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괴물에게
누구나 평생에 몇 번쯤은 무언가에 온전히 마음을 뺏긴다.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 대상은 (내 눈에만) 매력적인 이성일수도 있고, 영화나 노래, 그림 같은 예술작품일 수도, 장소나 취미일 수도 있다. 사로잡힌 우리는 밤낮 그것에 관해서만 생각하며, 내 모든 말과 행동이 그것을 향하게 된다. 그저 '좋아한다'가 아니라 '흠뻑 빠졌다', '좋아 미치겠다''~없이는 못 산다'가 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온전히 사로잡혔던 적이 언제였더라... 까마득하다. 이제는 모든 것에 시들해진 지루한 어른이 돼버린 걸까.
산이는 눈이 땡그랗고 몸집이 자그마한 우리 반 남학생이다. 며칠 전 같이 입학했던 반친구들 옆에 서면 꼭 두 살쯤 어린 동생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산이에게는 세 살배기 이란성쌍둥이 동생들이 있었고, 산이가 맏이라 보고 배울 형이나 누나가 없었다. 부모님도 산이의 성장에 특별히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산이는 행동이 많이 어렸다. 두 주간의 입학적응 활동들을 끝내고 본격적인 교과수업을 시작하자 산이의 어려움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공부시간 교사의 지시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교과서를 혼자 꺼내지 못했다. 딱딱한 책상과 의자에 제대로 앉아있지 못해 늘 의자 위에 쭈그려 앉거나 바닥에 앉아있거나 했다. 또 필통이나 연필을 자주 빨고 조용해야 할 순간에 "정말 싫단 말이야!" 같은 마음속 이야기를 크게 내뱉곤 했다. 발표할 때는 화제에 상관없이 늘 바다괴물 얘기만 했다. 내 얼굴을 그릴 때도 친구 얼굴을 그릴 때도, 우리 학교를 그릴 때도 늘 바다괴물만 그렸다. 쉬는 시간에는 주로 교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바다괴물 흉내를 냈다. 친구들이 자신과 같이 바다괴물놀이를 해주지 않는다고 나에게 이르곤 했다.
그렇다고 산이가 인지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한글도 곧잘 읽었고 유치원 선생님이 읽어주셨던 책의 내용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체육관에 가서 줄넘기를 하겠어요. 자기 줄넘기를 챙겨서 한 줄로 서 주세요.
선생님!
체육관에 바다괴물 있어요?
줄넘기 말고
바다괴물놀이하면 안 돼요?
이 아이는 바다괴물에 사로잡혀있었다. 대체 어느 TV프로그램, 어느 게임, 어느 책에 나오는 바다괴물을 만난 것일까. 얼마나 압도적인 위용이었길래 이 자그마한 아이를 단숨에 사로잡아버린 것일까. 바다괴물의 어떤 점이 이 여덟 살 아이의 마음을 이토록 쏘옥 빠지게 만든 걸까. 우리는 땅에 살고 있는데 왜 하필 먼바다 괴물일까. 너무도 약하고 소외된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여러모로 생각해 보고 이해하려 애써보지만, 타인의 세계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한때 내가 그토록 사로잡혔던 키아누리브스, 대금연주나 석사과정 선배, 중드, 배드민턴이 이 아이에게는 지금 내가 보는 바다괴물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