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예술가인가

by 정윤
“에이,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

실제로 내가 예술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자주 하던 말이다.


거대한 캔버스 안에 점 하나, 그냥 낙서 같은 그림. 지금도 꾸준히 현대 미술을 관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문이 돈다.

‘이게 왜 몇 십억이나 하는 거지?’


그리고 또 누군가는 연필로, 사인펜으로, 수채화로,

그니까 보통의 우리가 관람 시에 예상 가능한 재료로 그린, 그 작가의 땀과 노력이 보이며 현실에 우리가 보는 그림과 정말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그림을 저기 저 점 하나의 그림보다 무조건 높게 쳐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글쎄, 이 말은 맞는 말일까.


왼쪽의 그림보다 오른쪽의 그림이 무조건 훌륭한가?


몇 년 전, 어떤 기사를 봤었다. 그 기사는 어린 아들 작품의 작품성을 알아본 미술 평론가인 부모가 아들의 작업을 경매에 부쳐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 작품의 작품성을 알아봐 주지 못한 부모님을 탓해야 할까? 그냥 느낌상으로도 이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미술시장은 어쩌면 이미 이 사례와 다를 것 없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등장인물 이사라가 전시회를 열면서 작품을 판매할 때 그 전시회장은 예술작품 거래 장소가 아닌 그저 탈세의 장소였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드라마를 보면서 현실성을 논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현실에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사라’는 예술가인가?


글 작가는 어느 문단에 등단이라는 것을 하면 그때부터 작가라 불린다.

가수는 앨범을 발매하면 그때부터 본인을 가수라 소개한다.

그럼 예술가는?


본인의 작업을 전시한 전시회를 개최하면 그때부터 ‘예술가’라 불릴까?


나도 작업 전시한 적은 좀 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예술가를 화가라고 많이 칭하지만, 우리들은 사실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도 쓰고, 작곡도, 작사도, 어느 한 곳에도 경계를 두지 않고 작업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을 ‘작가’라 칭한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들은 전시를 열면, ‘작가’가 될까?

근데 이러면 5살 어린 친구가 미술학원에서 열었던 전시회로 ‘작가’가 된다. 이건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들은 언제부터 우리를 소개할 때 ‘작가’라 할 수 있을까?


같은 예술이지만 음악의 연주자와 성악가, 가수는 그 기준이 있다. 어느 정도의 기술을 선보이면 그것을 가지고 나름의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예술이지만 무용가 또한 어느 정도의 기술을 선보이면 그것으로 기술 점수, 표현 점수 등의 기준을 가지고 점수를 부여받는다.

같은 예술이지만 작곡가, 안무가는 그 창작물이 좋은 지 안 좋은 지에 대해 꽤나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앨범을 발매하거나 안무가 채택되면 그 창작물의 흥행 등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면 작업은? 예술? 아니 그림? 작업물?


모든 사람들의 기준이 너무나 다르다. 여러 장르를 개척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장르를 찾아가는 길은 획일화되어있다. 특히나,

이 사람이 이 작업을 하기까지의 길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지는 수가 많다.


이 부분이 현대미술을 많은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일 것이다.


한 항아리 작품이 몇십 억에 팔렸다. 이 이야기만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 작품은 빌 게이츠가 선택한 작업이라 하는 순간 모두가 납득하게 된다.

한 작품은 도대체 왜 유명한 지 모르겠다. 근데 그 작품이 전시되어 있던 기간에 어떤 어린아이가 그 작품을 밟아 발자국을 남겼고, 그것이 여러 매체를 통해 퍼졌다. 그 아이를 욕하고 그 아이의 부모를 욕하는 와중에 작가는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본인의 작업은 이렇게 유명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 아이에게 고맙다며 이야기를 남겼고, 그렇게 그 작가의 깊은 생각과 함께 작품이 유명해졌다.


우리가 보는 수많은 현대미술에서는 이렇듯 알지 못하면 왜 인정받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알아봐 주는 것은 역시나 대중이 아니라 미술 평론가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알 수 없을 수밖에. 아무리 이렇다 한들 전시장에 그 작가의 사연을 구구절절 적어놓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니 저 평론가가 치켜세우는 작가가 정말 사연과 이야기를 가진 작가인지, 더 글로리 속 ‘이사라’ 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을 수밖에.

그러니 매체에서 훌륭하다 평가하는 전시장에서 전시를 진지하게 관람하는 ‘나’의 사진을 찍기 바쁠 수밖에. 이런 사연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겠는가.

여기서 나는 늘 고민을 한다.


내 작업의 사연을 들어줄 자리가 과연 어디인가.

내 작업의 사연이 학연과 그 학연에서 만난 지연을 빼고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는 작업 그 자체의 힘을 믿는다.


내가 짧은 배움으로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저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 이 말을 달고 살았을 무렵, 내 생각을 바꿔준 전시가 있었다.

너무 유명한 작가라 실망일 수도,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그 작가는 ‘김환기’였다. 종로구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그곳에서 여느 때와 같이 친구와 가볍게 전시를 보러 갔는데, 사실 그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가 없다.

처음 느껴 본, 작품에서 오는 경이로움이 있었다.


그 느낌은, ‘김환기’라는 인물을 알지 못해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너무 형이상학적이고 해학적인 작업을 하지 않아도,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현대미술이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런 나의 생각 또한 짧은 지식에서 오는 희망이거나, 이미 이루어지는 일을 아직도 모르는 것일지 모른다.


근데 그러면 어떠한가.

세상에는 그렇게 깊은 지식을 갖지 않아도 본인만의 예술을 펼쳐 나간 많은 이들이 있었다.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내가 무식하지만 열정적으로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 내가 어릴 적 직업소개 카드에서 본 ‘빵모자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를 꿈꾸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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