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시간을 견디는 법

by 모모루

캐나다로 이주하기 전부터도 어떤 의미에서 나는 꽤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바깥세상이란 혼돈의 공간과 같아서 문 밖으로 한 발짝 디딜 때면 으레 불안과 긴장이 따라왔다. 수많은 정보와 자극의 홍수 속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중요도와 안전성 여부를 가늠하면서 받아들일지 혹은 거부할지 판단한다. 이 과정은 평생에 걸쳐 쉬지 않고 반복되었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비록 타고난 성향이 이렇다 할지라도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학교와 직장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방 안에 갇혀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다. 겉으로 봤을 때는 상식적인 범주 안에서 그럭저럭 사회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대신 외출에 대한 나름의 규칙이 생겼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장소는 피했고 연달아 약속을 잡지 않았으며 긴 시간 밖에 머물지 않았다. 나는 또 이상한 회귀본능이 있어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집구석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곤 했다. 되도록 낮에 밖에서 해야 하는 업무를 끝냈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간혹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거나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온 날이면 비록 그 시간이 즐거웠다 할지라도 극심한 피로감이 덮쳐왔다. 그러면 한동안은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내곤 했는데 그 기간이 몇 주째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이 넘어가면 결국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진다.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수다를 떨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린다. 이제 바깥세상으로 나가도 좋다는 신호다. 그 시점에 만난 사람들은 나를 매우 활발한 성격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너무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속내를 알지 못하니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좀 난감하다. 다음에 만날 때 똑같은 태도로 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몇몇은 눈치를 살피며 기분 나쁜 일이나 걱정거리가 있냐는 염려의 말을 건넨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설명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기도 애매하고 귀찮은 노릇이다.

어쨌거나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며칠에 걸쳐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늘어놓는 소리가 죄다 주제넘고 경솔해지기 시작한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생각 없이 뱉어낸 어리석은 발언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후회와 창피함이 물밀듯 밀려들어온다. 다시 침묵해야 하는 때가 왔다는 뜻이다. 나는 매번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굳이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 보호와 감정 해소가 마치 사이클처럼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있었고 이 방식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 살기 시작하면서 외톨이적 성향은 더욱 견고해졌다. 외출이라 해봤자 필요한 물건을 사러 마트나 쇼핑몰을 가거나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정도다. 따로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현저히 줄었다. 몇 달에 걸쳐 아주 가끔 약속을 잡았고 그마저도 직장에서 만나 가까워진 두어 명의 동료에 국한되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한다는 점 말고는 다른 겹점은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그저 피상적이고 단발적이었다. 이곳에서는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만한, 뭔가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상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르니 비슷한 성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을 구별하기 힘들었고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한국사람 중에서도 마음 맞는 사람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서로 알아가고 맞춰가는 과정이 언어적 한계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전보다 훨씬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혼자 있기를 즐긴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는 데에서 비롯된다. 타국에 살면서는 한국에서처럼 원할 때 바로 연락하여 약속을 잡거나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을 찾아 참석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립의 시간만이 연장되고 있었다. 사이사이 해소되지 못한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가끔은 세상의 중심에서 한없이 밀려난 기분이 들었고 나를 둘러싼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 망망대해 위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쓸쓸했다.





그쯤 되면,

마침내,

글을 쓰게 된다.





고립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쓴다. 사실 고립되어야지 비로소 쓸 수 있다. 오래전부터 글 쓰는 삶을 선망했지만 도통 실현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의 생활도 집순이의 삶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책상 앞에 진득하게 앉아지지 않았다. 완벽히 고요해질 수 없었다. 도심 한 복판의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에너지가 마음을 흩트려 놓기 일쑤였고 지나치게 밀집된 대도시의 인구밀도로 인해 사람과 사람 간 최소한의 거리 유지조차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미 뿌리 내려져 있는 기반을 뒤로한 채 혼자 시골이나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타국의 이 광활한 대지 면적은 그런 의미에서, 그러니까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글쓰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중심도시의 다운타운 정도만 피하면 어딜 가나 인적이 드물고 한가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낯선 언어는 알아들으려면 매번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하지만 같은 의미에서 신경만 끄면 그저 의미 없는 백색소음처럼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이곳에서는 물리적으로 완벽히 고요해질 수 있다.





모든 현상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이민 생활의 애로사항이라 할 만한 몇몇 특이점이 글을 쓰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도움이 된다. 이곳에서는 글쓰기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지루하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하루를 버티기 위해 쓰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쓴다. 누군가에게는 꼭 털어놓고 싶은 마음속 이야기를 글에 담는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이른 아침이면 개와 함께 아무도 없는 숲 속을 걷는다. 침묵 속에서 모든 게 수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잠잠해지면 단어가, 문장이 떠오른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아까 떠올랐던 문장을 쓰기도 하고, 쓰다 보면 원래 쓰려던 내용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글이 진행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잘 안 풀리는 글을 가지고 고군분투하다가 문득 다른 글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면 쓰던 것을 잠시 뒤로 하고 새로운 글을 쓰기도 한다. 쓰면서 마주하는 이러한 과정은 대단히 흥미롭다. 자세히는 고립의 여파가 두뇌를 일깨우고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 방식이 흥미롭다. 나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것이 알아서 작동하는 순간을 관망할 뿐이다. 마치 바퀴 하나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뿐인데 가장자리 톱니가 서로 맞물리면서 주변의 크고 작은 또 다른 바퀴가 따라 움직이는 양상과 같다. 이 과정에는 내가 관여할 일말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자연 현상이 이유를 알 수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 또한 저절로 일어난다.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탄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방향으로 밀려들어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저 파도가 가는 대로 가만히 있다 보면 언젠가 어느 지점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다가 어쩌면 정말 좋은 글을 쓰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고개를 내민다.





가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타지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내 모습이 아직까지는 그려지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삶이 너무 외롭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글을 쓰고도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낯선 땅에 평생 고립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고립되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론 고립되고도 싶은 마음이다.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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