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영화 <헤드윅>

by Jieun

영화 <헤드윅>을 보게 되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인 헤드윅의 전기 영화로서 헤드윅의 일생을 조명하고 트랜스젠더로서 살아가는 헤드윅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퀴어적 요소와 더불어 이 인물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사랑이 고픈 사람의 모습은 사랑받기 위해 어떤 일도 굴하지 않고 한다는 점에서 헤드윅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인간은 사랑을 하고 싶어 하고 받고 싶어 한다. 드라마나 영화, 책 속에도 빠지지 않고 존재하는 요소는 바로 사랑이 존재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을 배고픔 또는 목마름과 같은 동물적 욕구의 일종으로 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행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느끼고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르는 것처럼 인간은 항상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비평의 주제를 사랑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삶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 헤드윅의 메인 테마인 ‘Origin of love’를 통해 헤드윅의 인생을 통해 사랑과 퀴어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 이 노래는 사랑의 기원에 관한 노래이다. 헤드윅의 어머니가 해 준 이 이야기는 헤드윅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화는 이 노래를 바탕으로 헤드윅의 사랑이 시작된다. ‘Origin of love’는 플라톤의 ‘향연’ 내용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야기이다. 사랑이 없던 그때에 세 개의 성이 있었는데 두 명의 등이 붙어 있고 얼굴 두 개, 팔다리가 네 개. 다른 기관들도 두 쌍씩 있었고 같은 성끼리 붙어 있거나 남녀가 등이 붙어 있는 것처럼 생겼었다. 둘이 하나이기에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외로움이나 다른 어려움에 대해 알지 못 했다. 그래서 신들은 그들이 강해지는 것이 두려웠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제우스가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쳤다. 붙어 있던 그들은 반으로 갈라졌고 인도의 신이 그들의 잘못을 잊지 않기 위해 상처를 하나로 모아 꿰매었고 그것은 배꼽이 되며 그들은 자연재해로 인해 세계로 흩어지며 사랑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으며 사랑은 우리의 영혼 속 고통, 갈라지는 고통이며 두 다리가 된 외로운 인간은 반쪽을 만나면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간절히 처절하게 사랑의 섹스를 한다는 내용이다.


‘Origin of love’ 가사 내용처럼 헤드윅은 두 가지를 찾아 헤맨다. 하나는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 즉,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헤드윅의 잃어버린 남성성이다. 영화에서 헤드윅은 여성이 되고 싶어 한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았다. 보통의 트랜스젠더들은 본인의 성정체성을 여자로 설정하고 여자가 되고 싶어서 성전환 수술을 선택하지만 헤드윅 즉 한셀은 루터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에 가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한 것이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성전환 수술을 했기 때문에 여성의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보였다. 영화 속 또 다른 OST인 ‘Wig in a box’의 가사 내용을 보면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되지만 본인은 가발을 써야 비로소 여자가 된다는 내용을 통해 헤드윅이 성전환 수술에 대한 후회감을 느끼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 행위 또한 단지 루터와의 사랑을 위해 행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헤드윅은 총 세 번의 남자를 만나는데 첫 번째 남자는 헤드윅이 트랜스젠더가 된 계기이다. 헤드윅의 본명은 한셀. 동독에 살고 있었고 미군인 아버지와 수많은 남자들에게 성추행 및 폭행을 당하며 한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쫓아내 버렸다. 20대에 미군인 루터와 만나 성전환 수술을 조건으로 결혼 후 어머니의 이름인 헤드윅으로 살아가며 미국으로 떠나지만 루터에게 버림받는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사랑하면 어떤 일이든 해내게 된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성전환 수술이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사랑 하나로 헤드윅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겠지만 그 사랑에게 버림을 받으면 크나큰 상처가 되어 버린다.

버림을 받은 뒤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베이비시터로 들어간 집의 아들 토미와 눈이 맞게 되며 토미는 헤드윅의 두 번째 남자가 된다. 토미가 헤드윅이 찾던 완벽한 반쪽이라는 확신이 든 헤드윅은 토미를 매력적이게 꾸미고 음악을 알려주며 서로 사랑을 확인한다.

이때 영화에서는 토미와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여 주는데 헤드윅이 거울로 가린 반쪽의 모습에 토미의 모습이 비춰지며 헤드윅이 찾던 반쪽이 토미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토미는 그가 트랜스젠더인 것이 두려워 도망치며 헤드윅은 또다시 이별을 겪게 된다.

두 번의 이별. 아니 이별보다는 버려졌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헤드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최선을 다 했지만 헤드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성별이든 인정받지 못한 헤드윅의 감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어려웠다.

세 번째 남자인 이츠학은 헤드윅의 남편이었다. 드랙퀸 활동을 하다가 헤드윅을 따라 밴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예민한 헤드윅에게 신물이 난 상태였고 그를 떠나기 위해 드랙퀸 역할을 따내고 꿈을 찾아 떠나려지만 헤드윅의 그의 발목을 붙잡지만 영화의 끝에 그를 인정한다.

하나로 합쳐진 헤드윅의 타투

영화가 끝에 다다르면 러닝타임 내내 여장을 한 채 노래하던 헤드윅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토미에게 용서받는 노래를 들었을 때 토미의 모습은 곧 헤드윅과 같았다. 이때의 곡은 Wicked little town. 사랑의 기원처럼 꼭 두 존재가 있어야 완전함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성별 구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헤드윅에게 깨우쳐 주는 트랙이었다. 그러면서 두 개로 구분되어 원을 이루고 있던 문신이 하나의 원이 되는데 이것은 마침내 자신을 얽매였던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즉 헤드윅의 있는 그대로를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한 올의 실도 없이 길거리를 걷는 모습은 여전히 인상 깊다.




퀴어 영화는 대개 두 주인공이 세상의 편견과 억압 속에서 절절하게 사랑하거나 혹은 그 편견에 이기지 못 하고 이별을 하는 내용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어쩌면 영화 속에 담긴 예술성이 조금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드윅은 그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자신의 자아를 찾으며 인간의 욕구와 본연의 모습에 더 집중하게 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가 부르는 음악들은 신나고 밝지만 그 내용들은 그가 그동안 겪었던 삶 속에서의 불행함들이 느껴져 더 깊이가 있는 영화였다. 또한 그동안 집착했던 것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완전한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그 모습에 그의 삶을 전부 본 타인의 입장으로 헤드윅을 통해 굉장히 위로를 많이 받고 공감과 위로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2022년 지금은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개선되었다. 퀴어 영화와 더불어 퀴어 연애 프로그램, 퀴어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동성애를 다루며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꼈다. 최근 트랜스젠더 방송인도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는 것을 보며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 짓지 않고 한 공동체로 공존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점은 굉장히 발전한 점이다. 지금의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성별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말로 마무리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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