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로 가득한 욕실 안, 물로 가득한 욕조는 폐쇄되어 있어서 묘한 안정감을 찾아주었다. 눈을 껌뻑이며 가득 담긴 물 안에 얼굴 전체까지 집어넣어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가 되어서야 얼굴을 빼내었다.
"푸하!"
거칠어진 숨을 힘겹게 내쉬며 하닐은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물방울이 송글송글 이마를 타고 내려가 뚝뚝 떨어졌다.
하닐은 이때 차가운 바람이 조금 들어온다면 기분이 좋아질 거 같다는 것을 대단히 장담했다. 일어나서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폐쇄되어있어서 숨이 막혀있던 공간이 갑작스레, 시원해져 자유로워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뿌듯함에 고개를 끄덕인 하닐은 다시 욕조 안에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뺐다가를 반복했다.
"푸하!"
넘어가 있던 머리가 다시 시야를 가리자 다시 머리를 넘겼다. 넘길 때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듣기가 좋았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눈을 지그시 감은 하닐은 손등으로 물을 닦아 내어 눈을 껌뻑였다.
“.......맞다. 연습.”
씻고 좀 자려고 했는데 연기 연습을 뺄 수는 없었다. 괜히 침울해진다.......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좀 더 들어 바라본 밖은, 어렸을 적 까칠까칠한 검은 종이 위에 크레파스 가루가 어렵지 않게 예쁜 별을 만들어진 것처럼, 작은 별로 촘촘했다. 그 창문사이로 칼날처럼 시퍼런 달빛이 들어와 하닐의 온 몸을 베일 듯한 묘한 광경이었다.
달빛을 손날로 휙휙 저어보기도 하고 쥐어보기도 하며 욕실 안에서의 기분을 만끽하다가 외운 대사 중 한구절을 중얼거려 보았다.
"있잖아.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적당히해. 너는 내게 무슨 향수를 쓰냐며 묻더니 다음날 같은 걸 쓰고 왔어. 이러지 말아줬으면 했어......, 기대하게 되잖아. 착각하게 되잖아. 설레게 되잖아. 넌 대체, 나와 같은 걸 왜 쓴 거야? 걔랑 사귀면서 나한테 여지를 왜 주는 거야?"
대사를 무감정하게 끝마친 하닐은 눈을 지그시 감아 밤하늘 아래 공원을 생각해보았다. 아무도 없고, 조용한, 그리고 작게 일렁이는 불빛. 가로등만이 있는 곳에 남녀가 있다.
남녀는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키스를 한다.
서로 입술은 닿았고, 떨어진다.
한동안 여운을 느끼며 서로 이마를 부딪치던 남자는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한 편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그 남자는 대사를 뱉어냈다.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님 뭘 모르는 거야?"
하닐은 막상 뱉어내자 어색함을 느끼며 이맛살을 구겼다. 어떤 톤으로 해야 남자 감정을 시청자가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님 뭘 모르는 거야?"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님, 뭘 모르는.......거야?"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님 모르는 거야?"
하닐은 똑같은 대사를, 톤과 어조 그리고 감정을 새로 대입하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러다 꽤나 시간이 지났음을 알았다. 아차한 심정으로, 쭈글쭈글 못난 모양이 된 손가락과 발가락을 오믈며 일어났다.
여전히 맑고 아담하게 보이는 달은 그 영롱한 빛을 내며 창문 사이로 날카롭게 들어오고 있었다.
하닐은 문득 무언가를 본 시선으로 움직임을 멈칫했다.
“?”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기분 나쁘게 껌뻑이는 눈동자와 사람의 기척을 느낀 거 같았다.
하닐은 고개를 빼내어 밖을 훑었지만 사람으로 추정되는 그림자는 보이지가 않았다.
요새 변태가 득실득실 하다더니 제니가 위험할 수가 있었다.
조심해선 나쁠 것은 없었다.
하닐은 갑자기 불길해 보이는 달빛이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나서야 외부인을 차단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 잠그는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요새 시선이 자꾸 느껴지는 건 착각인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 하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가 사람 잡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 다짐과 함께 물기를 닦고 편한 옷을 입고 나서야 꽤나 길었던 욕실에 시간을 마칠 수가 있었다.
덜컥.
후끈했던 욕실과는 달리 훅하고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스며들었다. 하닐이 머리에서 조금 떨어지는 물기를 닦아내며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놀란 눈을 한 제니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녈 바라보다가 서둘러 올라갔다. 같은 집안에 있지만 요새 만나는 일이 없어서 안심했는데 방심했다. 꾸역 꾸역 올라오는 불쾌감에 가슴을 통통쳤다. 살며시 구겨지는 이맛살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보였다.
다락방으로 들어간 하닐이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대본을 들어 촤라라- 페이지를 능숙하게 넘기며 펼쳤다.
호박색 그 눈동자가 대본 구석구석을 훑다가 멈칫,하고서는 대본을 무감정하게 읽어내었다.
"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
그러자, 자연스레 상대방 대사가 귓가에 떠돌듯이 들려왔다.
[쯧쯧. 이미 받은 주제에 정색하면서 저런 말을 하네?]
#지문, 앤디는 쓸쓸하게 웃는다.
"웃으면서 말하면 무섭잖아."
[.......아니. 난 전이 더 무서운 거 같은데? 아무튼, 빨리 떨쳐내라고 친구! 상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받게 되어 있잖아?]
"알아. 무섭지는 않아."
#지문, 앤디는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심한 듯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무감정하게가 아닌 앤디의 감정을 떠올려보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녀석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친구가 없는 앤디에게 다가오는 안젤리나는 앤디 마음을 열어버렸다.
그런데 열었으면서, 들어오지를 않았다.
이미 앤디는 닫을 수 없는 문이 되었는데 안젤리나는 앤디 문이 아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둔지 오래였다. 어쩌다 시선이 돌아오면 그것은 기대심을 부풀게 했고 또 다시 앤디를 힘들게 했다.
하닐의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미간에 작은 구겨짐이 생겼다.
아쉽다.
만약 보이는 이가 있었다면,
그런 작은 표정이었을 뿐인데도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를 모른 채 감정에 빠져들었을 지도 모른다.
눈동자는 모든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슬픔, 두려움, 후회, 원망.
여러 가지 감정이 앤디를 괴롭힌다.
“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
앤디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이 말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말하면 무섭잖아.”
씁쓸하게 웃는 게 가련해 보일정도였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애절한 목소리였다.
“알아. 무섭지는 않아.”
슬며시 웃는 입가가 묘하게 부들거렸다. 눈동자는 슬픔으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거 같은 눈동자였지만 이상하게 물기가 없는 눈동자였다.
그럼에도 슬퍼 보이는 눈은 많은 의미를 뜻하고 있었다.
하닐은 땀이 뚝뚝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감정연기와 함께 자연스러운 동작을 연습하고 있었다.
다음 하닐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상은 여성이었다.
[너무 미안하잖아. 지쳐도 언제나 초연하게 다가오는 너 때문에 너무 미안해지잖아. 왜 나를 증오하지 않는 거야?]
대상의 말에 눈동자가 불안함을 떨렸다.
“당연한 걸 묻지 마. 만약. 너라면....... 항상 알고 싶고, 봐도 보고 싶은 사람한테 화가 날 거 같아? 난 뒤돌아보면 순간순간 마다 너를 좋아하고 있는 내 모습밖에 눈치 채지 못했어. 증오? 그런 감정은 발견하지 못했어.”
감정을 넣어 표정 하나하나를 주위 있게 살펴보았다. 거울 앞에서 표정은 마치 다채로웠다. 그 다채로움은 전생기억 때문이다. 하닐은 기억 속 인물 감정을 대입하는 연습을 자주 했다. 안 그러면 감정에 잡아먹혀 연기라 할 수 없이 괴물이 되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연기는 구분해야했다.
그리고 여기, 거울 앞에서 실연으로 자살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다른 남자와 놀아난 여자에게 복수하려 했지만 여자에게서 어떤 상처를 줘야할지 몰랐다. 어떤 상처든 마음이 아파 복수를 할 수 없었다. 뒤돌아보면 복수심 따위 없었다. 그저 여자에게 관심을 받고 싶었다. 여자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한다. 남자는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을 항상 생각했으면 바라고 죽었다.
그 감정이 하닐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집착이라 할 수도 있고 포기라 할 수 있는 애매한 경계선을 하닐은 잘 표현했다.
연기 연습은 몇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땀이 한 바가지씩 흘릴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깊은 숨을 들이내시며 시간을 바라봤다. 아직,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눈동자는 바다에 빠진 거 같이 물기를 머금은 듯이 보였다. 허나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이는 눈동자에는 눈물 따위 없었다. 착각이 일어날 만큼 우수성이 짙은 눈동자는 그의 장점이었다.
“......다시 샤워해야겠네.”
땀으로 젖은 셔츠를 들어 올려 찝찝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구석, 장롱을 열었다.
검은 반팔과 같은 색상의 편한 반바지와 속옷을 챙겨들어 계단을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제니를 발견했다. 제니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다가 하닐을 발견하고 서는 멈칫, 굳었다.
잠깐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도 그 어색함은 심히 불편했다.
애써 눈을 돌려 욕실로 들어갔다. 허나, 문 건너편에서 왠지 모르게 비명소리가 들려서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미쳤나? 눈가를 찌푸리며 갸웃거린 하닐은 다시 샤워를 시작했다
한편 제니는 소파에 올라가 쿠션을 열심히 때리고 있었다.
“젠장! 젠장! 땀에 젖은 모습도 앤디 같아!!”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하게 만드는 드라마의 위력에 제니는 괜히 봤다고 후회 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