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필사 '어린 왕자' 2

모래에 새긴 치유의 언어

by 김수만

맨발 필사 '어린 왕자' 2


1월 1일,
고흥 남열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새로운 시작에 어울리는 나만의 의식이 필요했고,
나는 '맨발 필사'를 택했다.

겨울 바다는 고요하다.
분주한 소음 대신 오직 파도 소리만 밀려온다.
돗자리 펴고 캠핑 의자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는다.


차가운 모래 위에 서자 겨울의 매서운 기운이 생생하게 올라온다.
영하 5도 칼바람에 얼어붙은 모래는 거칠고 냉혹했다.
얼음송곳 같은 냉기가 발끝을 파고든다.
순간, '이 추운 날 사서 고생을 해야 할까?'라는 의구심이 번뜩인다.

차가움이 임계점을 넘어서는 바로 그때,
발바닥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몸의 모든 신경이 발끝으로 모이며 잡념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비로소 필사할 준비가 된 것이다.

첫 줄을 쓴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어렸을 적 흙 놀이하듯,
'어른'
다음 글자는
'들'
그리고
'은'.
한 글자씩 발끝으로 눌러쓴다.
손으로 쓸 때와는 확연히 다른 묘한 감정이 차오른다.

손글씨는 정갈하고 빠르다.
때로는 생각보다 손이 앞선다.
그러나 발은 다르다.
삐뚤빼뚤한 불완전함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느린 만큼 나는 온전히 '지금 여기'에 머문다.
차가운 모래 감촉, 파도 소리, 겨울 바다의 해방감.
이 모든 요소가 나를 이전과는 다른 사유로 이끈다.

이어지는 문장들 또한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오아시스가 숨어 있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우정을 파는 가게가 없어서 친구가 없는 거야."

발끝으로 새길 때마다 발가락은 시리지만,
그 울림은 몸속 깊이 스며든다.
손으로 썼다면 지나쳤을 이야기들이다.
발로 쓰니 문장의 마디마디가 온몸에 각인된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건져 올린 글귀를 새길 차례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하게 된 것은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 문장을 쓰는 동안, 지난 27년간 '책사모'에서 함께한 300여 권의 책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매월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쌓아 온 추억.
그 시간은 결코 기성품처럼 살 수 없는 것이다.
책사모는 어린 왕자 말처럼 정성으로 가꿔온 나의 장미꽃이다.
맨발 필사가 그러하듯 한 자 한 자 심어온 결실이다.

필사를 마치고 잠시 멈춰 선다.
모래 위에 남은 흔적들은 바람에 흐려지고 파도에 지워진다.
그마저도 아름답다.
형태는 사라져도 그 울림은 오히려 더 깊이 새겨졌으므로.

어린 왕자가 다시 속삭이는 듯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이는 법이야."

모래 위 글자는 사라져도 발바닥에 남은 감각은 선명하다.
그 여운을 품고 천천히 백사장을 걷는다.
방금 썼던 문장들을 되새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정을 파는 가게는 없어...",
"네가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맨발 필사는 단순히 글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언어와 내가 비로소 하나 되는 경험에 가깝다.

박문환 박사는 필사를 "시각에 빼앗긴 촉각을 되찾는,
손의 귀환"이라 했다.
나는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속도에 빼앗긴 감각을 되찾는, 발의 귀환"이라고.

우리는 너무 빨리 걷고,
너무 빨리 읽고,
너무 빨리 살아간다.
속도의 질주 속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감성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맨발로 모래에 글자를 새기는 동안
시간은 느려지고,
감각은 깨어나며,
감성은 돌아온다.

누군가 그랬던가.
절실하지 않은 언어는 내 것이 아니라고.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를 느끼며 발가락으로 꾹꾹 눌러 쓴 글귀는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숨결이 된다.

손 대신 발로,
종이 대신 모래에,
책상 대신 바닷가에 새긴 이 시간은 글자를 넘어 내 삶의 선명한 무늬로 남는다.

발필사.
가장 정직한 문장이다.
당신도 한 번쯤 시도해 보길 권한다.
거창한 준비물은 필요 없다.
신발 벗을 용기와 문장을 마주할 진심이면 족하다.


백사장이 없다면 흙에서,
흙이 없다면 잔디에서,
그마저 없다면 집 앞 놀이터도 좋다.
발가락으로 첫 글자를 새기는 순간,
당신은 알게 된다.
느림의 가치를,
촉각의 기쁨을,
감성의 귀환을.

마침내,
당신 안의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