 닿을 수 있는 곳에, 오랫동안 기다렸다며, 푸근히 안아주는, 속 깊은 눈빛의 누군가가 서 있을 것 같았다.    

 

계절은 이내 지나고, 퍼석한 가을 공기로 담담해지기가 수년 반복되었지만, 추석을 앞둔 늦여름의 하늘에는, 늘 묘한 설렘이 찾아들었다. 그렇지만 조씨는 단 한 번도 그 고장을 떠나지 못했다. 소년이 청년이 되고, 장년과 중년을 거치며, 조씨는 이제는 한 줌에 잡힐 듯 작아진, 어머니의 가장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조씨이다. 조실부모하고 피붙이 하나 없이 남의 집 일을 하며 자란 그녀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싹싹했다. 삯바느질 솜씨도 제법인데다 밭일 품을 팔 때도 손이 빠르고 여간해 쉬지 않아, 농사일, 집안일 가리지 않고 불려 다녔다. 최씨 당주(當主)가 그녀를 처음 본 곳도, 제수(祭需) 준비가 한창인 서원(書院)지기의 마당이었다.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 종손(宗孫)으로서 종중(宗中) 어른들과 제사 지낼 사우(祠宇)를 둘러본 후 서재(書齋) 쪽으로 향하던 그는, 한창 묘사(廟祠) 준비 중인 무리 가운데, 다람쥐 같기도 하고 종달새 같기도 한 검은 머리채의 처녀가 유난히 깊게 눈에 드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 떠받들어 주는 가문에서, 너무 일찍 호주(戶主)가 되어,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본 적 없는 그였으나, 그렇다고 잡놈처럼 놀아본 적도 없었다. 더욱이 그에겐 사촌 누이들까지 포함하면 열 명의 누이들이 있고, 아내도 둘이나 됐다.     

 

그린 것 같은 진한 눈썹에 길고 깊은 눈, 두툼한 입술에 큰 키, 늘 단정한 매무새에 과묵하고 단정하기 그지없는 그는, 근동(近洞)의 땅 대부분을 소유한 崔씨 가문의 당주였다. 하지만 출타와 교류마저 삼가며 사랑채에 머물던 그가 가까이했던 건 서책이 아니라, 서예였다. 누구보다 우아하고 섬세하게 필체를 발휘할 수 있으나, 글 읽기와는 진즉에 멀어진 그였다. 그래서였다. 남자들이 일찍 죽고 없는 집에 거의 유일한 남자로, 과도하게 낯을 가리고 과묵한 그였으나, 어른 대접을 받기 시작한 후 할머니께 제일 먼저 한 요청이 바로, 글선생을 끊겠다는 거였다. 글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사고가 느려지고 굳어진 것은 어쩌면, 일찍 호주가 된 그의 어깨를 누르는 그 수많은 기대와 소망들 때문이었다. 점차 더 느려지고 굳어진 그는 어느덧 그림 같은 외모와 풍채처럼, 실제로 정물화처럼 살고 있었다.      


조씨 처자에게 낯선 욕정을 느낀 그 날도, 그는 저녁으로 닥친 묘사에 쓰일 제문을 마름에게 건네며, 나지막하고 느린 당부를 전하는 중이었다. 부인들과의 동침일도 점쟁이에게 미리 받아 따라야 했던 그에게, 여인을 소망하거나 성욕을 느끼는 경험은 드문 것이었다. 그래서 묘사를 마치고 사랑채에 앉아, 낮에 본 그 처녀, 자신과는 달리 어쩌면 그리도 가볍게 종종 걸으며 오가던 조씨 처녀 모습을 놓지 않으려는 자신의 설렘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목침을 이리저리 바꿔 베며 계속 뒤척이던 그 밤이 지나고, 그는 그답지 않은 과감함을 발휘해, 하인을 보내 그녀를 불러들였다.     


사랑채에서 몇 번을 만났으나, 부인들을 비롯해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까지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쉬쉬했다. 너무 익숙해 아무런 감흥 없던 집 안의 당주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자각되며, 굳었던 그의 등과 목이 좀 펴지는 것 같았다. 가문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여인들의 치마폭에 손과 발이 다 묶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실 아무런 할 것도 할 필요도 없던 그에게, 운신할 조그만 공간이 생긴 것이다. 조씨 처녀와의 한 계절 동안 그는 처음으로 그 자체일 수 있었으나, 오래 가진 못했다. 익숙하고 익숙한 그의 자의식이 어느덧 사람들의 사소한 눈짓과 말투에서, 구겨진 자신의 체면과 평판의 기미를 찾아내고 만 것이다.     


조씨 처녀는, 붉은 입술의 최씨댁 서방님에게 사실 아무런 언약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들 낳길 기도했다. 두 부인에게 아직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고, 자신의 아이를 그림 같은 풍채에 점잖은 품성의 그의 호적에 올림으로써, 피붙이 하나 없이 물풀처럼 떠도는 자신의 마음도 이제는 붙들어 매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씨 처녀의 마음은 사실 이미 최씨 집안에 묶여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최씨 가문이 그녀의 아들을 호적에 올려주기는커녕, 생계마저 모른 척 했는데도, 끝내 그녀는 재가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물려주고, 평생 아들과 둘이 살았다. 유난히 바지런하던 몸매는 이제 바스러질 듯 더 마르고, 일을 너무 많이 한 그녀의 등은 활처럼 굽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자신의 한과 설움을, 어머니는커녕 누구에게도 묻거나 따지지 않는 속 깊은 아들이 있었다.      


큰 키와 풍채뿐 아니라 묵하고 진중한 것도 아비를 닮았다. 겉으로 뱉지 않고 안으로 품은 말들이 늘어날수록 아들의 눈빛은 더 깊어졌다. 흘리지 못한 한 섞인 감정을 가득 담은 그 눈은, 햇살 아래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평생을 조씨로 살며, 단 한 번도 최씨 가문을 찾지 않았던 그지만, 일 년에 한 번은 꼭 최씨 가문의 선산을 찾는다. 잔뜩 취한 채였지만 벌초를 깔끔히 끝낸다. 무덤 옆, 밀짚모자를 덮고 누운 그를, 먼발치에서 누가 봤다면, 가을날 촌부의 유유자적한 풍경이려니 했을 것이다.     


떠가는 구름, 환장할 듯 높은 하늘. 하지만 밀짚모자 아래로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은 땀이 아니라 눈물이다. 평생을 입 밖에 내지 못한 한이, 일 년에 한 번 최씨들의 무덤가에 흐르고 흐른다. 정물화 같이 살며 비정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인 그, 최씨 당주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그가 최씨임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동네에서, 평생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조씨라고 불리운 삶에 대한 서러움이었을까. 존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이었을까. 한 번은 찾아주겠지 하는 기대가 너무 오래 묵어 지칠 대로 지친 좌절이었을까. 고상한 양반네들의 허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성과 부도덕함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에도, 벌초를 통해 잠시라도 뿌리 있음과 그들에의 연결을 확인하고 싶은, 자신의 알량한 관습성에 대한 경멸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무덤가에서 통곡하게 하는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다만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 않은 최씨 당주와는 별개로, 어느덧 최씨 집안의 벌초는, 조씨인 그가 늘 하는 일이 되었으며, 먼발치서 벌초하는 그를 보던 사람들은, 그 한 많은 벌초에서 문득 자신의 깊은 곳에도 묻혀 있는, 저마다의 긴 이야기와 한을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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