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린 눈을 껌뻑이며 책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제니 세나는 문이 요란스레 열리는 통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쾅 소리와 함께 나타난 등장인물은 지긋지긋한 올리비아 레이나였다.
"세나! 세나!"
소란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제니에게 반짝 다가온 올리비아 레이나는 제니 어깨를 부여잡았다.
"뭐, 뭐야?"
당황한 제니 음성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할 말을 이어갈 생각만 가득한 올리비아 레이나는 짙게 발린 붉은 입술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동양인 남자! 걔 말이야!"
"동양인 걔가 왜?"
제니 인상은 살포시 찡그려져 있었다.
올리비아 레이나는 그런 제니 반응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드라마 '위치 하이스쿨'에 나온 배우였어?"
"무슨 소리야? 위치 하이스쿨에 나오는 배우라니?"
위치 하이스쿨이라면 제니가 보려고 하다가 매번 놓치게 되는 드라마였다. 방영 시간만 되면 리모컨이 사라져있거나 그 망할 오빠 녀석이 자리를 떡하고 잡아 다른 채널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기에는 사이가 좋은 상태도 아니었으며 저번일로 많이 껄끄러웠다. 그래서 보지 않고 신경을 껐던 걸로 기억했다.
"뭐야~ 너랑 아는 사이라며 그것도 몰랐어? 위치 하이스쿨에 나오는 앤디 무어 맞잖아?"
"앤디 무어?"
제니는 눈을 껌뻑이며 교실 안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반 여자애들이 앤디 앤디거리는 걸 몇 번 들었다. 도중에 여자애들 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타일러 윌슨'은 위치 하이스쿨에 나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앤디도 그중 한명이겠거니 했는데 그 앤디 무어가 우리 집 그 녀석이라고?
제니는 믿고 싶지 않은 사실에, 입술만 강하게 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제니가 이상한지 올리비아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남을 관찰하는 법 없는 올리비아 레이나는 할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만나도록 네가 도와주면 안 될까? 팬이라서 그래."
".......어쩌다 우연히 만나면 인사만 하는 사이라서. 번호도 몰라."
냉정한 거절에 올리비아 레이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후 "만나게 된다면 꼭 날 불러줘"라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 가버렸다.
흔한 일이라 제니는 고개도 끄덕이지도 않은 채 다시 시선을 책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는데 책으로 향해했던 시선은 움직이지 않고 한 곳만 고정할 뿐이었다.
페이지는 여전히 48p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머리가 엉망인 상태라,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대체 뭐야? 걘.......'
묻고 싶은 게 산더미지만, 학교라서 별 수 없었기에 미간을 강하게 모을 뿐이었다.
-
오전 11시 27분.
강하게 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촬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닐은 목을 풀며 물을 마셨다. 몇 번 해보는 촬영임도 불구하고 긴장은 몸을 무겁게만 했다.
하닐은 저릿저릿하고 오는 눈을 깜빡이며 대본을 바라봤다. 짠내가 물씬 풍겨오는 이 공간과는 달리 대본은 적막한 실내였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대본을 복습하고 또 복습하던 하닐은 촬영이 시작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듯이 금발을 휘날리며 스텔라 루나가 서있었다. 스텔라 루나는 데릴 스미스와 한 폭의 그림 같이 해변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앉아있던 하닐은 턱을 괴며 그 장면을 바라봤다.
인터넷에서 시청자들이 스텔라 루나와 데릴 스미스를 두고 눈이 즐겁다고들 한다. 거기에 자신이 포함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하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날씨 좋다~"
스텔라 루나가 가볍게 몸을 돌며 빙긋이 웃었다.
데릴 스미스는 스텔라 루나와 눈을 가볍게 마주치며 피식 웃더니,
"이게 날씨가 좋은 거냐? 더워 죽겠다. 죽겠어."
라며 분위기에 찬물을 부었다.
"추운 것보다 더운 게 좋지 않아?"
"글쎄. 날씨도 날씨 나름이지. 바람만 강하고 칙칙하기 그지없잖아."
틱틱거리는 말투에 스텔라 루나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앞서 걸어갔다. 그런 스텔라 루나를 데릴 스미스는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그 미묘한 감정을 잘 살리고 있는 데릴 스미스의 연기력은 가히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어린 나이에 인기가 많은 이유가 있었다.
씬이 끝나고 나서 데릴 스미스는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거리며 털썩 그 옆자리에 앉았다.
"바다라고 다 시원한 건 아냐 그치?"
적지 않은 땀을 훔친 데릴 스미스 말투는 꽤나 정감이 갔다. 시원스러운 외모만큼 성격도 좋은 데릴 스미스와는 많이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니까."
"그나저나........ 너도 참. 대본을 벌써 거기까지 읽고 있는 거야?"
"뭐. 손해 볼 건 없잖아."
"성격 한 번 꼼꼼하네. 입 한 번 더러웠으면 앤디 무어가 딱, 넌데?"
"많이 다르지 않나?"
하닐은 대본 페이지를 넘기며 고갤 갸웃거렸다.
앤디 무어는 절대 소심하다고 할 수 없는 마이페이스 경향이 강한 역이다. 그 반대로 하닐은 예전부터 받아온 가시 같은 시선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게다가 음울함 성격까지 있다. 반대로 앤디 무어는 음울하기보단 신비주의에 가깝다.
"많이 다르지는........ 않은 거 같은데?"
목을 축이며 이쪽으로 걸어와 말하던 스텔라 루나가 코앞에 다다르자 그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스텔라 루나를 멀뚱히 바라보자 더더욱 빤히 보는 시선에 눈썹을 긁적였다. 사람을 관찰하는 시선은 뭐가되든 부담스러운 법이다.
"특유의 표정이라던가, 행동이 닮았잖아?"
"그건,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라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격도 닮았단 말이야. 성격이 비슷하니 그 캐릭터 특유의 분위기가 닮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
하닐이 잘 모르겠다는 듯이 웃으며 스텔라가 하는 동작과 표정을 살펴봤다.
그녀의 특징을 대충 설명하자면,
도도하게 올라간 눈매는 약간 고인 눈물을 떠오르게 하는 청순함이 깃들었다.
그 얼굴에는 항상 싱긋 웃는 버릇이 있었다.
윗입술을 말아 올려 한 쪽 입고리가 올라가서 시니컬한 비웃음으로 보일 때가 있었고, 크게 웃으면 눈이 반달로 접혀, 하얀 치아가 잘 보이는 환한 미소가 된다. 웃음소리는 또 어떻고?
'우하하하!' 우렁찬 웃음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다.
그 특유 표정과 행동이 연기에서 절대 볼 수가 없다는 게 신기할 따름.
역시 배우는 배우란 걸까? 버릇조차 없애버린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버릇이 있었는지 헷갈린다.
지금, 하닐 옆에 있는 데릴 스미스도 마찬가지라 더 헷갈렸다.
"좋겠다~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쉬울 거 아냐."
데릴 스미스가 대본 페이지를 펄럭이며 투덜거렸다. 하닐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안 닮았는데.'라고 속으로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 촬영 시작합니다!!"
하닐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옷을 추스렸다.
카메라에 담을 배경으로 걸어가 대본을 떠오르며 속으로 연기를 되뇌었다.
하닐 앞에 있는 등장인물은 '안젤리나 브라운'
자신은 '앤디 무어'다.
"레디 액션!"
[ 앤디는 요새 신경 쓰이는 여자애가 있다. 새벽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졸린 눈을 껌뻑껌뻑 하품을 하는 동시에 시선은 우연히 마주친 그 여자애에게로 향한다. 여자애는 불만인 걸음으로 씩씩대며 걷다 앤디와 눈이 마주친다.
"어, 라? 너 여기서 뭐해?"
"바다 보러 왔는데. 넌 여기 혼자서 온 거야?"
".......그건 아니지만. 너야말로 혼자야?"
"응."
"바다를 혼자서 왔다고?"
놀라워하는 안젤리나 모습에 앤디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진난만하게 보일 정도인 웃음이라 안젤리나는 당황했다.
"진짜....... 넌 특이한 애야. 엄청나게......."
"근데 누구랑 온 거야?"
"아. 가족이랑."
거짓말에 능숙한 안젤리나는 시선을 잠시 피했지만 다시 똑봐로 앤디를 바라봤다. 앤디는 안젤리나 녹안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깔았다. 들이우는 속눈썹은 굉장히 기다랗다.
"가족들은 어디에 가셨어?"
"아, 호텔에 있을 거야."
앤디가 그 말에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럼. 바다에는 지금 우리 둘뿐이네."
"뭐....... 뭐 그렇지."
앤디는 침을 꿀떡 삼켜 안젤리나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생기는 이 분위기.
앤디랑 있을 때면 자주 생기는 이 묘한 분위기.
오랜만이다.
타일러랑 있을 때면 상상도 못할 분위기다.
“있잖아.......”
멈칫멈칫하며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안젤리나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윽할 정도로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에 안젤리나는 녹안을 껌뻑이더니 코앞에 앤디가 있자 눈을 감았다. 어느새 서로가 팔을 뻗어 달콤한 진한 키스가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네. 지금 뭐하냐?"
타일러 윌슨이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끝!? 이게 끝이야!?"
제니는 모니터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썼다.
끝난 드라마에서는 ost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장엄하게도 펼치는 ost는 제니의 심기를 아주 건들이고 있었다.
미국 드라마치곤 진도가 잘 안 나가는 드라마라 답답했다가 이제야 나가나 싶었는데 끝이라니!!
제니는 허무한 눈동자로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컵에 있는 물을 다 마셨지만, 아직도 열이 올라서 목이 무척이나 메인 제니는 컵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 아래층 계단 봐로 옆에는 욕실이 있었는데, 그때. 물이 벌컥 열리며 뜨거운 김과 함께 하닐이 나왔다. 하닐은 두른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걸어 나오다가 굳어있는 제니 때문에 시선을 제니에게 두었다.
느린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호박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색스러웠다.
젖은 머리 때문일까? 남자면서도 청순하게 보일 정도였다. 남자가 청순하게 느끼다니 제니는 제 눈이 드디어 미쳤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몽환적이면서 뭐 이리도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일까?
자세는 어떻고 대나무를 보는 것처럼 단단하게 꼿꼿했다. 정갈한 느낌이 저절로 들었다.
알로에 향은 그 분위기를 배로 만들었다.
달콤한 비누 향과 섞인 알로에는 새삼 코를 자극시켰다.
알로에가 자극적인 향기는 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
굳어있는 제니를 의문어린 시선으로 보던 하닐이 시선을 거둔 채 제니를 지나쳐 2층으로 올라갔다.
제니는 달콤한 알로에향이 점점 멀어지자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현실감이 없어."
아까 모니터에 봤던 앤디가 우리 집에 있다니.
현실감이 없어졌다. 비록 계속 보던 오빠지만......,
제니는 눈썹을 긁적이며 모니터 속 앤디 특유 분위기가 살아있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나저나.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저 오빠가 원래부터 저런 분위기였나? 갑자기 평소보다 달라진 거 같은데.......'
갸웃거린, 제니는 의문이었지만 모니터를 계속 들여다본 현상이라고 느끼며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하닐에게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겠는가?
애초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낄 일이 아니었다.
좀 더 친한 사이라면 납득이 가겠지만 말이다.
“아차, 물!”
멍하니 아까 느낌을 곰곰이 생각하던 제니는 점점 타오른 목마름에 재빨리 주방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