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죄송해요."
그녀는 금방 꺼질 거 같은 힘없는 소리에도 아이를 원망하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그 못된 말들과 행동에서 오는 가혹함이 그 아이를 무겁게 눌렀다.
아이는 지금 이 순간, 나락에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며 빌었다. 필사적이었다.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태도였다.
그녀는 그런 아이 모습에도 눈빛하나 바꾸지 않았다. 여전한 눈빛으로 아이를 비판하며 다 ‘네 탓이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아.
난 역시, 이들 사랑은 받을 수 없는 존재였구나,
나는 애물단지였구나. 그래. 모두 다 내 탓이다. 내가 주의 있게 제니를 잘 돌봐야 했어. 장난감을 거기다 두는 게 아니었어. 애초부터 모래장난을 하는 게 아니었어.
항상 알고 있는 사실을 또 한 번 되새기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아는가? 아이는 저릿하고 오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조용히 오는 바람은 그런 아이 심정을 위로해주는 듯 솨아아-. 하고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 이 더러운 강간마의 새끼! 죽어! 죽으라고!]
그 바람과 함께,
여자의 새된 소리가, 아이 뇌를 강타시켰다.
아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듣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무언가의 끈을 잡으려 했지만 파도처럼 몰려오는 그 무언가는 아이 뇌를 더 한 번 흔들었다.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때려서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이 새끼가 무슨 수작이야!!?? 너도 네 어미처럼 자살하려고 그래!?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예쁜 아념아. 이 아줌마가 아주 좋은 것을 알려줄게.......]
[괜찮지? 이아념. 너도 같은 남자니까 좋았잖아?]
[그래. 그 표정....... 정말 좋아. 커서도 어려서도 여전한 그 표정. 그 표정이 네가 날 사로잡았어.]
더러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언가는 아이 목을 조여왔다.
아아. 또 시작이다.
그 더러운 무언가가 자신이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되고 있다.
분명, 침을 질질 흘리며 추한 꼴을 보이고 비명을 지르겠지.
아이는 급히 배를 접혀 얼굴을 가렸다.
급하게 세게 베어 문 입술에서 피 맛이 비릿하게 났다.
이번에는 또 누구의 기억이니?
너의 이름은 ‘이아념’이니?
아이는 고통스럽게 오는 기억와중에도 그 기억에게 말을 걸었다.
항상 슬픔으로 가득한 기억은 자신이이면서 자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여린 아이는 그 기억에게 항상 말을 걸었다. 스스로 터득한 위로의 방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고 타인이라고 주문을 거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더럽다. 너무 더럽다.
이 세상 나보다 더러운 것은 없다. 바퀴벌레보다 더럽고 걸레 보다 못한다. ]
[나는 내가 아니고 싶다. 연기를 하고 있으면 내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일 뿐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있다가 다시 한 번 작품이 끝나니 또 한 번 내가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영원히 다른 사람이고 싶다.]
[살고 싶은데 항상 숨이 막혔다. 연기는 즐겁지만 내가 살고 있는 한 이 악몽이 끝나지 않을 거 같았다. 어서 끝이 왔으면 이 악몽에서 끝이 왔으면 하고.......바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를 도와주시고 믿어 주신 분들과 사랑하는 팬 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너는 항상 슬픈 아이구나. 내가 저번에 보았던 ‘유안혁’이라는 애는 항상 ‘죽인다.’라는 말밖에 안하는 복수로 가득한 아이였어. 그래. 너는, ‘나는 더럽다’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아이구나.
아이는 흘러나오는 눈물과 피 맛을 느끼며 머리와 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조용히 감내었다. 한참이나 괴롭게 울리는 소리와 같은 것이 멈추었을 때 쯤,
귀에서 들리던 소리도 멎어갔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표독한 세나 부인이 팔짱을 끼며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 표정에 무언가를 보았는지 놀란 눈을 하고 서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그 표정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세나 부인은 아이에게 “빨리 들어와서 씻기나해!”라는 조금 수그러든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는 흐르는 침과 피를 대충 닦고 선, 주춤거리는 동작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정처 없이 흘러갈 때 쯤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있던 세나 부인은 현관문이 열리자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에릭! 병원에서 뭐래? 제니는 괜찮은 거래?”
“안심해. 조금 자기만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
“휴........ 다행이야.”
세나 부인은 제니를 깨지는 유리처럼 안아 눈을 감았다.
제니는 칭얼거리며 세나 부인 목에다가 팔을 둘렀다.
에릭은 집안을 훑어보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세나 부인은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하닐이라면 지금쯤 자고 있어.”
“하! 기가 차는군. 누구 때문에 동생이 그 모양 그 꼴인데 잠이 와?”
“내버려둬. 지금 몇 시라고 생각해? 내가 자라고 한 거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하여간 맘에 안 들어.”
정상적인 부모라면,
‘많이 놀랬으니........ 지칠 만도 하겠지.......’ 라거나
‘많이 놀랐지? 괜찮니?’
‘미안하구나. 너에게 안 좋은 기억을 줬구나. 그때 내가 함께 있었다면........’
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애초부터 하닐은 아이다. 그 아이와 그 동생을 돌보는 것은 부모 책임이 아닌가?
에릭은 그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서슴없이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한편, 세나 부인은 찝찝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그 표정이 세나 부인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빨리 재운 것은 그 표정이 너무 껄끄러워서였다.
멍하게 풀린 눈동자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오고 있었다. ‘헤’하고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나오고 입술 주위에 핏자국이 있었다. 입술을 강하게 물었다는 증거였다.
아이 표정이 아니었다.
어디 나사가 풀린 사람의 표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다른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고도 괴롭힌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세나 부인을 소름끼치게 했다.
세나 부인은 또 한 번 오는 소름끼침에 팔을 문지르며 제니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기분 탓이야.
세나 부인은 짙게 오는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해 직접 보았던 그 표정을 부정했다.
-
기억들이 항상 괴로움과 슬픔만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불쾌한 핏덩어리와 같은 검은색 구가 떠다니는 감정을 느꼈는가 하면, 따뜻한 노랑색 털 뭉치와, 초록색 비눗방울이, 뇌에서 몽글 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벅차오른 행복함이 아이를 지켜주고 있었다.
아이는 옷장 속 냄새가 짙게 배어져있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은 채 초록색 감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덧없이 그 기억은 괴로운 일만 가득했다.
스멀스멀 또다시 오는 불쾌감에 아이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기억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해.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
“책 읽는 거 말고도 뛰는 걸 좋아해. 심장은 괴로운데 그 소리가 좋아. 두근두근 들리는 그 소리와 함께 주변이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게 좋아.”
아이는 기억이 끝날 때까지 끝없이 물었다.
기억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물어보는 것들을 알 수밖에 없었다.
기억은 잠시 끝났다가도 다시 한 번 시작되기도 하고 드디어 끝인가 하면 또 다시 괴롭혔다. 그 기억은 파도처럼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했다.
점점 오는 지침에 아이는 풀린 눈으로 침을 흘리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땀은 식은땀으로 절어져 있었다.
끝내 그 기억은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하. 역시나........”
아이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침을 닦아내었다.
그 미소와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은 쉴 새 없었다. 아이는 침과는 달리 눈물을 닦아내지 않은 채 눈을 조용히 감았다. 그렇다. 아이는 쥐 파먹듯이 오는 가슴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 맘대로 하겠다는 것을 생각 할 수조차 없었다.
그냥 감정 소용돌이에 몸을 맡긴 채 인내하고 되씹어서 면역을 기르는 법 밖에 없었다.
되씹을수록 아픔은 배가되지만 해답을 찾지 않으면 멋 모르고 오는 아픔에 큰 코 다칠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이는 어린나이에 아픔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며, 아픔을 참아내는 법을 알았다. 병이 될 거 같으면 뛰거나 책을 읽으면 침체되지 않기도 했다.
책 속은 자신이 아닌 남이 될 수 있었고, 뛰는 건 터질 거 같은 심장이 터질 거 같은 뇌를 오히려 쿵쿵 뛰는 것처럼 생각을 가로막게 했다.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닌, 뇌가 뛰는 거 같은 느낌으로 죽어라 뛰었다.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졌다. 아주 조금은 괜찮아졌다. 어차피 과거니까. 현실이 아니니까. 괜찮았다.
오히려 슬픔보다 복수라는 감정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것은 제어가 되지 않았고 흥분으로 날뛰었다.
“........너는 그것이 연기였구나.”
자신이 책을 읽는 거처럼,
기억은 연기를 함으로써 자신이 아니고 싶은 거다.
기억은 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삶을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웃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은 알고 있었다.
아이는 온 몸이 무거워지는 감정과 기억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검으로써 지쳐 잠이 들었다.
“잘 자......”
답답한 심장은 좀먹는 듯이 아이를 갉아 먹으며 영원히 아이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아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누군지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라 떼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