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속에서 의미를 잃다

회계에 있어 관리직이란

by 망망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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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실수 자체는 사소할지 몰라도, 스티븐스,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하네.”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p.85~86




조용해 보이는 회계팀의 다른 얼굴

회계팀과 숫자는 불가분의 관계다. 전표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업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수치화되지 않는 자료가 없다. 회계라는 영역의 기본개념은 사업으로 인해 기업에서 발생하는 모든 유형의 거래를 수치와 계정으로 환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숫자와 회계계정은 회계팀에게는 왼손, 오른손과도 같다.


회사마다 부서 간의 역학관계와 사내정치의 구도에 따라 영향력이 다를 순 있어도 기본적으로 재경부서는 어느 회사에서나 기본 이상의 입지와 발언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회계팀은 회사의 업무프로세스상 가장 마지막 위치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감독자이기 때문이다. 영업, 법무, R&D, 구매, 생산 등 각 직무에서 진행된 업무활동이 전표라는 길을 통해 회계장부에 반영되어야 하므로 회계팀은 관문의 문지기와도 같다. 문지기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가로막으면 앞의 모든 활동은 중단된다.

(엄밀히 말하면 정말 마지막 최종 단계가 하나 더 남아있긴 하다. 모든 기업의 활동은 대금을 수취하거나 또는 지급해야 하므로 자금의 역할이 필요한데 회계팀이 검토한 전표를 바탕으로 자금을 집행하기 때문이다.)


회계팀은 단지 회사의 손익계산서만 만들지 않는다. 수익성 분석을 위해 특정 팀이나 본부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지' 조직 단위의 손익계산서를 만들 수도 있다. 특정 부서가 보유하고 있는 설비에서 발생하는 감가상각비와 조직원들의 인건비와 받아먹는 예산 대비 얼마나 매출을 일으키는지 수치화한다면? 그 부서가 우리 회사에 재정적으로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또는 못하는지를 '이익', '손실'이라는 단어로 경영진에게 보고할 수도 있다. 따라서 회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칼을 들이밀 수 있는 조직이다. (그 이후의 여파와 후폭풍과 내부다툼은 제외하고)


그저 묵묵히 결산만 하고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부서가 될지 아니면 감찰관이 될지는 조직문화와 재무 리더의 성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혁신보다 숫자놀음에 집착‥ '인텔의 비극'은 시작됐다> - 한경 글로벌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120314281


숫자에 매몰된 판단력

작년 이맘때 모 전자에서 시작된 '서초딩' 사건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동안 사고로 시끄러웠던 보잉 사는 재무통이 CEO에 앉으면서 기술적 우위와 차별점을 잊었고 이로 인해 '재무쟁이'라는 조롱의 칭호들을 지금도 간간이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왜 배울 만큼 배우고 전문적인 재무지식과 조직경험을 갖춘 이들이 리더가 되면서 전체적인 관점을 놓칠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회계팀원으로서 추측해 본다면 숫자로 환산하여 분석할 수 있다는 회계의 대전제와 신앙심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회사의 재무부서나 회계팀이 일할만한 보람이 있는 곳인가 아닌가는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회계팀의 KPI나 팀의 목표가 '수익성 분석', '유동비율 개선', '부채비율 감소' 같은 회사의 재무제표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미 그런 회사의 재무리더는 손익에만 모든 관심이 꽂혀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재무제표가 대부분 예쁘지 않은 모양새인 경우가 많고 그걸 해결하겠다고 CEO나 대표가 재무통에게 감투와 권력을 쥐어줄 것이다.


우리의 재무통께서는 여태까지 해온 일이 재무였으며, 본인의 삶과 업무경력에서 쌓아온 지식과 자부심의 근원이 모두 재무에서만 기원한다. 그들이 외부고객이나 대리점과의 사업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영업이나, 협력업체들의 앓는 소리와 자재 수급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구매부서의 기류를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재무 리더는 수입(+)과 지출(-)이라는 양과 음의 세계에서 어느 부분이 더 크냐의 이분법적 사고관으로 회사라는 세계를 이해한다. 여기에 제조원가나 현금유동성, 차입금 등 몇 가지 고려 요소가 더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해왔고 그런 방식으로 지내왔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재무 리더는 이제 권력과 재량을 부여받았고, CEO와 대표의 기대를 받는 지금 자신의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모두 그에게 집중된다. 재무 리더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회사의 유무형의 실체에 회계와 손익이라는 단일 기준을 들이밀어 빠르면서도 손쉽게 모든 것들에 칼질을 하는 길이 첫 번째다. 두 번째 길은 모든 이해관계자들과 조직의 특성을 최대한 고려하고 장기간 머리를 싸매며 때론 회계 밖의 영역을 생각해야 하는 기약 없는 길이 놓여있다.


인간은 보통 1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거나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재무 리더에게 집중된 관심과 조명은 제한시간이 있다. 재무 리더는 결국 대부분 첫 번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08.gif 세상의 많은 것을 숫자로 바꿀 수 있다지만 계산기의 버튼만 가지고 우리 주변의 세상을 표현할 수는 없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재무 리더가 손익만 바라보다 보면 회계팀 안에서도 문제가 생긴다. 재무조직의 내부 관리를 소홀히 하게 된다. 회계팀도 사람이 모여있는 곳이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에 개선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마감을 하는데 결산일정이 제때 지켜지지 않아 재무제표 작성 기한을 준수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전표 첨부문서에 대한 규정이 없어 회계담당자마다 전표 검토 기준이 상이해 회계처리의 일관성이 없어질 수 있다. 영업이나 구매, 물류에서 발생한 데이터들이 회계 ERP프로그램에서는 그 변주값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내부의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재무 리더가 이번 달의 영업손익이 얼마인지, 유동성 비율이 얼마인지만 물어보고 얻어가는 것이 과연 그의 역할일까? '관리직'이라는 직책의 의미는 상급자의 지시사항만이 아니라 하급자와 자신이 운영하는 조직의 개선과 효율화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위아래의 개념이다. 재무 리더가 수익성에만 관점이 꽂히면 그의 업무 지시도 그런 방향으로만 하달되고 팀장과 파트장도 그런 분위기와 관점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팀원급의 실무자들은 이때부터 일하기 힘들어진다. 실무자 개개인은 아무리 업무영역이 넓어봐야 자신이 맡은 계정과목 또는 마감 꼭지를 도맡을 뿐인데 자기 보고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가 예쁘게 나올 수 있도록 고민을 하라고 한다. 리더-팀장급의 요구와 실무자가 필요로 하는 요구가 일치하지 않게 된다. KPI가 나의 업무와는 관련 없는 무언가로 설정되고, 나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성과측정 기준이 되는 순간 일에 대한 몰입도와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반면 재무부서의 목표가 '결산일정 현실화', '전표 증빙 규정 수립', '원천세 및 연말정산 업무개선'과 같이 오로지 끝없는 자기 개선과 부단한 노력을 목표로 하는 경우들도 있다. 이런 곳들은 실무자 입장에서 보기에는 재무 리더나 팀장이 조직원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한다. 회계가 주제넘게 다른 영역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오로지 대차대조표와 장부와 전표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조직인 경우다.


회계나 총무, 인사, 자금 등의 부서들이 경영지원본부나 경영지원실로 분류되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경영지원은 회사의 핵심 사업활동인 영업과 품질, 구매, R&D가 창출한 가치들을 뒤에서 사후 지원하고 뒷받침하기 위함이다.


회계가 모든 것을 수치화하려는 이유는 결국 기업의 활동을 숫자라는 언어로 번역하여 재무제표라는 문법으로 바꾸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그 얘기는 회계팀의 본질이란 1) 회계처리의 적정성을 검토하고, 2) 그것을 기반으로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재무제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3) 그 과정에서 생기는 관리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재무가 단지 경영지원의 영역을 넘어 그 이상의 재무분석과 재무관리의 관점을 갖고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손익'이라는 한 가지 길로만 귀결된다면 우리는 하늘의 별만 보고 항해를 하느라 협곡과 암초를 못 보고 좌초당할 수밖에 없다. 회계는 숫자로 말하지만 그 숫자의 기원은 기업이라는 복잡하고 매 순간 변화하는 실체로부터 발생한다.


숫자에 충실하되 그 숫자의 장막 뒤에는 더 큰 의미와 세계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 관리직으로서의 회계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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