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쟁이의 아침과 퇴근시간

회계전표, 그 단순함이 가지는 의미

by 망망대해
Accounting.png 회계전표의 예시, 회계팀은 퇴직 전까지 질리도록 봐야 할 문서다.




전표검토, 회계의 예열과정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아침에 시간에 맞춰 직장에 도착하더라도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이 그렇듯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준비단계가 필요하다. 계산기와 엑셀, 재무제표와 계정명세서와 보고서와 ERP프로그램에 둘러싸인 회계팀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빡빡한 마감일정이나 골치 아픈 이슈사항, 급하다고 여기저기서 연락 오는 타 부서 마감 요청, 상급자의 지시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일은 순차적으로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진행되어야 한다.


출근하면 언제나 30~40분 정도는 회계전표를 검토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설령 중요한 일정이 있더라도 정말 긴급한 업무가 있지 않은 한 전표부터 본다. 매일 검토하지 않으면 결재할 전표들이 쌓여 나중에 산더미가 되는 문제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 뇌를 위한 준비시간의 성격이 더 크다.


실내나 어두운 곳에 있다가 갑자기 빛이 들어오면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업무를 시작하는 데에도 몸과 마음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회계전표는 터널과도 같다. 조금씩 출구로 향하며 바깥의 빛과 풍경에 익숙해지듯 내가 회사와 업무라는 공간 속으로 들어왔음을 몸과 머리가 받아들이는 시간이 전표검토의 순간이다.


퇴근 때도 마찬가지다. 오전과 오후 내내 보다 높은 주의력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업무에 몰두하다 보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긴장이 쌓여 달군 쇠와도 같은 상태가 된다. 열을 식히려면 서서히 시간이 필요하듯, 회사모드를 끄고 퇴근하기 위한 준비시간으로 다시 전표를 본다. 마감과 보고서와 재무제표와 회계기준 사이에서 숫자와 글자로 범벅이 된 몸을 새하얀 바탕의 정리된 전표를 보며 씻어 내린다.


전표는 문과 같다. 전표를 통해 난 회사와 회계의 영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퇴근할 때 나만의 세상으로 돌아온다.




가장 작지만 공평한

회사마다 다르지만 보통 회계팀 신입으로 입사하게 되면 한동안은 전표만 주야장천 보게 한다. 간단한 잡무 외에는 그 회사에서 발생하는 매입, 매출, 자산, 경비, 자금, 급여 등 온갖 성격의 회계전표를 검토하게 된다. 나 역시 첫 회사에서 1년 동안은 팀에서 업무를 배정하지 않고 전표만 보게 한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업무에 대한 욕심은커녕 하루하루 팀장과 사수, 선배들의 눈치 보는 것만으로도 바빴기에 전표만 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꼭 1년이 지나서야 사수는 내게 결산 때 마감해야 하는 몇 가지 꼭지 업무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그때를 되돌아보니 그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전표는 회계팀의 언어고, 전표에 담긴 모든 의미와 속성과 그 변주값들을 숙지하지 않고는 업무는커녕 같은 팀원과 소통하기 어렵다. 일상에서야 각자 자신에게 편한 말투와 어순과 단어를 통해 소통하더라도 지장이 없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실수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구성원 간 합의된 용어와 기준의 정의가 필요하다.


사원 시절의 나는 그저 그날그날 쌓인 전표를 해치운다는 생각으로 출근했다. 하지만 내가 '해치운' 전표들이 하나둘 쌓여가면서 나는 회사의 문서체계와 용어와 보고형식과 회계계정의 사용법, 프로그램에서의 전표 입력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형의 '체계'들을 체화하고 있던 것이다. 소통하고 협업이 가능한 한 명의 회사원이자 회계팀원으로 올라오도록 사수는 내게 1년의 시간을 배정했던 셈이다.


상장기업이건 비상장기업이건 기업체는 재무제표를 작성한다. 재무제표상의 수치는 회계장부와 원장에서 기초한다. 그리고 회계장부와 원장의 최소한의 구성단위이자 시작점은 모두 전표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출장을 가고, 교육을 듣고, 법인카드로 사무용품과 비품을 구매하고, 때론 거금의 부서 예산으로 장비를 구매하고, 사업을 위해 원자재를 매입하거나 임직원의 급여와 원천징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적 활동은 전표화 되어 회계팀에게 접수된다.


전표는 재무제표라는 탑을 만들기 위한 벽돌이다. 탑을 쌓기 위해서는 꾸준히 벽돌을 쌓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듯이 재무제표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꾸준함만이 결과를 만든다. 그 꾸준함에는 독자 여러분이 오늘 거래처로부터 받은 전자세금계산서와, 인터넷으로 결제한 카드매출전표와, 식당 사장님께 받은 간이영수증이나 현금영수증을 가지고 작성하여 재경팀이나 회계팀에 올린 전표가 포함되어 있다. 나와 같은 회계팀의 검토자도, 전표를 작성하는 여러분도 모두 회사의 재무제표 작성에 기여하는 셈이다. 따라서 전표는 가장 사소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회사가 어엿한 사업보고서를 공시하기 위해서는 전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계팀 직원도 한 명의 어엿한 팀원이 되기 위해서는 전표에서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니 전표는 누구에게나 성장의 기회를 주는 가장 공평한 길이다.




올챙이 시절로의 시간여행

일하다 보면 나 자신의 존재감이 나의 의식 속에서마저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정신없이 바쁘거나 헤매는 날이면 내 몸 안에 '나'는 없고 대신 칼을 그어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숫자와 이메일과 전화목소리가 가득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복잡 미묘한 부서 간의 알력, 상급자-하급자 사이의 위계서열,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감정의 고리들, 독촉, 쫓기는 시간 등의 여러 유무형의 요소들 사이의 미로를 헤매다 보면 일의 의미를 넘어 나 자신이 경력과 직업의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일은 점점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들기도 한다.


지금도 전표를 출퇴근 시간에 보는 이유는 그것이 익숙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원 시절의 내가 겪었던 느낌과 감각들을 되새길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정답이 없는 복잡성 속에서 길을 잃고, 업무의 주기성과 익숙함이 나를 하나의 둔감한 기계로 개조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러다 전표를 보면 간혹 사원 시절의 나 자신이 겹쳐 보이거나 그 당시 내가 가졌던 고민들이 떠오른다.


'왜 이 전표는 이렇게 작성하지?'

'왜 이 전표에는 이런 회계계정과목을 쓰지?'

'이 전표의 회계적인 의미가 뭐지?'

'이 전표는 올바르게 작성된 건가?'


사원 시절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긴장과 배움의 연속이다. 선배들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말고 질문하라고 한다. 사원 1년 동안 난 전표를 들고 쪼르르 사수의 자리에 가 조심스레 나의 추측과 가정을 설명해 가며 전표의 의미를 물어보곤 했다. 오답이 대부분이었고 때론 정답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낯섦과 배움의 익숙함이 공존하는 경험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멀어져 가는 감정인 '낯섦'은 아직 전표에서는 찾아볼 수 있다. 전표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는 과거의 서툰 사원 '나'가 있다. 그래서 난 전표를 보는 순간이 좋다. 전표의 흰 바탕 너머에는 시간을 거슬러 나를 마주 보는 '나'가 저기에 있으니까. 그때의 자극과 신선함을 다시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으니까. 따라서 전표는 타임머신이다. 그렇게 나는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나와 대면하고 인사하며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