솨아아- 내리는 비가 둘의 어깨를 젖혀 들어갔다. 조금 후미진 곳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마워.”
“조심히 가.”
“그래. 너도.”
이사벨라가 대문 앞에서 손을 흔들자, 하닐 또한 손을 흔들었다. 작별인사를 한 둘이 서로의 뒷모습을 보인 채 가던 발걸음을 움직였다.
한발자국 움직이며 안으로 들어서던 이사벨라가 멈춘 건 그때였다.
“하닐.”
“어?”
“예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들어줄래?”
하닐이 느릿하게 눈을 껌뻑이며 이사벨라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사벨라는 그런 하닐에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야. 비.......”
냉큼 우산 속으로 들어온, 이사벨라 머리카락과 옷은 이미 축축했다.
“난 네 그 호박색 눈동자가 참 좋아.”
그 눈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하는 말은 참으로도 당혹스러웠다.
“웃을 때 보이는 인디언 보조개도 좋아.”
“특유의 느릿하게 껌뻑이는 눈 또한 좋아.”
“일자 걸음도 좋고, 고른 치아도 좋아.”
“네가 이제까지 보았던 시야. 네가 현재 보고 있는 그 시야도 좋아.”
“그리고, 다 좋아.”
“........”
하닐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요동치는 눈동자를 깊게 바라보던 이사벨라가 히죽 웃었다.
“예쁘다. 눈동자....... 떨려도 예쁜 거 같아.”
“이사벨라.......?”
갑작스럽다. 대답을 고르기 위해 하닐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입술이 부딪쳐졌다.
툭. 떨어진 우산은 둘의 비를 막지 못해 바닥을 굴렀다.
“!?”
솨아아-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맞은 둘은 풋풋한 소년과 소녀처럼 당황스러워하다가, 농도가 점점 깊어졌다.
말캉한 혀가 둘의 입안을 휘저었다.
고른 치아가 서로를 훑고, 맞부딪힌 입술이 서로를 탐할 때 서로가 떨어졌다.
길게 늘어난 침이 뚝, 하고 끊겨 몽롱한 시선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봤다.
“우린 친군데 이러는 거 이상한가?”
이사벨라가 붉어진 볼을 숨기지 못하고 묻자 하닐이 고개를 저었다.
이사벨라는 그런 하닐을 위해 씨익-. 웃었다.
세상을 허무는 거와 같은 그런 바보 같은 웃음...............................................,
,은 무슨.......................... 이건, 망상이다. 몇 년 째 망상만 이어지고 있다.
이사벨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정말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잘 가~ 하닐.”
“......? 어. 조심히 들어가.”
한숨을 내쉬다 밝은 얼굴 만들어내는 신기루를 본 듯한 하닐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눈치가 몇 년째 없기에 발전이 없었다.
솨아아아- 내리는 비.
비는 망상과 똑같은데 상황은 다르다.
점점 미련 없이 가버리는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만 하던 이사벨라는 그저 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달프구나. 짝사랑.......”
저 친구 녀석은 알까? 망상만 가득한 못난 친구를............................
한편, 짝사랑인데 짝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하닐이 웅웅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네. 감독님.”
“하닐~ 지금 어디야?”
“금방. 학교 끝나서 가고 있어요.”
하닐이 그렌 버스틸 감독과 통화를 끊고 나서야 발걸음을 멈칫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이사벨라가 하염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사벨라?”
안 들어가고 뭐하는 거지?
하닐이 의문에 휩싸인 채 이사벨라를 바라보고 있자, 이사벨라가 언제 자신을 바라봤냐는 듯 고개를 돌리고선 안으로 들어갔다.
“.......”
놓치면 안 되는 것을 놓친 거 같이 찝찝했다. 눈살만 가만히 찌푸리고 있자 전화벨이 또 한 번 울렸다. 화면을 바라보자 ‘졸리’라는 이름이 떴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졸리를 차단하고 다시 발걸음 움직였다.
하닐이 도착한 곳은 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고개를 조금만 돌리자, 그렌 버스틸이 자신을 향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닐은 그렌 버스틸에게 인사를 하고 그 앞에 있는 동양인에게도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하닐 세나입니다.”
동양인이 뻗어오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다니엘 킴입니다.”
셋은 일어나 있던 몸을 자리에 착석했다.
곧 음식이 차려지고 스테이크를 조용히 자르던 하닐이 입을 열었다.
“저를 보자고 들었습니다.”
다니엘 킴은 입을 닦으며 말했다.
“동양인 배우가 필요해서 찾다가, 제 지인인 그렌 버스틸 감독님께서 하닐 세나군을 적극 추천하셔서 갑자기 연락드렸습니다.”
하닐이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동양인 배우를요?"
"네. 이번에 제가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하게 되어서요. "
'한국.'
하닐이 버림받지 않았더라면 국적이 그곳일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나라이름에 씁쓸히 미소를 지어졌다.
"무슨 드라마인가요?"
“의사의 기적이라고......., 인턴이 의사 보다 더 뛰어나서 일어나는 사건이 대부분인 드라마입니다. 능력이 있다고 장점만이 있는 게 아니라 주변의 시선과 심리를 꽤나 심도 있게 해석한 의학 드라마라고 할 수 있죠. 세나군이 맡았으면 하는 역은 인턴 동기생인 ‘호세 신’입니다. 분량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중요한 인물입니다.”
“리메이크라고 하면....... 동양인이 아니라도 괜찮으실 거 같은데 저를 찾는 이유라도 있나요?”
“동양인을 중요 등장인물로 한 것은, 제가 동양인이라서 할리우드에서 동양인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것도 있지만, 동양인 의사들이 꽤나 많이 있기 때문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세나군의 연기는 인상 깊었고요....... 괜찮은 답변이 되었나요?”
하닐은 아차했다. 너무 따져 묻는 식의 물음으로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안색을 살피자,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예. 괜찮은 답변이 됐습니다.”
하닐로썬 그 미소가 인상이 깊었다.
“다시 한 번 인사하도록 하죠. ‘의사의 기적’ 제작사 다니엘 킴입니다.”
다시 뻗어오는 손을 마주 잡은 하닐이 입을 열었다.
“저도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배우. 하닐 세나입니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린 겸 드라마의 대해 애기 해보도록 할까요? 계약은 제 얘기 듣고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하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니엘 킴이 대본을 꺼내들었다. ‘의사의 기적’이라고 커다랗게 써져 있는 대본은 반듯했다. 그걸 받아 펼쳐든 하닐은 한동안 진지한 얼굴로 읽더니 입을 열었다.
“진지한 성격이 아니라 꽤 유쾌한 캐릭터네요.”
“원작에서는 캐릭터가 유쾌하지만 점점 진지하게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하닐은 놀랐다. 자신에게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를 줬기 때문이다.
눈동자를 굴려 그렌 버스틸을 바라보자 흐뭇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유쾌한 캐릭터는 그쪽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지지해주는 낯이다.
고갤 절레절레 저은 하닐이 탐스런 입술을 긁으며 물었다.
“감독님....... 저 이 작품하고 싶어졌네요. 절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야하하. 별 걸 다 고마워한다~! 난 추천해준 거밖에 없어~! 적극 추천해준 거밖에!”
피식 웃은 하닐이 다시 다니엘 킴을 바라봤다. 그러자 다니엘 킴은 가방에 있던 또 하나의 서류를 꺼내들었는데 계약서 같았다.
“계약서는 나중에 주셔도 괜찮습니다. 최대한 꼼꼼하게 읽는 게 좋을 테니까요.”
“예. 고맙습니다. "
셋은 사람 좋은 얼굴로 바라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꽤 맛있는 스테이크는 목 넘김이 좋았다.
다음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하닐이 부스스한 머리를 헤집었다.
퉁퉁 부은 눈이 떠지지가 않아 괴롭다. 어제 또 한 번 찾아온 ‘기억’은 하닐을 울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었다. 그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가 않아 가슴을 몇 번 툭툭 쳤다.
“아. 아.”
몇 번이나 신음 흘린 하닐이 또 한 번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무심히 닦아냈다.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지만 무슨 감정을 껴안고 있는지 모르도록 눈동자는 힘이 없었고 아파보였다. 괜히 딱지 앉은 입술만 만지작만지작 해보인 하닐의 눈동자에 잡힌 것은 대본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본을 바라보고선 펼쳐들었다.
“아무리 봐도 인턴에게 다들 너무한 거 아냐? 인턴이 무슨 지나가는 개미보다 못한 존재야?”
원래 투덜거려야하는데 무감정하게 대사를 읽어나갔다.
감정이입이 되지가 않는다. 대사를 한참이나 읽어가던 하닐은 대본을 덮고선 거칠게 이마를 감싸 쥐었다.
“짜증나........”
정말 짜증나는 아침.
또 시작되었던 밤.
그 밤은 자식을 읽은 아버지의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