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드문 보이던 햇빛이 서서히 얼굴을 내밀어, 조용하던 창밖은 사람들의 소리로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어두운 커튼 사이 햇빛이 조금씩 들어와 하닐 얼굴을 비추었다. 햇빛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보며 피하던 하닐은 갑작스레 울리는 알람과 함께 까치집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일어났다. 그 옆에 있던 마리(고양이)가 따라서 뒷다리 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은 서로 꽤나 닮아보였다. 하닐이 눈을 뜨자마자 먼저 한 일은 불빛이 껌뻑 껌뻑 거리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잠자는 동안 연락 오는 것을 싫어해서 무음으로 해두었던 핸드폰은 당연히 확인해야 했다.
“흠.”
전화가 30통에 문자가 101통이라니 소름이 돋는 숫자였다.
대부분 학교 애들 연락이었는데 그 중 감독과 배우의 연락도 있었다.
하닐은 손에 땀이 나는 걸 느끼며 문자함을 열었다.
『세나! 너 배우였어!?』
『위치하이스쿨 봤어. 어디선가 많이 본 애가 있다 했는데 너였구나! 분위기가 많이 달라서 몰라봤어! 왜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학교에서 봐! 난 지금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상태야!』
『왜 비밀로 해두었던 거야??』
『내 동생이 너 팬인데 싸인 받아도 될까?』
『왠지 너한테서 일반인 아우라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뭔가가 있어보였어. 싸인 받아도 될까? 답장 꼭 보내줬음 좋겠어.』
『와우. 난 네 팬이 되어 버렸어. 네가 다르게 보이더라.』
-
너무 많아서 하닐은 도중에 읽는 걸 포기했다.
결국, 스크롤을 내리며 중요해 보이는 내용이 있을 법한 상대 문자함을 열었다.
『세나. 다름 아니라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아서 문자를 남겨. 급한 일이라서 문자를 보면 꼭 좀 전화 해줬으면 좋겠어. -그렌 버스틸-』
『다음 주 주말에 배우들끼리 술 한 잔 마실까 하는데 시간 있어? -데릴 스미스-』
우선 하닐은 입술을 긁적이며 데릴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연하지. 그날은 촬영이 없잖아.』
데릴에게 답장을 보내고 통화 목록에 그렌 버스틸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단조로운 신호가 가고, 그렌 버스틸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렌 감독님. 저에요. 급한 일이라는 게 뭔가요?”
“오오. 세나! 중요한 타이밍에 전화 좋았어.”
“중요한 타이밍이요?”
“중요한 타이밍이지! 지금. 다니엘 킴이랑 카페에 있거든. 아아. 다니엘 킴은 알고 있지? 시리어스 에반에 나오는 동양인 배우 말이야. 그 배우와 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어.”
“예. 알고 있습니다만. 다니엘 킴이 왜 제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다니엘 킴이 널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중요한 얘기는 만나서 할까하는데 시간 있어?”
하닐은 눈동자를 굴려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8시를 향하고 있었다. 학교 갈 시간이 다다름을 느꼈다.
“죄송하지만 지금 말하는 거라면 안 될 거 같아요.”
“아아. 그러고 보니....... 학교 가야할 시간이겠네. 그럼 오늘, 저녁식사 같이 하는 건 어때?”
“좋죠. 몇 시에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장소와 시간은 나중에 문자로 보내줄게.”
“예. 그럼.”
전화를 끊은 하닐은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시원스레 펼치자 촤악, 햇빛이 방안을 밝혔다. 두둥실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가 머리카락에 조금씩 안착했다.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하며 내려간 하닐은 토스트 냄새가 나는 주방에 들어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하닐. 잘 잤니?”
세나부인이 무심히 대답하며 계란을 뒤집었다.
하닐은 억지로 올라간 미소와 함께 제니의 방문을 두드렸다. 사실,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깨우지 않았다가 짜증 섞인 세나부인 눈빛이 잊혀 지지가 않아 깨울 수밖에 없었다.
똑똑
작게 문을 두드리자 방문 안에 사람 기척이 느껴지더니 문이 덜컥, 열렸다.
다시 한 번 두드리려던 하닐은 멈칫하다가 손을 내렸다.
“......뭐야. 비켜.”
하닐은 비키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는 다름없는 말투인데 분위기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공기였다.
식사를 다 마치고 파란 가디건을 걸쳐 나온 하닐은 구석에 위치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뒤따라 제니가 핸드폰을 만지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요새들어, 같이 나오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제니가 의아할 따름이다.
원래라면 누가 볼까봐 먼저가거나 늦게 나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닐의 의구심어린 눈빛에 핸드폰으로 고정 되어있던 시선이 점점 들어졌다.
제니는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재빨리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시키고 서는 대문 열고 저만치 걸어가 버렸다. 의문점에 몇 초간 눈을 깜빡이던 하닐은 자신도 학교가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등굣길은 학생들로 북적인다.
인구는 700만을 넘어서 뉴욕 지역에 이어 미국 제2의 거대한 대도시권을 형성하는 이곳 로스엔젤레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도시이다. 북서부 쪽에 있는 할리우드는 광대한 영화 스튜디오가 있고 유명 인사들의 고급주택가로 유명하다. 특히 로스앤젤레스는 한인 교포가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해서 다른 곳에 비하면 차별이 덜하기도 했다. 물론, 차별이 덜 한다고 했지, 없는 건 아니다.
가정교육 못 받고 아직 미성숙한 애들이라거나- 뇌에 주름이 없는 게 분명한 사람들이 차별을 하기도 했다.
지나가다가, 너네 집에나 가라는 소리를 드문드문 들은 게, 괜한 게 아니다.
하닐이 다니는 학교는 ‘로스엔젤레스 고등학교’이다.
도로 옆에 깔끔한 흰 바탕의 건물로 ‘Romans’라고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이곳에 도착한 하닐은 학교 안에 있는 자전거를 자전거 주차장에 세운 후 잠갔다.
“안녕. 하닐.”
그런데 그때 삑사리가 약간 섞인 묘한 목소리가 하닐 어깨를 툭툭 쳤다.
고개를 돌리자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이름은 ‘이사벨라 박’으로 한인 교포다.
그녀는 무척이나 검은색, 흰색의 대비되는 느낌을 주는 인상이 강하다. 그 인상아래 옅은 인 아웃 라인 선이 보이는 쌍꺼풀이 없는 커다란 눈에는, 깨끗한 흰자위에서 보물 같은 검은 눈동자가 톡하니 박혀있다.
그 눈동자는 반짝 반짝 거려 유심히 보게 만들 정도의 티 없어 보이도록 검다.
게다가 하필 턱 라인 선 검은 머리카락을 지녀 조금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그 묘한 분위기 때문에 검정이 젤 아름다운 색 같다.
흰 피부는 그것을 더욱 돋보였고 조금 진한 화장에 진한 붉은 립스틱이 어울리는 화려한 느낌의 여자였다.
코볼이 아기같이 작아 귀엽지만 콧대가 높아서 예쁜 코는 한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있었으며 약간 각졌지만 작은 얼굴 안에, 눈 코 앵두 입이 오목조목 들어가 있어 조금 센 느낌을 유하게 만들어져 있는 예쁜 얼굴이다.
“안녕. 이사벨라.”
하닐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자 이사벨라가 또 한 번 웃었다.
고양이처럼 눈이 예쁜 모양으로 올라가서 차갑게 보인 얼굴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얼굴을 바보같이 웃어 보이고 있었다.
그 완벽해 보였던 차가움을 우두두, 허물 듯이 반달로 곱게 접힌 눈과,
화려한 붉은 립스틱 입매를 가늘게 만들어서는 커다랗게 오목 들어간 보조개가 히 하고 웃는 얼굴은 미치도록 온 세상을 밝혔다.
그 웃음에는 정말 내성이 없는 하닐이 움찔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던 일이기에 이사벨라는 별 의문점 없어 보여 하는 듯했다.
“......”
하닐은 다시 한 번 힐끔 이사벨라를 바라본 후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분명, 순박함을 넘어 바보 같은 웃음인데, 바보가 진리라는 듯이,
바보가 이 세상 예쁜 것이라는 듯, 이 아이는 그의 고정관념을 무차별하게 깨뜰었다.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하닐이 그녀를 바라보는데 시간을 낭비하다가 이어지는 편이었다.
“드라마 재밌게 보고 있어. 초반에는 네가 안 나와서 불만이었는데 점점 분량이 많아지더라.”
“계속 앉는 씬만 찍어서 엉덩이가 저렸는데 다행이지 뭐.”
“하하. 그러네! 네가 자꾸 투덜거리는 게 보기 드물어서 난 재밌었지만.”
‘그러네!’에서 삑사리가난게 살짝 귀여웠다.
그녀는 독특하게도 듣기 좋게 부드럽게 이어가다가, 끝에서 삑-하고, 도중에 그 소리와 잘 섞인 듯해서, 점점 차분하면서도 통통 튀는 느낌이 드는 묘한 목소리다.
“병원 갔다 왔어?”
하닐 물음에 이사벨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씩씩하게도 말했다.
“당연하지. 목상태도 점점 괜찮아지는 거 같아.”
하닐은 그런 이사벨라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라는 한국에 잠깐 살았었는데 그때 하필 강도가 들어와 칼로 이사벨라의 목을 베었었다. 그 후 목소리 상태가 안 좋아 잘했던 노래를 이제 못하게 되었다. 목소리 끝이 삑사리가 자주 나는 이유도 그 사건 때문이다. 그래서 툭하면 목이 많이 아파했다. 스카프를 만날 두르는 것도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이사벨라는 항상 말한다.
자신의 최대 고민은 스카프와 어울리는 옷의 코디라고. 그게 불편한 것만 빼면 자신은 괜찮다고.
오늘도 눈동자 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 이사벨라는 씩-하고 웃었다.
“난 네가 내 목소리가 좋다고 얘기해준 덕분에 괜찮아졌어. 병원도 꼬박꼬박 잘 가고 있고 말이야.”
하닐이 어렸을 적 뭣 모르고 한 얘기를 이사벨라는 항상 가슴에 품겨두고 있었다.
“응. 네 목소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좋을 거야. 본래 목소리를 가릴 수는 없어.”
“아하하. 그거 멋진 명언이네.”
이사벨라가 호쾌하게도 웃으며 하닐을 껴안았다.
사랑 감정은 없고 위로해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의사표현이었다.
“휘유~ 오늘도 뜨거워 죽겠네.”
“공공장소에서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거 아니냐? 이러다가 일치겠다. 너네?”
마이클, 그리고 잭 일당이 지나가며 그들을 놀렸다.
또 시작인가 싶어 하닐은 지겨운 표정을 지어냈다. 그것은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쟤네들은 지겹지도 않나봐?”
“좋잖아. 철없어 보이고.......”
항상 같은 일상이면서도 조금은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까마귀 때가 우는 하늘은 청명하기보단 우중충하다. 조금 고갤 들어보자 콧대에 무언가가 뚝하고 떨어졌다.
“아, 비.......”
중얼거리며 말하는 하닐 말에 이사벨라 또한 고개를 들었다.
“비? 안........ㅇ”
안 오는데?
라고 말하려다가 비가 우,두두두........ 쏟아져 내렸다.
여유롭게 지나가던 학생들은 놀라서 건물로 뛰어갔다. 그것은 하닐과 이사벨라도 마찬가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흠뻑 젖은 둘은 머리를 거칠게 털었다.
“으아! 수업 중에 축축할 텐데 어떡해.......”
이사벨라는 투덜거리며 하닐을 바라봤다.
하닐은 이사벨라와는 달리 표정 없는 얼굴로 앞머리를 털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이사벨라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너 진짜 새삼스럽지만 분위기 장난 아니다.......”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며 바라보는 시선에 이사벨라는 쿡쿡 웃었다.
“저 비 맞은 생쥐 꼴 같은 마이클과 잭을 봐봐.”
하닐이 조금 고개를 들자, 허겁지겁 이쪽으로 오고 있는 마이클 일당들이 보였다.
축축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과 흠뻑 젖은 옷이 안타까울 정도다. 하닐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이사벨라는 하닐 어깨를 툭툭 쳤다.
“이봐, 미남!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
“와우. 너 진짜 대단하다. 그 얼굴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주변이 가만히 놔두지를 않을 텐데.......?”
하닐이 머쓱하게 웃었다. 칭찬이지만 놀리는 거 같기도 해서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그 웃음은 남자주제에 청순해보일 정도였다. 이사벨라가 일부로 커헉! 이라는 소리를 내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너 임마! 그 웃음 반칙이야!”
그 말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속으로 투덜된 하닐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이제는 솨아아아- 굵게 떨어지는 비가 자장가같이 귓가를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하닐에게서 비가 오는 날은, 꿈도 꾸지 않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날이었다.
“하여간 반응 좀 해봐. 무안하잖아. 이 심심한 것아.”
비록 투덜거리고 있지만 이사벨라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어간다. 무언가 음악을 만들어 내가는 과정처럼 듣기 좋게 어울려져만 갔다. 이사벨라는 큰 눈을 껌뻑이며 하닐과 같은 것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깊게 잘 수 있을 거 같아.”
하닐은 조금 놀란 눈으로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이사벨라는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갤 돌려 하얀 웃음을 보였다.
“그치?”
“........”
자기 생각을 누군가가 곧바로 말하면 그 공감은 너무나도 커서 그 사람이 더 좋아진다.
그 아이는 사람을 이상하게 간지럽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 특유의 예쁜 웃음을 보이면 세상이 그 아이 중심으로 도는 것 같다. 어느 누군가가 우연히 그 아이의 웃음을 본다면 넋을 놓을 거라는 것을 장담한다. 그만큼 그 아이는 세상을 허물게도 웃었다.
하닐이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무척이나 사소했다.
누군가의 기억이 삐쭉빼쭉 나와 계속 상처를 갉아먹어가고 있을 시점이었을 것이다.
하닐은 공허한 눈동자로 자신의 그림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가 너무 무거워서 고개를 들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겨우 한보 이동하는 게 다였다.
그런 하닐이 이젠 조금은,
아주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걸 수 있게 된 것은,
어깨가 덜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기척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하닐 고개위에 들이어졌다.
고개를 들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자애가 하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닐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자애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스케치북을 펼쳐 한참이나 무언가를 끼적이더니 그것을 코앞에 내밀었다.
하닐이 “너무 가까워........”라고 뒷걸음을 치며 그 아이가 쓴 것을 보았다.
「왜 땅을 보고 있는 거야?」
“......고개를 들 힘이 없어서.”
「그래서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는 거야?」
“관찰이 아니라, 그냥 멍하니 있는 건데.......?”
「그림자를 보고 있잖아. 그러면 관찰이지!」
하닐은 어이없다며 웃었다.
“관찰은 보는 것만이 아닌 사고도 해야 관찰이지.”
「보는 것만으로도 관찰이 될 수는 없는 거야?」
“그래.”
「하지만, 난 널 멍하니 바라봤는데 너의 첫인상을 낱낱이 말할 수 있는걸? 그게 관찰이 아니면 뭐야?」
“.......”
설명할 길은 많지만 하닐이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런 척 했다. 그 아이의 단어순환이 세상을 예쁘게 만들어서 그랬다는 것이 옳았다.
기운 없이 비척이며 걸어가는, 기분 나쁜 꼬마를 사실은 호기심으로 가득해서 관찰하는 아이로 뒤바뀜 되었다.
그 단어는 이상하게도 몽글몽글하다.
하닐이 신기해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자 그 여자애는 ‘느리게 깜빡이는 거 예쁘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여자애는 신기했다.
툭툭 무심히 뱉어내는 단어들이 하나같이 예쁘다. 세상을 흐리게 하는 타인의 흑백 사고가 알록달록한 무지개로 바뀌는 사고를 만들어낸다. 마법같이 그 아이는 말 한마디로 기운을 줬다.
“........그런데, 넌 왜 스케치북을 들고 글을 쓰고 있는 거야? 요새 유행하는 놀이라도 되?”
「목이 다쳐서 그래. 네 말처럼 요새 유행하는 놀이라도 되면 튀지도 않고 참 좋겠다.」
여자애가 갑자기 시무룩해져서는, 스카프를 만지작만지작 거리고 있다.
“.......미안.”
「아냐! 네가 왜 미안해. 사실 목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여자애는 글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싶어 하닐은 여자애 얼굴을 살펴보았다.
여자애는 입을 앙 다물고 있었지만, 상당히 수다쟁이 같은 이미지가 풍겼다. 글씨가 예쁘지만 활달한 이미지를 풍겨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들이어지는 속눈썹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속눈썹이 갑자기 위로 치켜세운다. 깜짝 놀라게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닐이 살짝 뒷걸음을 쳤다. 여자앤 아랑곳없이 하닐에게 바짝 다가왔다.
영문을 모르는 하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여자애가 씨-익 웃으며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에게 귀를 갖다 되어 보라는 제스처 말이다.
“.......?”
“너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야. 내 목소리가 많이 마녀 같거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쉰 목소리가 깃털처럼 휘젓는 그런 간지러움이 목덜미를 오싹하게 했다.
여자 아이는 가늘게 눈을 떠 입가를 늘어트리게 웃고 있었다.
하닐은 그 웃음 때문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시간이 정지하는 그런 순간을 느꼈다. 당황스러움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자, 여자애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랄 정도야?”
하닐이 몸을 때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매력적이라 생각해.”
“.......”
여자애가 놀란 눈을 껌뻑였다. 갑작스런 칭찬에 당황한 거 같았다.
잠시 하닐을 멍하니 바라본 여자애는 해맑은 웃음으로 그 칭찬에 보답했다.
“고마워.”
“별 말씀을.......”
시선을 피해도 아랑곳없이 바라본 여자애는 스케치북을 접어 겨드랑이에 끼웠다.
“내 이름은 이사벨라 박이야. 넌?”
“하닐 세나.”
뻗어오는 앙증맞은 손을 부여잡아, 하닐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어냈다.
-
후두두두........
빗방울이 경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창문을 두드렸다. 하닐 자리는 창가였다. 빗소리를 좋아하는 하닐은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창가를 바라보다가, 교사가 들어오자 책을 펼쳐들었다.
늘 비가 오는 날, 수업은 빗방울이 방울 방물 맺은 창가 앉아서 시작되었다.
그 모습 꽤나 분위기 있어 보였다.
이젠 버릇이 되어버린 대나무테를 떠올리게 하는 곧은 자세로 칠판을 직시하고 있던 하닐은 뒤에서 수근 되는 여자애들이 있음을 알고서 뒤 돌아보았다.
여자애들은 작게 소근 거리다가, 하닐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의문에 하닐이 미간을 모으고 있자, 옆에 있던 금발 여자애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든다. 새삼스러운 인사에 하닐은 뚱한 표정으로 답하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맨 뒤편에서 그 모습들 다 지켜보고 있던 이사벨라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갑작스레 인기가 많아진 하닐은 여자애들 반응이 썩 시원치 않은 모양이다. 조용하기도 조용한 성격이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타인 시선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말이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연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상당히 의외다.
이사벨라는 하닐과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라서 잘 알고 있다고 장담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나보다.
매사 침착하지만 기분 나쁜 티를 낼 때 한 쪽 눈썹이 찡그러트리거나 표정 변화는 없지만 상처는 잘 받고,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너무 많아서 끙끙 앓고 있다는 거. 이사벨라는 하닐을 많이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못난 점 없는 성격,
웃을 때 참 잘생긴 거,
눈동자가 예쁜 거,
그리고 가족 관게,
딱히 자기 얘기를 하지 않지만 이사벨라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하닐이 요새 들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곧은 자세라기 보단 턱을 괴거나, 삐딱하게 앉는 게 특징인데 이젠 그게 아니게 되었다.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 연예인이라는 걸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젠 밖이든 학교든 유명하다.
스타일도 항상 부스스해서 주변과 동화되어 버린 모습이 꽤나 매력인데, 이젠 어딜 가든 이 녀석이 이렇게 잘생겼나......., 하고 놀랄 정도로 눈에 튄다.
이사벨라는 대단하다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연기 따로 배운 녀석이 아닌데, 평소 습관 성격을 바꾸다니....... 저런 게 천재라는 걸까? 아님 노력형인 걸까?
‘연기’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이사벨라가 문득 드는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만다.
한편, 하닐이 학습욕구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수업 듣고 있다.
“.......공부조차 열심히 하다니, 하여간 대단한 녀석.”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라
수업이란, 멍 때리는 걸 특징으로 삼았는데, 연기를 위하여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거 같다.
애초부터 머리가 좋은 애라 따로 공부 할 필요 없이 성적이 좋은 편이다.
저렇게 수업을 열정적으로 들으면 분명 성적이 오를 거다.
깜짝 놀랄 정도로 기억력이 좋으니까.......
데에에에에에엑-
하닐 생각으로 가득하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는지, 수업 마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사는 더하고 싶은 눈치로 시계를 흘낏 보더니 나가버렸다. 조용했던 수업시간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하닐이 가방 대충 챙기더니 이사벨라에게 다가와 물었다.
“사물함에 우산 있어?”
“아니. 넌?”
“난 있어. 씌어줄게.”
“오! 살았어! 고마워.”
이시발레는 서둘러 가방 안에 책을 집어넣고 일어났다.
그녀의 옷차림은 커다란 후드티와 추리닝이었다. 하닐이 빌려준 옷이기에 클 수밖에 없었지만, 꽤나 어울렸으며 귀여웠다.
밖을 나가자 비가 솨아아아- 홍수처럼 내렸다.
우산을 써도 분명히 젖을 거 같다. 투명한 우산을 촤악, 펼쳐 안으로 들어가자 좁았다.
서로 어깨가 닿아 이사벨라는 의식이 되는 걸 느끼며 흘낏 하닐을 바라봤다.
항상 친구인데 항상 친구로 느껴지지 않는 친구다.
손을 심장에 얹자, 떨림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