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려면 불행해져야 하나요?

by 모모루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백일장이나 글쓰기 대회가 열리면 상을 타곤 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건네받았을 때 좀 어리둥절했었다. 그전까지는 칭찬을 좀체 받아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받아온 상장을 조심스럽게 내밀었을 때 부모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습 우수상도 아닌 그저 교내 백일장 따위, 그런 취급을 했던 것 같다. 상장을 내민 손이 민망하여 내 얼굴은 붉어졌었다. 이후에도 가끔 글쓰기 상을 받았지만 그들에게는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이삿짐을 쌀 때도 엄마는 동생이 받아온 국제 음악 콩쿠르의 대상 트로피는 챙겼지만 내 글쓰기 상장들은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죄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상을 받으러 교단 앞에 나갈 때마다 나는 꼭 내 부모가 하는 식으로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하곤 했다. 아무 쓸모 없는 상 받으면서 으스대지 말라는 핀잔을 누군가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낙담이랄지 서글픔이랄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동요하지 않는 척했으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글쓰기 상장은 그 자체로 어린 나에게 분명 의미가 있었다. 일종의 증거 같은 것이었다. 내게도 남보다 잘하는 무언가 있다는 증거, 나의 부모가 어떻게 평가하든 그들이 명백히 틀렸다는 증거.

눈으로 볼 수 없는 말 뿐인 칭찬이 아닌 종이 문서 형태의 실체가 있는 그 증거 덕분에, 사는 게 괴롭다는 생각을 성인이 된 지금보다 더 자주 하던 그때,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글쓰기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아주 잘 쓰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훨씬 불행해져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때때로 어떤 대상을 깊이 사랑하기가 몹시 버겁게 느껴졌는데 기쁨, 기대, 환희 이런 감정조차 마음을 온통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면 바닥의 온갖 찌꺼기가 떠올라 물을 뿌옇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기계처럼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이 살 수 있다면 그쪽이 더 편하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기대나 희망을 품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평탄해지면, 마음속은 마치 텅 빈 골짜기처럼, 물줄기가 말라버린 샘처럼 돼버려서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 글은 쓰고 싶은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고 그러면 또 마음이 불편했다. 가끔 아차 하는 순간에 기대, 희망, 사랑 같은 것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비집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며칠은 마음이 온통 어지러웠고 그러다 마침내 모든 게 좌절되면 한동안은 또 힘들고 슬프고 외로웠다. 우습게도 그러는 와중에는 글이 써졌다. 길을 걷다가도 머릿속에서 단어가, 문장이 마구 튀어나왔다. 무슨 코미디 같지만 정말 그랬다. 그래서 더 불행해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글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문장이 슬픔의 감정과 어떤 연결고리로 맺어지고 그걸 그대로 활자로 옮긴다면 제법 멋진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행복하고 싶었다. 외롭거나 허무하거나 슬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니까 상처받기 싫어 숨기 일쑤였지만 숨이 막혔고, 그렇다고 글을 쓰기 위해 외로워지기도 싫었다는 소리다.





글쓰기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글을 쓰게끔 이끄는 건 결국 사랑받고 싶은 갈망,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일지도 몰랐다. 살면서 내가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에 한 번도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큼은 유일한 자부심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실은 이상향적 자아를 실제 자아로 착각한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진짜 내 자아는 단지 누군가에게 관심받기 바라는 초라한 영혼에 불과하며 글쓰기는 그런 결핍을 충족시켜 주는 수많은 도구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의심이 자꾸만 들었다.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쓰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번번이 흩어지고 마는 집중력과 빈약한 인내심에 좌절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를 순수하게 사랑한다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이토록 괴로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럴듯한 글 한편을 쓰고 나면 뿌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만족의 순간은 찰나였고 쓰기 위해 들여야 하는 수고와 인내의 시간은 그에 비례해 과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흡사 거짓말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응당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진짜 목적이 그저 남에게 관심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꼭 글쓰기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외모를 열심히 가꿔 아름다워지는 편이 더 확실하고 가성비 있는 전략이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든 일단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된다면 글쓰기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편히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이 꼬리를 물었고 그렇다면 나는 더욱 쓰면 안 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처럼 목적이 불순하다면 절대로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쓰는 일에서 한없이 멀어진 몇 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돌아오곤 했다. 지독한 우울에 빠져 허우적 대던 때, 종일 자고 또 자서 더 이상 잠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밤은 오지 않고 여전히 해가 떠 있으면 모자를 뒤집어쓴 채 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걷곤 했다. 그러면 머릿속에 알 수 없는 문장이, 아무런 맥락도, 특별한 의미도 없는 문장이 마구 튀어나왔다. 마침내 밤이 찾아오면 어둠 속에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 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곤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에 시달리면서도 우습게도 글은 써졌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밉지 않았다. 깊은 밤 내면 속 무언가와 오롯이 대면하는 내 뒷모습이, 끝을 알 수 없는 컴컴한 터널을 통과하는 듯 길고 긴 우울의 시간을 글과 함께 견뎌내는 내 작은 어깨가 싫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나도 썩 쓸모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해 그 무엇도 긍정할 수 없던 시기에도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좋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글 쓰는 내가 좋다' 이 문장 하나로 귀결된다.





지금은 그냥 쓴다. 쓰는 행위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한심한 관심종자임이 사실로 판명이 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아무도 이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뭣이 됐든, 복잡하게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한다. 쓰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고, 이렇게 까지 쓰는 게 귀찮다면 그냥 관두는 편이 낫다고 수백 번 속으로 되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포기가 안 되는 거라면, 결국 쓰는 일로 돌아올 거라면, 여기에는 필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운명의 힘이,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우주적 에너지가 작동하는지도 모른다고 치부해 본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원대한 포부 따위는 없다. 글쓰기를 거룩하게 대하는 태도나 잘 써야 한다는 강박도 버렸다. 그저 쓰기를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물 한잔을 마시거나 양치질을 하는 일과처럼 그렇게 당연히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냥 쓰기로 한다. 바로 지금, 단 한 문장을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