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닐은 미간사이 가만히 찌푸리며,
눈앞에서 당돌하게 웃고 있는 성숙한 금발 여자와
어렸을 적 찢어진 눈을 열심히 흉내 내는 금발 꼬마와 겹쳐 보았다.
분명 차별하고 괴롭히던 애들 중 한명인 거 같은데 미소를 지으며 '사귀자'라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열심히 동양인 비하하던 것을 말이다. 대놓고 보이는 구김살 있는 표정에 당돌한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뭐야. 나랑 사귀기 싫은 거야?"
"졸리.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큰 실수야."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라도 안 그러겠어? 인종차별 했던 대상이랑은 사귀지는 않을 거 아냐."
"어......."
졸리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어갔다.
하닐은 그런 그녀에게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졸리는 그런 하닐을 서둘러 붙잡았다.
"잠깐! 세나!"
하닐은 불쾌하다며 손을 털었다. 자신을 만지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졸리는 그런 하닐에게 양 손바닥을 보이며 진정하라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기억 안 나는 건 아냐. 인정할게. 하지만 세나 그건 어렸을 때 일이잖아. 제발.......세나. 우리 잘 지내왔잖아."
"잘 지내왔다고? 그건 네 착각인 거 같은데. 난 너와 잘 지낸 기억이 없어."
하닐은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가끔 하닐에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친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 말에 졸리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입을 벌려 하닐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시선을 흘려보내듯 몸을 돌렸다. 다시는 붙잡지 말라며 강하게 인상을 쓴 채 말이다.
서둘러 발걸음을 놀리며 답답한 와이셔츠 단추 몇 자락을 풀었다. 뒤에서 또 다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모른 척 했다.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분명 자신에게 상처를 준 애들이었는데 하닐이 커갈 수록 하닐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닐은 그 관심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하닐은 과거가 좋지 않았다.
나름 행복해지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언제나 제자리였다. 그래서 일찍이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는 꼭 갖고야 말겠다는 주위로부터의 사랑 말이다.
하닐이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하닐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애가 못마땅했다. 자신은 그냥 교사가 정해준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냄새난다며 코를 막지 않나 찢어진 눈을 흉내 내지 않나 원숭이 소리를 내지 않나. 하나같이 하닐의 신경을 건들었다. 그런 그녀를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무시만하자 여자애는 더 약이 올랐는지 친구와 함께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괴롭힘이 시발점이라는 듯이 다른 아이들도 동참했고 상상하기 싫은 초등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하필 그때부터 이상한 꿈이 들이닥칠 때라 더 괴로웠다. 중학생이 되고나서도 그 여자애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대응하는 법을 터득해 있었다.
무시를 하거나 때론 도가 지나치면 미친놈처럼 싸웠다. 인종차별은 인간으로써 해선 안 되는 것 중 하나이기에 그들은 많이도 혼나고 처벌도 받았지만 포기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마다 대응하느라 피곤함은 날로 갔지만 빈도는 낮아졌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언제 있었냐며 고백을 해왔다.
서서히 성에 눈뜰 나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괴롭힌 사람에게 고백이라니 대체 무슨 머리에서 나온 건지 모를 일이다.
걔네들 말로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서 그게 괴롭힘으로 나타났다고들 말하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
하닐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늘따라 너무 더워서 머리카락이 귀찮게도 달라붙는다. 땀방울을 귀찮다는 듯이 쓸고 있자니 불편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하나같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었다.
눈살을 가만히 찌푸리며 뒤도 돌아보고 옆도 바라봤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무언가는 없어보였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오랜 동안 바라보는 것은 가끔이었다.
불편한 속내를 가리지도 못한 채 걸어갔다.
망할 시내. 하필이면 사람은 많아가지고 쳐다보는 게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자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잠깐!"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렇게도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느 사람들처럼 무의식적으로 뒤돌아보자 웬 체구가 작은 흑인 남성이 숨을 몰아쉬며 자신 앞에 서있었다.
하닐이 버릇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요?"
그 물음에 그는 아차차!하더니 주머니에 명함을 꺼내들었다.
"그렌 버스틸?"
작게 중얼거리듯 이름을 읊었다.
버스틸은 그런 하닐에게 손을 뻗어 쾌활한 목소리를 내었다.
"드라마를 찍을 예정인데 너도 같이 해볼 생각 없어?"
"......."
하닐이 그를 의심스레 훑어 본 후 "미안해요." 라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렌 버스틸은 다급한 동작으로 하닐을 붙잡았다.
"잠깐! 잠깐! 왜 이렇게 성급해? 설마 내가 왜소하다고 날 못 믿는 건 아니겠지?"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요."
체격이 작은 게 콤플렉스인지 꺼내지도 않은 말로 사람을 모함하고 있다.
황당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렌 버스틸은 아랑곳없이 하닐에게 자신의 볼일을 꺼내들고 있었다.
"잘 생각해봐. 이건 기회야!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역할이 적은만큼 많은 동양인 배우들이 이 역을 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나는 그 기회를 너에게 주는 거라고! 게다가 이 역할이 얼마나 매력적인데!"
하닐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바 갈 시간이다. 늦으면 그 고지식한 사장님에게 한소릴 들을 거 같으니 무시하고 가는 게 상책일 거 같다.
하닐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그렌 버스틸이 계속 그 뒤를 졸졸 따라오며 입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무시하며 걸어갔지만 알바 하는 곳 까지 따라올 기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에요?"
"그건 네가 할게요!라고 말할 때까지야!"
그렌 버스틸은 하얀 이빨을 보이며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기가 막힌 하닐이 다시 무시하듯 걸어가며 말했다.
"제가 알바 하는 곳에 피해를 주면 신고할 예정이니 피해는 주지 맙시다."
"그건 당연하지! 내가 그렇게 개념이 없는 사람은 아니야."
눈을 게슴츠레 뜨며 그 말을 곱씹었다.
정말 뻔뻔해서 신기할 정도다.
하닐이 들어간 곳은 패밀리레스토랑이었다. 서빙을 하는지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앞치마를 맨 후 손님에게 다가가 주문을 받았다.
그렌 버스틸은 구석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관찰했다. 아까의 쾌활한 구석은 사라지고 진중해진 모습이었다.
혼혈인은 아닌 거 같은데
저 옅은 갈색머리가 처음에는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호박색 눈동자는 햇빛에 비추니 더욱 투명해보이고 색소가 옅어보였다. 동양인에게 흔하지 않은 눈동자는 이국적인 외모에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머리를 쓸어 넘기니 반듯한 이마는 어떻고,
정갈한 눈썹에 힘을 주니 몽환적인 분위기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저 동양인을 화면에 담으면 영상미는 획득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렌 버스틸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마저 영상미가 가득하다고 느끼며 하닐을 이곳저곳 살펴보는데 집중했다.
한편 하닐은 자신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주제에 주문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손님. 주문은 뭘 하실 건가요?"
그렌 버스틸은 목소리마저 좋다며 고개만 끄덕이기 바빠 보였다.
그런 그렌 버스틸을 황당하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낯 뜨거운 소리를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단 말인가?
하닐의 반응과는 달리 그렌 버스틸은 그가 어떻게 하면 자신을 믿어줄까 고심하다가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자신 이름을 쳤다.
그러자 자신 이름과 얼굴 그리고 작품들이 나열되어 나왔다. 그렌 버스틸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코앞에 그것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코앞이라 흐릿하게 보이기만 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닐은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아하하! 이게 바로 장난이라는 거지!"
정말로 쾌활한 웃음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조금 떨어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유명한 영화나 드라마가 나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다'였다.
엄청난 영상미와 스토리로 사람들의 눈물샘을 터트렸다는 영화였다. 시간이 흐름에도 명작이라고 불리 우는 그 영화 말이다.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는 자가 그런 감독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닐이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렌 버스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드시 내 드라마에 나와야 돼. 넌. 그래야 내 드라마 완성도가 높아질 거 거든"
그렌 버스틸은 영상미의 목숨을 내밀고 다닌다고 유명한 감독이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자제했다.
그런데 그 영상미의 대한 욕구를 하닐이 자극시켰다. 그것도 엄청나게. 침이 매마를 겨를 없이.
하닐은 그런 그렌 버스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듯이 시선을 아래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렌 버스틸은 한 순간 조차 놓치기 싫다는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끝내 하닐이 마지못해한 대답이 만족한 그렌 버스틸은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