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닐은 엉덩이가 저렸다.
만날 며칠 앉아 있는 뒷모습을 찍는데 엉덩이가 안 저릴 수가 없었다. 교실안 분위기는 시끌벅적한데 자신 혼자 동 떨어져 앉아 가만히 앉아 있는 꼴인데 대사라는 것도 없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라 자세를 흩뜨리면 귀신 같이 알아 감독이 똑바로 하란다. 결국, 똑같은 자세를 계속 해야 했다.
허리는 꼿꼿이 피고 시선은 책을 향해 있어야 했다.
마치 정갈한 대나무처럼 말이다.
동양인 이미지를 이런데서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바른 자세를 하고 있어야했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히도 대사 한 줄은 있었다.
교실에서 공놀이를 하던 반 남자애가 장난이라는 이유로 공을 자신이 맡은 역 '앤디'에게 맞춘다. 앤디는 그 공을 맞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를 든다.
그때의 대사가
"내 머리가 과녁인 줄 알아? 이 미친것들아."
중지를 들어 남자애에게 쌍욕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표정은 한없이 무표정으로 자세는 여전히 반듯해야 한다는 캐릭터 설정을 잊지 않아야했다.
다행히도 어려운 장면은 아니었다.
전생에 드문드문 나는 기억을 붙잡아서 하면 더 쉬웠다. 마치 암흑기를 걷는 듯한 배우라 떠오를수록 우울하기 그지없었지만 익숙한 우울함이었다.
어느새 그 우울함은 무표정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가만히 일자로 되어 있는 정갈한 눈썹 아래 호박색 눈동자가 피곤함으로 얼룩져 있어 퇴폐적이었다. 일부러 입가에 딱지가 앉은 상처를 만드는 메이크업을 해두었는데 그 모습이 더욱 그를 퇴폐적이게 만드는 요소로 만들었다.
카메라에 시선을 떼지 못한 그렌 버스틸 입가에 하얀 이빨이 크게 보였다. 상상만큼 자신이 원하는 영상미였다. 주변 스탭들도 그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렌 버스틸은 내 눈은 틀리게 없다며 혼자 만족하고서는 하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첫 대사였지만 표정만큼 발성, 톤 같은 게 어색하지 않았다. 첫 연기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대사 한 줄이 끝나고서 다시 배경 역할을 하기 시작하는 하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튀지 않은 배경이었을 텐데. 대사를 하고 난 후 시끌벅적한 그 교실 안에서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다른 스텝들도 마찬가지인지 조금씩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모로 분위기를 장악할 줄이야. 어떤 의미론 놀랍네요."
"남자배우 중 그레이 에드워드 이후로 이런 일이 벌어질 일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레이 에드워드'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외모에 감탄하고 두 번째로는 연기에 감탄하게 된다는 배우다.
영화마다 여배우의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가져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배우보다 더 시선이 가는 남자배우'라며 우스갯소리로 떠들고 다녔다.
저 앞에 있는 '하닐 세나'는 동양인치곤 색소 없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정갈한 눈썹 아래 쌍꺼풀이 없고 눈을 치켜 뜰 때만 연하게 생긴다. 또 속눈썹이 꽤나 길어 순한 눈 고리에 그림자가 져있있다. 게슴츠레 떠진 눈 바로 아래는 매력 점과 또 선이 예쁜 높은 코가 자리 잡았고 연분홍 입술이 색스러웠다. 턱 선은 날렵하지만 선이 분명해서 옹졸하게 있는 이목구비를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미친 듯이 잘생겼는데
분위기 또한 남다른 배우다.
그의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분위기 때문일까?
아직 파악은 안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첫 대사를 듣자마자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저 동양인 배우가 이 할리우드에서 커다란 역사 한 줄을 남길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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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 크리스티나는 침대 아래에 숨겨 놓은 과자 몇 개를 꺼내들고 소파 앉았다. 가장 이상적인 편한 자세로 말이다. 아벨은 하품을 시원스레 하며 리모컨을 쥐어 TV를 켰다. TV는 반짝이는 불빛과 함께 껌뻑이더니 잘생긴 외모 배우와 예쁜 배우 얼굴이 나왔다.
아벨은 지루한 눈동자로 티비를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채널을 돌리려했다.
그 동양인만 나오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색 좋은 밝은 갈색 머리 동양인은 창가 아래 앉아 호박색 눈동자로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동양인은 꼿꼿한 자세로 칠판을 바라보며 필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섹시해보일 수가 없었다. 아벨 반에 있는 필기쟁이들은 하나같이 심심하게 생겼거나 다른 의미로 재미있게 생겼는데 어째서 저 동양인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갈 거 같은 예술작품인지. 아벨은 그가 거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드라마가 재미있는 현상을 겪었다. 화면은 빠르게 지나가고 여자 주인공인 배우 '스텔라 루나'가 나왔다. 지루한 눈동자로 턱을 괸 채 수업을 듣고 있던 스텔라 루나(안젤리나 브라운역)의 독백이 시작 되었다.
[아무리 봐도 타일러 윌슨 걔는 아직까지는 어려워. 나한테 넘어왔나 싶다가도 싸가지가 없어져.]
스텔라 루나는 다른 목표감을 찾듯이 교실 안을 훑어보다가 중앙 맨 첫줄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동양인을 바라봤다.
[쟤는....... '앤디 무어'라고 했나? 공부만 하는 녀석이라 타일러 윌슨 보다는 쉬울 거 같은데.......]
스텔라 루나. 그러니까 안젤리나 브라운은 두터운 입술을 깨물며 앤디 무어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벨은 스텔라 루나 외모에 감탄하면서 '앤디 무어'역을 바라봤다. 카메라 안에 작은 먼지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눈을 껌뻑이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흰자위에 또렷한 호박색 눈동자가 시선을 느꼈다는 듯 뒤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정갈한 눈썹이 의문으로 찡그리더니 입가의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분명 저 입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그려졌다.
푸근한 동화책 그림이 상상되듯, 목소리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착각이란 과히 신비했다.
[뭘 꼬라봐?]
응?
안젤리나 브라운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다.
그런 그녀에게 앤디 무어는 가차 없이 목을 만지는 척 하더니 교사 몰래 정 가운데 손가락을 고이 선사했다.
[저게!]
새된 소리가 이빨사이에 비집고 흘러나왔다.
교사가 그런 안젤리나 브라운에게 의문을 표했지만 안젤리나 브라운의 어이없음으로 가득한 시선은 여전히 고정되어있었다.
장면이 순식간에 바뀐다.
여전히 교실 풍경이었지만 수업시간이 아닌 쉬는 시간이었다.
떠들썩한 자리에서 짓궂은 반 남자애들을 피하며 앤디 무어에게 간 안젤리나 브라운은 동그란 뒤통수를 시원하게 보이며 고개들 줄 모르는 앤디 무어 정수리를 두드렸다. 약간의 간지러움에 앤디 무어는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의아함에 굴러가는 눈동자가 땡글땡글했다.
[아까 뭐야?]
[뭘?]
[아까 그 손가락 뭐냐고]
[그것도 몰라? 그만 꼬라봐. 뒤통수 따가우니까 빠큐.]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중지를 보이는 그 자태란 고고해보일 지경이었다. 안젤리나 브라운은 눈을 까득 뒤집히며 앤디 무어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앤디무어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
[내 머리 위에서 그림자 들이우는 거 그만해주고 가줄래? 복습에 집중이 안 되잖아.]
[그렇게 공부해서 인생이 뭐가 즐거운데? 청춘을 공부에 다 쓰기에는 아깝지 않아?]
[그건 그렇네. 근데 이제 와서 청춘을 즐겨보자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색하잖아? 애초에 내가 공부하는 건 부모님 기대도 있지만 공부가 싫은 것도 아냐. 은근히 재밌기도 하고 중독성이 강하기도 하고.]
[너 진짜 특이한 애구나?]
[글쎄. 난 네가 공부를 아예 안하는 게 특이하게 보이는데?]
드라마의 내용은 한동안 앤디 무어와 안젤리나 브라운의 대화로 시간을 잡아가다가 남자주인공의 등장 후 앤디무어는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배경인척 녹아들고 있었다.
시간은 짹각짹각 흘러갔다.
드라마는 후반부에 달려갔고 농구시합 도중 공이 안젤리나 브라운 얼굴로 날아갔다. 그때 남자주인공 타일러윌슨이 재빠르게 손으로 잡아내면서 드라마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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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닐은 촬영이 끝나자 졸린 눈을 비비며 걸어갔다.
내일도 있을 촬영을 위해 하닐은 곧바로 올라가지 않은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목표를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고개는 근처 숙박에서 머물기 위해 주위를 잘 살펴보고 있었다. 이내 가장 깔끔해 보이는 숙박소에 들어갔다. 활짝 열린 문으로 숙박소에는 카운터에서 백인 아주머니가 책을 읽고 있었다.
하닐은 옆에 있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똑똑.
“하룻밤 지내려고 하는데요.”
아주머니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다가, 하닐을 보고선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하닐은 그 미소에 ‘아. 잘못 걸렸구나.’ 라는 직감이 팍 들 수밖에 없었다.
“여긴 시끄러운 사람은 안 받아요.”
“.......제 목소리가 많이 시끄러웠나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컴플레인이 가장 많이 들어올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그중에서 위층에서 시끄럽다. 아래층에서 시끄럽다. 옆이 시끄럽다에요. 그게 다 누구였던 거 같나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누구였나요?”
“모두 다 당신 같은 중국인이에요. 이제는 중국인 상대하기도 싫으니까 딴 곳 알아보세요.”
“맙소사....... 전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입니다.”
“미국에 산다고 중국인이 아닌 건가요? 부모님 고향은 어딘가요?”
“엄연히 미국입니다.”
“어우, 그러면 조상의 고향은요? 어서 빨리 네 나라에나 가시죠. 남의 나라에서 피해 주지 말고 말이에요.”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였다.
하나하나 상대하기 벅차서 무시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많이 언짢았다. 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평소에는 별 마음에 두지 않다가 갑자기 예민해지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게다가 피곤해죽겠는데 이 아줌마가 사람을 더 피곤하게 했다.
당연히 하닐 말투가 고울 리가 없었다.
“그거 참. 말 잘했네요. 저도 묻고 싶네요. 댁의 조상은 어디서 오셨나요? 애초부터 본래 나라로 꺼지라고 하는데 그 조상은 왜 원주민들을 다 죽이고 흑인들을 노예로 만들어서 미국으로 끌고 왔으면서 다시 꺼지라는 헛소리를 나불거리는지 묻고 싶네요.”
“뭐......?”
“그리고 제 조상 또한 중국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이지요. 모든 동양인이 중국이라는 그 뇌 주름 없는 소리 따위 듣고 싶지는 않았네요.”
“.......”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 시선에 하닐은 싸늘히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뒤에서 온갖 욕이 들려왔지만 못들은 척 숙박소를 나왔다.
하닐은 빠른 걸음으로 숙박소에서 점점 멀어지자 옅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감싸 안아 쥐었다. 피곤해. 정말 피곤했다.
감정소모는 연기 말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피곤함으로 반쯤 뜬 눈으로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 그를 찍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